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 네비게이션


분야별보기

트위터

페이스북

2005.8 |
한지 발 장인 유배근 씨
관리자(2005-08-09 10:18:11)
전주한지의 부활을 꿈꾼다 전주시 동서학동 좁은 골목길 끝자락에 자리한 파란 대문 집. 삐그덩, 철대문을 밀고 들어서니 작은 마당이 나타난다. 마당에는 평상이 하나 놓여 있고 평상 위에는 대나무 촉이 수북히 쌓여있다. 여기가 한지 발을 엮는 작업장. 붙박이로 돌아가는 선풍기 아래서 유배근(66) 장인과 부인 서정님(60) 씨가 발을 엮고 있다. 발대 아래로 줄줄이 늘어선 추가 서른 개도 넘어 보인다. 그것들을 쉬지 않고 앞뒤로 넘겨가며 대나무 발을 짜는 것이다. 밥 먹을 때만 빼고 두 내외는 늘 발대 앞에 붙박이 선풍기처럼 붙어 있다. “주문이 들어오면 하고 안 들어오면 그만 둘 생각인데, 우리 두 내외가 안 쉬고 할 정도로 주문이 들어오니까 그만 두지 못하고 계속 하는 거지...” 주문은 전국 각지에서 들어온다. 경북 안동과 청송, 강원 원주, 충북 제천, 임실 일중리, 그리고 전주의 몇몇 한지공장들. 우리나라를 다 뒤져도 한지 발 만드는 이는 여기밖에 없으니, 종이 뜨는 한지공장이라면 유배근 씨를 모르는 이가 없다. 굵기는 무명실보다 조금 굵다고 해야 할까? 실처럼 가느다란 대나무 촉을 촘촘히 엮어야 하니, 발 하나 완성하는 데 얼마만큼의 시간이 걸릴지 감히 짐작을 못하겠다. 공장마다 종이마다 크기가 다르니 기성품처럼 미리 제작해 놓을 수도 없고, 주문이 들어오면 그때그때 맞춤제작을 해야 한다. 어찌됐든 한지를 만들라치면 발 없이는 못 만드는 것이 이치이니, 한지 발의 위세가 대단하다. 하지만 옛날에 비하면 지금의 위세는 조족지혈이라고. “중국에서 종이 들어오기 전에는 우리 공장 직원이 스무 명이 넘었어요. 그래도 수요를 다 대지 못할 정도였으니 진짜 대단했죠. 나말고도 발 만드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쪽은 실력이 시원치 않았는지 다 나한테만 몰리는 거여.” “아이고 참 그때는 대단했어요. 아침 8시 30분이면 발대 앞에 앉아서 점심밥 먹을 때 한 시간, 저녁밥 먹을 때 한시간 빼고는 밤 10시까지 앉아서 일을 했응게. 일이 밀리면 날도 새야 하고... 어쩌겄어 납품 날짜 맞추려면 할 수 없지. 그래논께 집안 살림은 당최 일 같지가 않아서 지금도 나는 집안 살림을 잘 못해요.” 시집오자마자 발 짜는 일을 했던 부인 서정님 씨는 서른여덟에 신경성 위궤양을 얻어 지금도 고생 중이다. 그만큼 일도 많았고 안주인으로서 신경 써야 할 부분도 많았다. 하지만 ‘우리 부부 없으면 전주 한지 못 만든다‘는 자부심이 이들을 여기까지 이끌어 온 힘이었다. 처음부터 주목받는 일이 될 거라고 여겨서 시작한 일은 아니었다. 한때 한지공장들이 어깨를 나란히 겯고있던 완주군 소양면에서 태어난 유배근 씨. 어머니가 한지 발을 만드셨고, 자연스레 어깨너머로 발 만드는 일을 지켜보며 커왔다. “16살 땐가? 발을 엮는 데 쓰는 낚싯줄을 사러 전주로 나왔어요. 돈이 없으니까 한번에 많이 못 사고 딱 발 하나 엮을 만큼만 사요. 그거 하나 사 가는데 하루가 걸렸지. 소양에서 전주까지 걸어다녔으니까.” 그렇게 낚싯줄 공급책(?)부터 담당했던 유배근 씨는 26살에 결혼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가업을 물려받았다. 그때는 발과 함께 종이도 떴기 때문에 가업의 규모가 만만찮았다. 유배근 씨 올해 나이 예순 여섯이니 한지와 함께 해온 세월이 40년! 천년을 간다는 한지에 비하면 세월이랄 것도 없지만 ‘대한민국 유일의 한지 발 장인’이라는 칭호가 스스로 자랑스럽다. 발 만드는 것이 무에 그리 대단하길래 장인 칭호까지 얻었을까 싶지만, 그 과정을 들여다 보면 절로 고개가 끄덕거려진다. 먼저 대나무를 구해야 하는데, 담양 대나무 밭을 찾는 시기는 양력 1월 ~ 2월 사이가 좋다. “대나무가 겨우 목숨을 부지할 만큼”의 수분만 남아있을 때 대나무를 채취해야 한다. 2월을 넘어서면 대나무에 물이 오르기 시작해 쓰지 못한다. 그런 대나무로 발을 엮으면 쉬 상하고 좀이 슬어버린다.   한 해 동안 쓸 대나무를 한꺼번에 구입하기 때문에 트럭으로 대나무를 실어온다. 실어온 대나무를 마당에 부려놓고 청피를 긁어낸 뒤 마디를 다 끊어놓는다. 마디가 맺히면 좋은 한지를 만들 수 없기 때문. 끊어진 대나무를 다시 1cm간격으로 쪽을 놓고 그 쪽들을 소금물에 삶아낸다. 