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7 |
[녹차]전북지역이 한국 녹차산업의 희망이다
관리자(2005-07-06 13:46:30)
전북지역이 한국 녹차산업의 희망이다
전라북도와 정읍시가 중점시책사업으로 추진하고 있는 정읍지역 대규모 녹차 재배단지 조성사업의 실무책임을 필자가 맡고 있다. 전국의 내로라는 다인(茶人)들이 전북지역의 야생차밭에 많은 관심을 보여 필자는 오래전부터 우리지역의 야생녹차 자생지를 안내하고 있다. 그들은 대개 전북지역에도 녹차라는 식물이 존재 했었는가하고 놀라면서 자연 상태로 독립된 지역에 유전적 순계(純系)가 온전하게 보존된 점 등을 확인하고는 찬탄을 금치 못하곤 한다.
특히 정읍시 입암산 계곡에 서있는 한 그루의 차나무는 높이가 4m에 이르고 지표면 부근의 수관직경(樹冠直徑)인 근원경(根圓徑)으로 판단할 때 수령이 약 5백년 정도로 추정된다. 이 시기는 조선 시대 극심한 외침과 내부적 격변에 시달리던 때이다. 이 혼란의 시기에 차나무를 심은 ‘그 때 그곳에 살던 누군가’를 가끔 생각해 본다. 아마 세상사에 전혀 관심 없이 입암산 화전 밭을 일구고 살던 가난한 농부였을 게다. 아니면 그 곳 깊은 계곡 작은 절에서 수행하던 스님이었던가…
녹차재배의 역사는 세계적으로 약 4천년 정도로 추측하는데 우리나라의 경우는 유입된 경로와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가설만 난무할 뿐 확실치는 않다.
우리나라 녹차의 처음 재배지(始培地)라고 주장하는 경남 하동군에 의하면 신라 흥덕왕 3년(서기 828년)에 당나라 사신으로 다녀온 대렴공이 녹차 씨를 가져와 왕명으로 ‘지리산 자락’에 심었다는데 그 곳이 바로 하동이라고 한다. 최근에 들어서는 전남 구례군의 장죽전(長竹田) 차밭에 하동보다 먼저 재배를 시작하였다고 구체적 사료(史料)를 근거로 주장하고 있으며, 남원군의 실상사가 최초라고 하는 설도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1년이라도 먼저 재배를 시작하였다는 사실이 마치 녹차 종주지역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데서 비롯된 부질없는 논쟁으로 보인다.
얼마나 깨끗하고 맛있는 녹차를 생산하는가가 중요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과연 우리 전북지역 녹차재배의 역사는 어떠할까?
추측컨대 중국지역에서도 녹차작물의 상업적 재배가 활발하게 시작된 시기가 당나라였고 당과 우리나라와 사이에 비교적 활발한 무역거래가 있었으므로 녹차가 당나라에서 들어왔다면 무역의 통로였던 백제지역에 먼저 유입되었을 것이고 재배 또한 먼저 시작되었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백제의 패망으로 변변한 역사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안타까울 따름이다.
우리나라 녹차재배에 대한 구체적 근거는 지금부터 550여 년 전인 1454년(단종 2년)에 발간된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지리지』라고 할 수 있는데 36개 군현(郡縣)에서 차가 생산되었고 당시 각도 군현에서 올리는 토산품 중에서 차를 진상한 내력이 적혀있다. 전국 차 생산지역인 36개 군현 중 전북지역은 7개소(고부군, 옥구현, 부안현, 정읍현, 고창현, 흥덕현, 순창현)로서 약 20% 정도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을 보아 500 ~ 600여 년 전에 재배가 활발하게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또한 1530년(중종 25년)의 지리지인 『신동국여지승람』 제33권과 34권에도 전라북도지역의 차 생산기록이 각 특산품과 함께 열거되어 있는데 전국 38개 생산지 중 전북지역은 남원도호부가 추가되어 모두 8개소에 이르렀다.
이러한 차 산업이 조선시대 중, 후반기부터는 급격히 쇠락하기 시작하는데 이는 녹차가 왕실 및 관료들의 대표적인 수탈작물(收奪作物)이었기 때문이다. 농민들이 생산한 고급, 중급 차는 관리들이 거두어 가고 일반 백성들은 늦가을이나 초겨울에 딴 하품 차 정도를 맛볼 수 있었다. 비록 맛은 쓰고 강하지만 충분한 광합성작용으로 녹차의 기능성 성분인 비타민과 카테킨 등이 풍부하게 함유되어 있으므로 무쇠 솥에서 덖은 덖음차나 살짝 증기로 찐 후 절구에 빻아 덩어리를 지어 발효시킨 떡차(餠茶)를 주로 만들어 감기약 등으로 활용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이렇게 민초들이 마시는 차를 ‘차약(茶藥)’이라 불렀다.
