1997.3 | [문화저널]
<제53회 백제기행>백제의 태동, 마한시대의 백제유적을 찾아서
이승훈 군산 대성중학교 교사
(2005-01-25 15:22:42)
지워진 역사, 그러나 살아있는 유적
다리 아래에서 선암사쪽으로 바라보면 강선루가 보인다.
다리 속으로 보이는 누각은 무릉도원이라고나 할까? 다리 밑에는 승천하려는 용의 머리가 조각되어 있고, 이제는 이끼에 쌓여 굳어버린 돌인데 구르는 돌이 되고 싶은 지도 모른다. 하도 세상일이 수상하니 말이다.
시작도 끝도 실체도 미스터리로 남은 백제, 그 궁금증을 가져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게 모여 버스 한 대에 동상동몽(同庠同夢)으로 떠나게 되었다. 이번 기행의 일정은 우진문화공간 앞에서 출발 -선암사 -송광사 아래 숙소 -저녁식사 -백제 기층문화 강좌 -가야금 연주감상 -취침 -송광사 답사 -아침식사 -고인돌 공원 -보림사 -나주에서의 중식 -복암리 고분 -광주박물관 -비아 전방후원분 -전주 도착으로 이어졌다. 아직도 여흥이 남아서 발길 닿는 데로 옯겨 보았다.
해발 884미터의 조계산에 이르면 장군대좌 형국을 이룬다는 선암사가 나온다. 조계산의 스카이라인은 유동미가 돋보이는 여인의 신비로운 모습이다. 아니 와불의 따스한 체온이 스민 것이리라. 신들린 사람처럼 신바람을 일으키며 조계산 깊숙이 비탈길을 돌아 들어가면 승천교가 자리하고 있다. 화강석으로 된 아치형의 무지개 다리(虹橋)이다. 석재를 맞물려 쌓은 기술이 당시의 획기적인 아이디어로 보인다. 여러 차례 홍수가 있었지만 이 다리만큼은 휩쓸려 내려가지 않았다 한다. 중학교 미술 교과서에도 소개되어 있는 이 다리는 자연과 인공미가 어울려 조화의 극치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다리 아래에서 선암사 쪽으로 바라보면 강선루가 보인다. 다리 속으로 누각은 무릉도원이라고나 할까? 다리 밑에는 승천하려는 용의 머리가 조각되어 있고, 이제는 이끼에 쌓여 굳어버린 돌인데 구르는 돌이 되고 싶은 지도 모른다. 하도 세상일이 수상하니 말이다. 삼인못을 지나자 선암사가 나왔다. 법고를 두들기는 스님의 모습을 직접 뵐 수 있었다. 소리는 컸다. 광적음(光寂音)을 듣는 듯 하였다. 법고 밑에 운집했던 사람들은 한 송이 목련을 품에 안고 저녁 안개 속에 다가가고 있다. 깨우침의 어루만짐이 생생이 피어오르는 것 같다. 천년 고찰 선암사는 태고종의 본산으로 40여 동의 크고 작은 전각이 있으며 승선교와 일주문, 대웅전, 팔상전, 원통전 등과 1철불, 2보탑, 3부도 양식으로 되어있다. 건물들은 산 교육장으로 손색이 없다.
선암사에서 버스로 송광사 아래 여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저녁식사 후에는 백제태동기의 마한에 대하여 전남대 임영진 교수의 강의를 들었다. 몇 가지만 옮겨 보겠다. “나주 영산강 유역은 5세기초까지 고분이 많고, 타 지역에서는 출토되지 않는 대형 옹관이 출토되며, 나주 신촌리에서는 금동관과 금동 신발이 출토되었다. 대형 옹관이 백제의 수도였던 한성과 공주보다도 많이 있다는 것은 아직도 마한세력이 백제와 같이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임 교수는 “서울 강남지역에서 풍납동 토성과 몽촌토성을 축조하고 대규모 적석총을 축조하기 시작하는 3세기 중엽경을 백제의 건국시기로 볼 수 있다”는 견해를 피력하였다.
백제의 분묘는 통일된 양식이 아니었다. 백제는 전방형이 많으며 궁륭형이 있고 할석에서 판석으로, 말기는 박스형(부여지방)이라 한다. “부여 능산리 석실분은 판석이 다듬어진 것이다. 무녕왕릉은 적석총과 전혀 다른 전축분이다. 중국 남조대의 유형인 것이다. 백제의 공주 천도 후에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중국 남조와 교류해서 왕권을 유지하려 했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일본에서 발견되는 전방후원분도 함평 예덕리와 광주 비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전방후원분이 축조된 이유나 피장자는 누구인가 등은 알 수 없다. 다만 “석실분은 일본과의 교류에 의해 일본식이 되었고 일본 천황가와 관계가 있을 것으로 추정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몽촌토성의 발굴 등을 소개하였다.
