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8 |
어떤 자유
관리자(2005-08-09 10:21:56)
어떤 자유
고향 집 마루는 언제나 윤이 났다. 바로 앞 마당에서 콩 털고 깨 털고, 나락 훑고 보리 말리고, 멍석 털고 키질하고, 여름이면 밤늦도록 모깃불을 피워도 마루에는 먼지가 없었다. 먼지는 늘 몰려왔지만 한 꺼풀도 쌓이기 전에 누군가 닦아냈다. 그것도 위 칸, 아래 칸을 정확히 나누고, 벽의 굽도리와 만나는 곳에서는 걸레로 정확히 90도 돌린 디귿 자를 그려 안 닦이는 부분이 없게 했다. 보리 타작 일꾼들에게 새참을 이어다 주고 돌아온 오후, 몸은 땀에 절고 얼굴엔 땟국이 흘러도 먼지 낀 마루를 보면 참지 못했다. 집이 더러워지면 세상의 바닥이 꺼지기라도 할 듯, 식구들은 필사적으로 걸레질을 하고 털이개를 내둘렀다.
도시의 이층 양옥에 살다가 갑자기 들어간 시골에서의 삶은 가족 모두에게 충격이었고, 그 아픔은 수십 년이 지난 후에도 가끔 악몽으로 되돌아왔다. 온 가족이 기를 쓰고 일해도 월사금이 안 나오는 70년대 한국의 한 시골 마을에서, 식구들은 사시사철 땅을 파고, 씨를 뿌리고, 오이를 따고, 배추를 묶고, 시어 터진 열무김치에 꽁보리밥을 비벼 먹으며 가난을 살아냈다. 그리고 저녁이면 매끈한 마루에서 우아한 찻잔에 홍차를 마시며 라디오 뉴스를 듣고, 남폿불 아래서 소월과 카프카,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를 읽고, 생일이나 크리스마스엔 『소공녀』에 나올 법한 파티를 했다. 실제로 둑 너머 강에서 해 온 빨래를 널다가 내가 세라 크루랑 똑같다는 생각에 바지랑대를 붙잡고 한참 눈물을 글썽인 적도 있었다.
베토벤이 찾아온 건 바로 그런 시대의 어느 날이었다. 그 날도 마루는 깨끗했지만 어떤 일이 있어도 하루에 두 번은 하는 전체 청소 시간이라 마루청마다 꼭대기에서 디귿 자를 그리며 열심히 닦고 있던 내 귀에 듣도 보도 못한 아름다움이 강림했다. 음악 시간에 노래도 많이 배우고 때로 명곡도 감상했지만, 이 순간 들린 소리는 누군가가 하늘의 아름다움을 한데 그러모아 내 위에 유성우(流星雨)로 퍼붓는 듯 했다. 한참 정신을 놓고 있던 나는 얼른 그 소리가 흘러나오는 부엌으로 갔고, 잠시 후 부뚜막에 놓인 트랜지스터에서 『영웅』이라는 곡명이 들려왔다. 유독 길게 이어지던 나의 유년은 어쩌면 그 순간에 끝이 났다. 아무리 애써도 헤어날 길 없는 막막한 현실 앞에 부복해 있던 어린 나는 비로소 ‘비빌 언덕’을 찾은 것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나를 이만큼 끌어올리고, 충만케 하고, 기쁘게 해줄 수 있다면 절망의 지배는 끝난 것이었다. 곡이 끝나고, 몇 분전과 상당히 다른 사람이 되어 마루로 돌아온 나는 그 후로도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야 그 동네를 벗어났지만, 그 날부터 내 삶은 다채로운 리듬과 색채, 영감으로 가득 찬 수십 편의 오페라로 변모했다.
예술, 특히 음악의 마법에 걸린 사람에게 일상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첫눈이 내리면 사람들은 보통 연인에게 전화를 하거나 희미한 옛 사랑의 추억에 잠기지만 나는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을 듣는다. 방금 문전에 당도한 겨울의 노크 소리인 양 어둡고 무겁게 울리는 도입부의 저음들로부터, 무엇으로도 달랠 수 없는 고뇌와 적막 속으로 듣는 이를 휘몰아 가는 1악장의 테마, 생각에 잠긴 채 눈 쌓인 들판으로 걸어 나가듯 낮고 느리게 열리는 2악장, 한겨울 낯선 곳에서 초라하게 부유(浮游)하는 이만이 느낄 법한 검은 격정과, 뿌리 뽑힌 채 엄동의 석양을 보는 사람의 아릿한 슬픔이 돌개바람이 되어 달아나는 3악장은 해마다 내 겨울을 열어준다. 첫눈이 오면 나는 그 곡을 틀어놓고 앞으로 몇 달 동안 나를 지배할 겨울의 우울과 깊이를 알 수 없는 존재의 아픔에 맞서 내 마음을 담금질한다.