대나무에는 들큰한 당분기가 있어서 소금물에 삶지 않으면 좀벌레들이 금방 달려든다. 삶아낸 대나무를 햇볕에 바싹 건조시켜서 다발로 묶어 놓는다. 그러면 아무리 오래 두어도 좀이 슬거나 곰팡이가 나지 않는다. 발 주문이 들어오면 말린 대나무를 물에 푹 담가서 속죽과 피죽을 분리한다. 피죽을 세로로 일일이 쪼개서 다시 물에 이틀 정도 흠씬 적셔놓는다. 그래야 끝이 이쑤시개처럼 뾰족하게 잘 깎인다. 뾰족하게 깎인 대를 바늘구멍처럼 좁은 구멍에 넣고 몇 차례 훑어내면 적당한  굵기의 대나무 촉이 만들어진다. 촉의 굵기는 0.8mm부터 1mm가 넘는 것까지 다양하다. 이렇게 촉 하나 만드는 데 족히 20일이 넘게 걸린다. 재료준비만도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이다. 이제부터 발을 엮는다. 힘이 일정하게 실리지 않으면 발이 울퉁불퉁해진다. 그것은 곧 종이가 울퉁불퉁해진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매끄럽고 일관되게 섬세하게 발을 엮어야 좋은 종이가 나온다. “내가 종이를 만들어봤기 때문에 어떻게 엮어야 하는지를 제일 잘 알지. 종이는 두 번 떠서 한 장이 되기 때문에 발이 사방 어디에서도 일정해야 해. 또 비틀어지거나 모가 난 촉이 아깝다고 쓰면 금방 티가 나요. 종이가 균일하지 않거든.” 중국에서 들여오는 발이 그렇듯 제멋대로다. 그런데 전주의 몇몇 한지공장에서 중국 한지 발을 쓰고 있다고 한다. 워낙 가격이 싸기 때문이지만 전주한지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절대로 중국 발을 써선 안 된다는 것이 유배근 씨의 주장이다. 종이의 질을 좌우하는 것은 원산지. 국산 닥과 국산 발을 사용해야 고급스럽고 기품 있는 한지를 만들 수 있다. “엮는 기술만 따지면 30분이면 엮을 수도 있지요. 하지만 모양이 괜찮다 싶게 나오려면 한 3년에서 5년은 해야 그래도 볼 만한 발이 만들어져요.” 종이를 만들어봤기에 그의 품질검사는 엄격하다. 지금도 한지제작에 대한 꿈이 남아있지만 폐수처리 문제 때문에 공장을 폐쇄한 후 다시 시작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10여 년 전만 해도 전주 동양한지공장의 ‘유배지’는 서울에서 더 알아주는 명지였다. 국산 닥으로 꾀부리지 않고 정직하게 떴기 때문에 유배지의 명성은 자자했다. 유배지에 대한 미련을 유씨는 작품 발로 대신하고 있다. 주문 발을 제작하는 틈틈이 시간을 내어 문양이 들어간 작품 발을 만들고 있다. 공력이 배로 들어가는 작업이지만 언젠가는 한지 발들을 모아 작품전을 열고 싶은 꿈도 가지고 있다. 올 3월에 장인으로 지정되면서 월 60만원 가량의 지원비를 받게 됐지만 아직 마땅히 전수자를 찾지 못해 걱정이다. 더러 배우고 싶다고 찾아오는 이들이 있지만 워낙 돈이 안 되는 일이라 선뜻 직업 삼아 나서는 이가 없다. “한지가 살아나려면 한지업자들이 우리 한지 발을 써줘야 해요. 중국 발을 들여오는 사람들이 내내야 중국 종이 수입 업자들인데, 중국 종이 때문에 손해본다고 하면서 중국 발을 쓴다면 결국 그 수입업자 도와주는 꼴밖에 더 됩니까? 중국 발을 쓸수록 손해라는 것을 한지업자들이 알아야 해요. 중국 발 쓰면서 우리 한지 살리자고 하는 것은 어폐가 있는 것 아닙니까?” 대한민국 유일의 한지 발 장인으로 이름을 올리게 됐으니 그걸로 만족한다는 유배근 씨. 잘 나갈 때나 지금이나 다른 사람 먼저 챙겨주느라 살림은 펼 날이 없었다. 워낙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인지라 한 달에 1 ~ 2개 만드는 것이 고작. 발 하나 가격이 60만원에서 100만원을 호가하지만 두 부부의 수입은 “둘이 합쳐 일당 3만원의 삶”을 넘어서 보지 못했다. 그저 “우리 부부 없이는 대한민국 한지 못 만든다”는 자부심이 그 모든 간난신고를 잊게 할 뿐. 어떻게든 전주 한지가 다시 살아나야 한지 발 장인의 명맥도 이어갈 수 있다는 유배근 씨. 천상 손으로 일일이 엮을 수밖에 없는 한지 발의 운명처럼, 유배근 씨도 속성으로 대량으로 뭔가를 하는 것은 내켜하지 않는다. 죽을 때까지 한지 발을 손에서 놓는 일은 없을 거라는 유배근 씨 부부. 동서학동 지붕 낮은 집에서 밤낮으로 발을 엮는 부부의 꿈은 전주한지의 부활, 바로 그것이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