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8 |
[무주]사시사철 관광객을 불러오는 곳
관리자(2005-08-09 10:10:42)
사시사철 관광객을 불러오는 곳
무주하면 무엇이 생각날까? 심심산골, 구천동계곡, 덕유산, 반딧불이 등등…. 하지만, 과연 무주에는 이것밖에 없을까?
2005년 무주는 아주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과거에는 무주구천동하면 많은 사람들에게 산세가 수려한 심심산골 대명사로 알려져 여름 피서지로 유명했다. 그러나 1990년대를 기점으로 무주의 지형적인 특징을 살린 무주리조트가 만들어짐으로 인하여 겨울 스포츠의 꽃인 스키와 스노우보드를 즐기기 위해 많은 젊은이들이 찾아오기 시작하면서 무주구천동은 사람들에게 겨울스포츠의 고장으로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2005년 태권도 공원과 관광 레져형 기업도시를 유치하면서 급속한 발전을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이들이 무주를 자연의 수려한 경관을 보기위한 산천관광을 주목표로 하고 찾아오는 것이 현실이다.
무주에 오면 산천은 수려한데 볼 것이 없다고 말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잘못된 것이라고 본다.
무주도 숨어있는 문화유산들이 많이 있는 고장이다. ‘무주구천동계곡’을 시작으로 엄마의 품속같이 포근한 ‘덕유산’과 무주의 심장에 속하는 ‘적상산’과 신라와 백제의 경계를 이루던 ‘라제통문’을 차례대로 소개할까 한다.
먼저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무주구천동 계곡.
무주구천동은 다른 설명이 필요치 않을 만큼 잘 알려진 곳이다. 아름다운 계곡은 33경으로 이루어져있으며 구천동 계곡 중 가장 아름다운 곳들을 지정하여 각 비경마다 이름을 붙여 놓았다. 구천동 계곡은 다른 계곡과는 다른 특별한 신비스러움이 숨어있다. 그것은 바로 물의 흐름이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계곡이나 강은 북고남저, 동고서저형의 형태를 이루고 있으나 구천동계곡의 물 흐름은 서쪽에서 발원하여 동쪽으로 그리고 북쪽으로 흘러가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계곡물에 손을 씻어보면 마치 비누를 칠한 것처럼 아주 미끄럽고 부드럽다. 구한말의 구천동 계곡을 보면 라제통문(1경)에서 시작을 하여 덕유산 정상인 향적봉(33경)에 이르기까지 낮에 햇빛을 볼 수 있는 곳은 단 두 곳뿐이었다고 할 정도로 숲이 우거져있었다. 그러나 긴 세월이 흐르면서 울창한 숲은 없어지고 지금의 모습으로 남아있는 실정이다.
덕유산은 우리나라에서 네 번째로 높은 산이다.
그러나 많은 분들은 덕유산이 그리 높다고 느끼지를 못한다. 덕유산의 지명 유래는 덕으로 품어 안아 많은 사람의 목숨을 구해줄 산이라 하여 덕유산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덕유산은 사람들을 산 가까이까지 오도록 부르고 있다. 사람들이 산행을 하는 시작지점은 해발 약 600m로서 산의 허리부분에서부터 시작하게 되며 그곳에서 산을 바라보면 동네의 앞산과 같이 여겨지는 것이다. 덕유산은 웅장하나 산을 바라보는 사람의 눈에는 친근해 보이는 그러한 특징을 가진 산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덕유산은 구천동 계곡과 무주리조트 그리고 기업도시가 들어설 안성면 칠연계곡을 끼고 있는 무주의 모산 이라고 할 수 있는 산이다. 덕유산은 구한말 의병들의 활동 근거지로서의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의병대장 문태서를 비롯하여 박춘실, 김동신이 찾아와 함께 의병활동을 전개한 신명선 대장의 아픔이 서려있는 곳이 바로 칠연계곡이다. 그리고 살아서 천년 죽어서도 천년을 산다는 주목 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이 주목나무는 덕유산의 최고봉 향적봉의 이름을 탄생시킨 것이기도 하다.
무주의 중심에는 적상산이 있다.
우리나라 100경에 들만큼 수려한 산세를 자랑하고 있는 적상산은 해발 1,034m의 자연적인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는 산이다. 적상산에는 적상산 사고와 무주의 산세를 볼 수 있는 전망대, 그리고 천년고찰의 안국사가 자리하고 있다. 사고는 조선 초기에 전국적으로 네 곳이 있었으며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그 중 세 곳이 불타버리고 전주사고에 보관 중이던 실록만이 남게 되었다. 남은 전주 사고본을 저본으로 임란 후 5부를 발행하여 5곳에 보관을 하도록 하였다. 무주의 적상산 사고는 북한의 묘향산에 있던 것을 옮겨와 보관을 하게 된 것인데 약 300년 간 아무런 침탈 없이 무사히 보존이 되어있었다. 그러나 일본의 강제 한일합방으로 인하여 적상산 실록은 조선의 황실 규장각으로 옮겨진 후 6.25동란으로 분실이 되었다고 전해오고 있다.
그러나 몇 해 전 적상산 실록의 소재가 발표되었는데 북한의 김일성종합대학 도서관에 보관이 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참으로 의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북쪽에서 옮겨온 것이 긴 세월을 지나 다시 북쪽으로 옮겨간 것이다. 사고터는 지금은 양수발전소로 인하여 현재의 자리로 옮겨 복원된 것이다.
신라와 백제의 경계선 라제통문.
라제통문하면 많은 사람들이 삼국시대에 신라와 백제의 국경으로 알고서 찾아오지만 이곳에서 천천히 돌아보면 많은 것을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은 36km에 달하는 구천동 33경의 관문이다. 이 산은 석견산 즉 일명 석모산이라 하며, 삼국시대에는 두 나라의 경계를 이루었던 산이기도하다. 굴의 길이는 약 10m정도이며 높이는 5m이며 넓이는 4-5m이다. 일제치하에서 일본인이 한국의 명산 곳곳에 쇠말뚝을 박아 산의 정기를 끊는 작업을 했는데 석모산도 명산이었기 때문에 김천으로의 도로를 직선코스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석모산을 통과하게 만들었다. 이 고장 사람들을 시켜 정으로 돌을 쪼아서 굴을 만들게 하였다.
라제통문에는 또 다른 볼거리가 있다.
그 첫째는 바로 “승소” 즉 “파리소”이다. 삼국 시대에 삼국군사가 이곳에서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벌인 곳으로 희생자가 많아 피로 가득했으며, 그 피냄새를 맡고 파리들이 모여들어 파리소라 불렀다고 한다. 둘째는 빙어약소이다. 이 고장에 살던 학자이며 장군이셨던 이만경 선생의 부모가 병환으로 누워 계셨는데, 겨울에 이곳에서 잉어가 저절로 튀어 올라 약으로 쓰였다. 그리하여 제자들이 선생님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이곳에 각자를 해놓았다고 한다. 세번째는 눌인 김환태 선생의 비가 있다. 김태환 선생은 1930년에 한국 비평 문학의 선구자로서 큰 비중을 차지하셨던 분이다. 네 번째는 의병대장 강무경선생의 동상이 자리하고 있다. 구한말에 의병장으로서 활동을 하시다가 군대가 강제로 해산되자 싸우다 쫓기는 몸이 되어 바위 밑에 숨어 있다가 체포되어 돌아가셨다.
라제통문을 중심으로 유적지와 볼거리도 많이 있는 곳이 무주구천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