늦은 밤, 이쯤되니 모처럼 밖에 나와 피곤함이 쌓이게 되었다. 도립국악단원으로 있는 박달림씨의 가야금 산조를 들었다. 달 밝은 밤에 어디서 매화 향기가 나는 듯 하였다. 이어서 백발가를 병창으로, 류장영씨의 사랑가도 듣게 되었다. 가야금 산조의 빗방울 소리, 말방울 소리를 구분하는 설명까지 곁들어가며 감상하는 우리는 보너스를 받은 것이다.
“송광사 예불은 장엄하다는디, 새벽 3시에 일어나야헝게, 틀렸구나”하고 잠이 들었다. 아침 일찍 일어난 조계산 자락은 뿌옇다. 하얀 물감에 젖어 있는 화선지 같다. 그리고 오래된 나무와 바위들 속에 움직이는 산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새벽 안개를 밀치고 송광사로 발길을 재촉하여 일주문에 들어서기가 바쁘게 다리의 누각과 승방 건물이 흐르는 물과 함께 둘러 서 있다. 송광사는 국사를 열 여섯이나 배출한 승보사찰이라는 것이다. 통도사가 부처의 사리를 모신 불보사찰이고, 팔만대장경으로 불법을 계승한 법보사찰인 해인사와 더불어 삼보사찰중의 하나이다. 넉넉한 산자락 품안에 불사교육의 도량이 앉아 있는 거대한 대학을 방불케 한다. 불당보다는 불도를 닦고 수련을 하는 승방이 더 높이 세워졌다. 공부하는 승려를 살아있는 부처로 인식함이 아니겠는가. 이 절은 대한 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이다. 송광사는 국보급 유구들도 있지만 보물은 물건에 있지 않고 사람이 보물이라는 것이다. 주최측의 배려로 주지스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승방에는 녹차가 나왔고 이어서 말씀이 계속되었다. “요즈음 현실에 영합하려고 하는데 송광사의 승가집단은 그렇지 않다”하였다. “좋은 절이란 관광을 위한 절이 아니라 수행적 분위기가 있고 수행자가 많이 모여야 한다. 관광이란 물체의 뒤에서 모여야 한다. 관광이란 물체의 뒤에서 빛나는 것을 보아야 참된 관광이 아니겠는가? 승려들은 개성이 강하다. 속담에 ‘벼룩 서말은 몰고 가도 승려 셋을 몰고 못 간다’ 는 말이 있다. 그러나 이 곳은 ‘텔레비젼을 보지 말자’라는 말에 125명의 승려가 잘 지킨다”한다.
“불교 건축물은 사상성, 예술성, 기능성을 복원해내야 한다. 사찰은 온갖 무문(無門)이 많은데 그것은 차별의 문,, 분별의 문이 아니다. 진리는 어디서 어떤 방법이던지 자각(自覺)하면 그게 진리이다. 사찰조형은 모두가 기쁜 마음을 추구하게 하고 화합의 차원이 강하다. 기능 면에서는 자연 속에서 도량을 멋지게 한다.” 스님의 여러 가지 말씀을 경청하다보니 한 시간을 넘겼다.
벌써 아침식사 시간이 지났다. 녹차를 비우듯이 스님의 말씀으로 이 아침에 세속의 속된 마음을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에는 상사화 잎사귀가 화단에 무성하였다. 봄이 무르익어 사람의 애를 태우고 있다.
아침식사를 서둘러 끝내고 찾아간 곳은 고인돌 공원이다. 섬진강 지류인 보성강 하류지역에 건설된 주암댐으로 수몰된 순천, 보성, 화순 등 3개 시․군 9개면 49개 리에 위치한 문화유산을 한 자리에 모아놓은 곳이다. 고인돌을 복원하고 선사시대 살림집 형식 모형 등으로 이루어진 야외 전시장과 선사시대 출토유물을 모아놓은 유물전시관, 묘제 변천과정을 보여주는 묘제 전시관도 갖추고 있었다. 고인돌과 같이 큰 돌무덤은 전 세계적으로 분포되어 있으며 서유럽지역에서 발견된 고인돌이 5만 5천 여기이며 전남 지방에서만 무려 1만 6천 여기가 발견되었다.
