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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8 |
에로스 3부작 중 왕가위의<The Hand>
관리자(2005-08-09 10:25:57)
끝내 어긋난 당신의 손길 당신에게 옷을 전하러 갔을 때, 내가 재단사 아닌 시다라는 걸 당신이 금방 알아챘듯, 나 역시 당신이 교환의 대상이라는 것을 금방 알았지요. “이 감촉을 기억해요. 그걸로 내 아름다운 옷을 만들어 줘요.” 후아! 무례한 그러나 고혹의 당신은 이 말을 던지며 나를 만졌습니다. 그 불에 덴 듯한 불화(不和)의 순간을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돌아와 생각하니, 익지도 않은 풋감이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던 느낌입니다. 당신의 아름다움은 절대적인 권력이기에 당신의 터치는 나에게 불도장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비로소 남자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나 당신의 옷을 만들 날을 기다립니다. 정말 내 지평선에도 기다릴 만한 초저녁별이 하나 나타난 것이지요. 당신이 내게 준 관능의 기억은 앞으로 그리움이 되겠지요. 그리움은 나무처럼 자라, 나도 이제 그늘을 드리우게 되었습니다. 재단사가 된 거죠. 당신의 치수를 재던 순간이 슬로모션으로 흘러갑니다. 줄자로 둥근 더러 마른 당신의 몸을 잴 때, 나의 손은 청진기였고 또 필사하는 붓이었지요. 아시지요. 내 팔 둘이 치수를 재고 있을 때 보이지 않는 팔 두 개가 당신을 쓰다듬고 있었다는 것. 선명해요. 당신의 쇄골과 갈비뼈 아래서 잘룩해지는 굴곡이. 그런데 당신, 내가 만든 첫 옷을 내칩디다. 그러나 구슬 몇 개가 떨어진다고 그 끈이 끊어지던가요. 나는 실밥 가득한 양장점으로 돌아와 메리야스만 입고 당신 옷을 열심히 마름질했습니다, 이음새를 붙였습니다. 당신의 곡선에 무심하지 않은 나의 가위는 당신 몸이 갖는 풍파의 흔적을 잊고, 나의 손은 당신에게 부지런히 말을 건네는 거죠. 몸에 대한 온갖 고귀하고 어려운 철학적인 언어들을 잘 모릅니다만 나는 입술로 말하지 않고 옷으로 말할 겁니다. 그렇습니다. 당신에게 옷은 하나의 단어이어서 내가 만든 옷을 걸칠 때 비로소 당신은 내게 온전한 문장이 됩니다. 이제 당신은 나의 옷과 결혼한 여자입니다. 그런데, 그런데 내가 만든 옷을 입고 당신은 다른 남자를 만납니다. 하지만 나에게는 아무런 전략이 없습니다.       나도 이제 소문난 재단사가 되었습니다. 나에겐 좋은 옷이 동기입니다. 그래서 고급 옷감의 재질을 만지면 나는 당신의 몸을 생각합니다. 나, 당신의 원피스에 어울릴 핸드백도 만들어 봅니다. 당신이 내가 만든 옷을 걸칠 때, 어떤 은유를 또 간절한 억양을 발견하리라 믿어 봅니다. 또 내가 만든 옷을 걸친 당신이 가질 평화와 따뜻함을 생각하면 가슴이 설렙니다. 그러나 인연의 실꾸리는 이렇게도 모진가요? 당신의 옷을 들고 계단을 오르며 설레던 마음 여전한데, 싸구려 침대의 스프링이 만드는 슬픈 소리를 들었습니다. 숨이 터억 막혀 더 이상 낮아질 곳이 없을 계단을 내려왔습니다. 그러나 못난 나, 당신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위로를 삼습니다. 이제 지친 당신, 내게 와서 쉴 순 없나요. 당신과 내가 경작할 밭은 하나도 없어, 나, 당신의 옷에 남아있는 희미한 살 냄새와 향수를 생각할 밖에요.   마지막이겠지요. 내가 혼자 딤섬을 먹듯 혼자 국수를 먹을 당신의 처소를 찾아갑니다. 당신, 내 마음에 위안을 주는 이 옷을 걸쳤지요. 그러나 당신, 내게 보여준 것 탄식밖에 없더군요. 왜 내겐 벚꽃처럼 떨어지는 것만 있는 날들인지요? 나 한번이라도 당신이 옷을 벗은 에로스를 꿈꾸면 안됩니까? 오늘 아니면 영영 당신을 껴안을 날이 없다는 것을 아는데. 옷을 입은 에로스 밖에 없다니요. 내가 보고 만지고 느낄 수 있는 몸의 시간이 더 이상 남아있지 않은데 말입니다. 돌아와 나의 손을 들여다봅니다. 그리고 끝내 어긋난 당신과 나의 손길을 생각합니다. 내 손에 기술만 찾아왔지 내 가슴에는 현명도 용기도 끝내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분별을 지향하는 당신의 손도 에로스를 탐하던 내 손도 어쩔 수 없습니다. 타오르지도 못하고 꺼지지도 않는 내 사랑 그리고 당신의 회한 깃든 거부의 손길 생각에, 나 눈물이 납니다. 어찌합니까. 당신이 이 세상을 떠나가면 내겐 두고 간 옷 그리고 당신의 손길만 남겠지요. 당신, 이제 난 누굴 위해 옷을 지어야 합니까? butgood@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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