한여름, 며칠을 새벽부터 장대비가 퍼붓고 도시의 수로마다 격류가 넘쳐나는 아침이면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의 3악장이 제격이다. 집안의 창문을 모두 열어 수천수만의 빗방울 소리를 불러들이고, 그 속에 서서 처음부터 알레그로 비바체로 쏟아지는 물빛 피아노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나와 비와 그 음들이 온통 하나가 되어 질주하다가 수천 길의 벼랑을 흰 물보라로 날아 내리는 청량함을 맛볼 수 있다. 그래서 장마철이 되면 이 음반을 눈에 띄는 곳에 챙겨 두기도 한다. 한편, 친구들의 방문, 전화, 심지어 문자 메시지도 모두 끊긴 채 달랑 혼자서 보내는 긴긴 여름날 오후에는 일종의 자구책으로 슈벨트의 『숭어』를 듣기도 한다. 유럽의 어느 조촐한 교외 동네, 젊은 작곡가가 그를 사랑하는 친구들에 둘러싸여 서로 웃음 띤 눈길을 주고받으며 이 곡을 연주하는 광경, 상상해 보면 어린 시절 느꼈던 우정의 감미로움이 꿈인 듯 되살아난다. 또한 바이얼린, 비올라, 첼로, 더블베이스가 합류해 달콤하게 출렁이는 음률의 냇물 위를 반짝이듯, 휘돌듯, 도약하듯 헤엄쳐 가는 피아노의 숭어를 지켜보고 있으면 성하(盛夏)의 허무와 권태가 깨끗이 씻겨나가기도 한다.
무의미하고 부조리한 세상사에 지친 밤에는 힐데가드 폰 빙엔 (1098-1179)의 『비젼』이나 모짤트의 『대(大)미사』에 나오는 여성 독창과 중창, 힐리어드 앙상블이 연주하는 얀 가바렉의 『오피시움 Officium』이나 트리오 미디벌의 『천사의 말』을 듣는다. 아찔하도록 드높고 섬세한 이 곡들을 들으면 대개의 경우, 일상의 쳇바퀴 속에서 나도 모르게 잃어버린 신비감과 인간 존재의 살뜰한 무게를 되찾을 수 있다. 그렇게 회복된 마음에 보케리니의 기타 오중주 『판당고 Fandango』나 비발디의 미사곡 『주님의 말씀 Dixit Dominus』 같은 꿀을 더해 주면 치유를 넘어 어느 새 청신한 새벽이 훤히 밝아온다.
W. B. 예이츠의 시 「소금쟁이 Long-Legged Fly」는 케사르, 헬렌, 미켈란젤로 등 신화적인 인물들의 망중한(忙中閑)을 그리고 있다. 예이츠는 군막에서 지도를 앞에 놓은 채 턱을 괴고 몽상에 잠겨 있는 케사르, 아직 솜털을 벗지 못한 앳된 모습으로 거리에서 본 춤 스텝을 밟아 보는 헬렌, 시스틴 성당 천장에 「천지창조」를 그리다가 사다리에 기댄 채 넋을 놓고 있는 미켈란젤로의 마음이 마치 물 위를 떠다니는 소금쟁이처럼 고요 위를 헤엄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시인이 보기에 이들은 바로 그런 때 존재의 확장과 고양을 경험하고, 그런 풀림 또는 부양(浮揚)의 순간이야말로 이 창의적인 자들의 자유로움과 자족, 순수함이 형성되는 축복의 모태임을 말하고 있다. 음악은 우리에게 바로 그런 공간과 선택의 여지를 제공하고, 실제로 여러 개의 삶을 동시에 살 수 있게 해 준다. 그리고 음악에 물든 채 나이가 들다 보면 같은 곡들과의 역사가 쌓이면서 하나의 내가 수많은 청자(聽者) 또는 많은 이야기의 주인공들로 증식되는 경이로운 현상을 경험하게 된다. 복제를 통하지 않고도 수많은 내가 될 수 있고, 결 고운 나이테처럼 해가 갈수록 풍요로운 깊이를 더해갈 수 있는 길이 이것이고, 이는 결국 삶이라는 제한된 상황 속에서 그만큼의 자유와 성장의 여지를 얻는 것이니 그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