근대 일제강점기에 이르러 일본인들에 의하여 차재배의 명맥이 유지되었는데, 대표적인 지역이 전남 보성, 광주지역과 더불어 전북 정읍시 입암면이다. 특히 일본인 오가와(小川)가 1923년부터 입암면 천원리와 하부리에 조성한 차밭은 그 규모가 3만평에 달했고 생산된 차 중 하부리에서 생산된 결명자차는 ‘하부차’ 녹차는 ‘세계 일류차’라는 브랜드로 전량 일본 오사카로 수출하였다고 한다. 해방 전후 우리가 무심코 사용하던 ‘하부차’, ‘오차’라는 말이 정읍지역의 차 생산에서 비롯된 것을 아는 이는 드물다.
해방 후 일본인이 물러나고 혼란스러운 정국의 와중에서 차밭은 모두 사라지고 소득 작물인 배 과수원으로 변하고 말았다.
이렇듯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전북지역의 야생차밭 면적은 현재 얼마나 남아있을까?
필자가 농촌진흥청 연구과제를 수행하면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400 ~ 500여년 된 야생차밭은 7개 시 군 13개소에 걸쳐 대략 1만3천평 정도에 달하는 것으로 밝혀졌는데 주로 옛 절터에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정읍시의 경우가 5개소 약 6천평 정도의 규모로 가장 넓었는데 내장산 벽련암 (옛 영은사 터 약 2천5백평), 고부면 교동마을 (약 5백평), 고부면 두승산 관음사 뒷산 (약 3천평), 임압면 입암산 (50평), 칠보면 시산리 (20평) 등을 들 수 있다. 고창군에 있어서는 2개소에 약 1천6백평 정도가 남아 있는데 부안면 검산리 소요사 (1백평), 선운사 입구 (약 1천5백평) 등이 있다. 순창군은 2개소로서 적성면 강경리 은적사 터 (약 3천평), 구림면 안정리 만일사 입구 (1백평), 임실군은 인계면 세룡마을 한 곳에 약 2백평정도, 김제시는 금산사 뒷산에 약 1천5백평 정도가 남아있고, 전주시에는 오목대에 한 그루가 현재까지 자라고 있다. 한편 익산시 웅포면 봉화산 옛 임해사 터에 있는 약 2백평의 야생차밭은 우리나라 야생차로서는 최북단(북위 36˚ 03')에 위치하여 생물학적으로 대단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오래된 야생차밭을 근거로 하여 전북지역의 녹차재배단지 조성 면적이 급속히 늘어나고 있다. 최근 들어 정읍시의 약 120ha, 고창군의 30ha, 순창군의 10ha, 부안군의 2ha, 김제시의 약 1ha 등을 합치면 대략 50만평(163ha)에 달하므로 이제 전국적으로도 그다지 뒤떨어지지 않는 규모라고 하겠다.
차나무는 생물학적 관점에서 보면 본디 열대성작물로서 우리나라와 같은 기후에서는 재배 적합지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재배적 측면에서 안전한 북방한계지역은 연평균기온이 15℃ 정도인 고창, 정읍, 임실에 걸친 기후벨트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러한 전북지역의 차 재배는 재배한계지에서의 기상여건의 불리함과 더불어 재배품종도 개량종 일본 품종인 야부기다 등이 아닌 자생종으로서 생육과 수량 등의 면에서도 불리하다. 그러나 최근에 들어 학술적으로 속속히 밝혀지고 있는 녹차의 인체에 대한 유익한 기능성을 감안한다면 오히려 전북지역이 최적지라고 할 수 있다. 항암(抗癌), 항노화(抗老化)작용에 관여하는 녹차의 기능성분인 카테킨, 다당류, 플라보놀 등은 주야간의 온도편차가 심한 여건에서, 개량종보다는 재래종품종에서 많이 형성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차 재배가 늘어남에 따라 각종 병충해가 확산되는 추세임을 감안하면 남쪽지역에 비하여 비교적 병충해 발생량이 적으므로 깨끗한 유기차 생산에 유리하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해방이후 차 산업의 일시적 단절로 인한 가공기술의 낙후성을 잘 극복한다면 장래 중국, 일본 등지의 차와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경쟁력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자신한다.
고려, 조선시대 진상품이었고 1920년대 최초로 외국에 수출되었던 전북지역 차의 명맥을 잇고 우리나라의 대표 상품이 될 수 있도록 지역전체가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생산자는 깨끗하고 맛있는 제품을, 소비자는 이 지역에서 생산되는 차를 많이 마셔주는 것이 필요하다.
전북이 한국 차 산업 미래의 희망이 되도록…
이동욱 | 전북대학교 농과대학을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석·박사 과정을 전공했다. 정읍시농업기술센터에서 특화기술계장으로 녹차사업을 추진했고, 현재는 사계절관광추진단 그린투어리즘 팀장으로 일하고 있다. 백제차연구회 총무와 한국차연구회 및 차학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