이곳에서 묘제의 변천과정을 알게 되었다. 청동기 시대이후 백제초기에 걸치는 동안 사용된 묘제는 여러 가지이다. 청동기 시대는 고인돌이 사용되었다. 초기 철기 시대에는 고인돌과 함께 적석목관묘가 사용되었고 청동 유물이 고인돌에서보다 많이 출토되었다. 토광묘는 우리의 전통적인 묘제로 되어 오늘날까지 이용되고 있으며 옹관묘 5세기에 걸치는 백제 초기 동안 전남지역에 유행하였다. 옹관의 형태는 대용옹관과 전용옹관으로 구분된다. 5세기말이나 6세기초부터 석실분으로 바뀌었다. 이는 우리 나라 고구려에서 시작되어 백제를 통해 여러 지역에 보급되었는데 전남지역도 석실분이 나오는 것은 영산강 유역의 토착사회가 백제에 편입되는 사실을 반영하는 것으로 본다.
파헤쳐지고 도굴된 유물을 보면서 지워지고 있는 역사를 생각했다.
그래도 이 땅의 구석구석에서 아직도 묻혀있는 보물을 눈물어리게 찾아서 복원해 준 무명의 사람들에게 감사할 뿐이다.
백제의 태동기에 마한유적은 아직 살아서 내 아버지의 무덤과 같이 몸둘 바를 모르게 하였다.
정말 국토 어딘들 고분이 아닌 곳이 없었고 흙 한줌도 아까움을 새롭게 한 여행이었다.
매화꽃이 만발한 계곡을 지나면서 바람이 사나워졌다. 전남 장흥군 유치면 봉덕리에 위치한 보림사는 매서운 사회적 격변기를 지나면서 20여 동의 건물이 소실되었고 그 중에서 사천왕문과 일주문뿐이었는데 대적광전과 대웅전 등이 복원되었다. 보림사는 서기 759년 원표대사가 창립한 천년 사찰이다. 국보인 삼층석탑과 석등이 있고 팔각원당형을 따른 신라 전형의 부도인 보조선사 창성탑이 있다. 이 탑은 대석(臺石) 각부에는 구름과 안상(眼象), 연화문 등을 장식하고 탑신에는 문비(門扉)와 사천왕상이 조각되어 있다. 옥개석은 기왓골이 표현되어 집 같아 보인다.
자리를 옮겨 나주 곰탕 집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길을 재촉하여 나주 복암리 백제고분을 보러 갔다. 바람은 더 세게 불었다. 고분군에 다달았을 때는 기와조각 부스러기와 백자와 청자 부스러기 등이 흙 속에 박혀 있었다. 나주군 다시면에 위치한 이 곳은 영산강 유역 평야지대이다. 동쪽으로 약 1킬로미터 떨어진 회진토성(會津土城)과 관련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현재 고분군에는 4기의 고분이 있는데 현재 1호와 2호는 정비가 되어 있다. 4기의 옹관과 금동 신발 등 유물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3호 분은 1997년 현재 발굴이 실시되고 있다.
광주박물관에 들렀을 때는 오후 늦은 시간이 되고 있었다. 잠자던 유물이 다시 바로 앉아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이 박물관은 누각 형태를 본뜬 우리 나라 전통양식의 건물이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흔히 유물만 보고 오는데, 멀리서 바라본 이 건축물은 현대에 지어졌지만 아름다운 건축물이다. 선사유물과 영산강 유역의 옹관묘, 석실고분 출토의 유물,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의 불교 미술과 일반 공예품, 청자와 백자를 비롯한 회화실 등이 마련되어 있으며 신안 해저침몰 무역선의 중국 송․원 시대 유물이 잘 전시되어 있었다. 그래서 도자기 박물관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백제 시대 부장품의 유물들을 볼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비아의 전방후원분인 백제 고분을 보았다. 함평 예덕리 전방후원분과 같이 일본에서 보는 묘제이다. 일본의 대표적 고분의 하나인 후나야마 고분이 생각이 났다. 후나야마 고분에서 출토된 금동 관과 금동 신발이 무녕왕릉 것과 거의 같다. 전남의 전방후원분들은 도굴이 된 상태라 무어라고 아직 단언하기 어렵다 한다.
파헤쳐지고 도굴된 유물을 보면서 지워지고 있는 역사를 생각했다. 그래도 이 땅의 구석구석에서 아직도 묻혀있는 보물을 눈물어리게 찾아서 복원해 준 무명의 사람들에게 감사할 뿐이다. 백제의 태동기에 마한 유적은 아직 살아서 내 아버지의 무덤과 같이 몸둘 바를 모르게 하였다. 정말 국토 어딘들 고분이 아닌 곳이 없었고 흙 한 줌도 아까움을 새롭게 한 여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