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7 |
풍남문2
관리자(2005-07-06 14:13:22)
풍남문에 달린 ‘완산종(完山鐘)’을 아시나요
| 홍성덕 전북대박물관 학예연구사
종(鐘) 하면 으레 고즈넉한 산사에 있는 범종(梵鐘)을 떠올립니다만 사실 종이 꼭 사찰의 것만은 아닙니다. 옛날부터 전주성에 살았던 사람들은 매일 두 차례씩 종소리를 들으면서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고 끝내었습니다. 그 종소리는 전주8경 중의 하나인 남고모종(남고사에서 울리는 종소리)이 아니고, 지금은 묵은해와 새해를 연결하고 있는 풍남문의 종소리였습니다.
한때 정오에 오포소리를 들으면서 하루의 시간을 가늠했던 적이 있었듯이, 풍남문의 종소리는 전주사람들에게 하루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시계소리였고, 성문을 여 닫는 시공의 공명이기도 했습니다. 전주성에 살았던 사람들은 물론 만마관까지 소리가 들렸다는 전주성의 종은 성의 역사만큼이나 파란만장한 생을 살아온 것 같습니다.
전주성의 종소리는 성이 만들어졌을 무렵부터 울렸던 것 같습니다. 전해오는 말로는 고려시대 전주성이 만들어지고 동서남북 사대문에 종을 걸었다고 합니다만 구체적인 증거는 찾을 수 없습니다. 기록에 처음으로 전주성의 종이 등장하는 것은 정유재란 때에 사대문이 불타 없어지면서 종이 사라져 광해군 초에 남문에 다시 종을 만들어 달았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아마도 정유재란 이전에 구체적으로 종이 있었음을 알 수 있을 뿐입니다. 전쟁의 영향인지 광해군때 만들었던 이 종은 크기도 작고 소리가 알량해서 오히려 전주사람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고 합니다.
1655년(효종 6년)에 전라감사 이만과 판관 윤비경이 다시 만들어 매달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그 종이 부서지게 되자 북(鼓)을 달아 종소리를 대신했습니다. 1731년 남문 종을 만드는 역사가 다시 시작되어 이듬해 관찰사 이수항과 판관 이제의 등이 완성하였습니다. 이 종은 1767년 정해년의 대화재에도 용케 살아남았다 합니다. 그러다 1796년 전라감사 서정수와 판관 윤광수 등이 이수항대에 만든 종에다가 쇠를 더 보태어 네 번째 종을 다시 만들었습니다. 이때에는 감영과 전주부의 백성들도 모두 십시일반으로 돈을 보태었으며, 제작기일도 50일이 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종 역시 1830년에 전라감사 조인영과 전주판관 이희평에 의해 구경 4척7푼, 높이 5척9촌1푼, 중량 530여관에 달하는 종이 만들어졌으므로 40년을 넘기지 못한 셈입니다. 종의 수명이 오래가지 못한 것은 매일 새벽 5시경에 33번, 저녁 10시경에 28번씩 울려야 했던 때문이겠지요.
수백년동안 전주사람들과 함께했던 풍남문의 종은 일본인들에 의해 옮겨지게 되었습니다. 1922년 전라북도 상품진열장(현 객사)에서 물산공진회가 열리게 되자 풍남문의 종각에 있던 종을 떼어 그 종각과 함께 진열장 앞 뜰로 이전하여 그곳에서 아침 저녁으로 타종하였던 것입니다. 이전하는 과정에서 종각은 모습이 바뀌었음은 물론입니다. 그러기를 10여년 1932년 종은 다시 풍남문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종각은 옮기지 않았기 때문에 풍남문의 2층에 메달아 놓았다고 합니다.
이 종이 언제 없어졌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2차대전 당시 군수물자로 공출된 것으로 여겨집니다만, 확실한 내용은 좀 더 조사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다만, 1957년 풍남문의 종을 주조할 것이라는 신문기사로 보아 그 때까지 풍남문의 종은 없어진 것으로 여겨집니다. 1957년 풍남문의 종소리를 복원하기 위한 노력은 1960년 3월 1일에 결실을 보는 듯 했습니다만, 제대로 울리지도 못한 채 깨져버려 놋쇠모으기 운동까지 벌였던 시민들의 염원은 물거품이 되어버렸습니다. 종소리를 다시 듣고자 했던 시민들의 바람은 깨진 종을 녹여 다시 주조하려는 노력으로 이어졌지만 이 역시 1966년 제작비 횡령사건으로 산산히 부서져 버렸고, 그해 12월 풍남문에 풍경을 다는 소찬(?)에 만족해야 했습니다. 두 번에 걸친 풍남문 종 주조의 좌절은 종소리 복원을 10년 동안 침묵케 하였습니다.
1972년 전주시 시정어머니회 제6차 3월 월례회에서 전주의 상징으로 풍남문을 채택하고, 그해 6월 김상희가 불러 유행했던 전주의 찬가가 제정되는 등, 천년전주에 대한 역사복원이 다시 탄력을 받게 됨에 따라, 1977년 다시 제기된 풍남문 종소리를 복원하려는 사업이 재개되었습니다. 고문 50명, 추진위원 79명, 집행위원 28명 등 총 157명으로 이루어진 풍남문 완산종 복원추진위원회가 1977년 2월 4일 첫 회의를 열고 중량 1천관의 종을 만들어 풍남문 옆에 종각을 세워 달기로 결정했습니다. 그해 6월 20일자로 종의 제작이 완료되었지만, 종각이 없어 완산에 오르는 중턱에 매달아 울리다 1980년 풍남문의 대대적인 보수작업으로 종각이 완성됨에 따라 현재의 자리로 옮겨졌습니다.
시대의 탓일까요, 복원된 풍남문의 종에는 조국근대화를 꿈꿨던 박정희 시대의 상징적 도안이 각인되어 있습니다. 말하자면 근대화 작업이 한창이고 유신으로 독재체제를 구축하여 장기집권을 도모했던 시대상이 투영된 것이지, 진정한 의미의 풍남문 종의 복원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전라감영 등 문화재 복원에 관한 논의가 심심치 않은 이때 풍남문 종의 수난과 복원이 갖는 의미는 새로운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참, 풍남문에 달린 종의 이름이 ‘완산종(完山鐘)’이라는 사실은 알고 계신가요. 기억해 두면 좋을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