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8 |
경사스런 터에 세워진 ‘경기전(慶基殿)’
관리자(2005-08-09 10:29:12)
경사스런 터에 세워진 ‘경기전(慶基殿)’
글 | 홍성덕 전북대박물관 학예연구사
경기전하면 떠오르는 게 뭘까요? 전주사람들이 숱하게 들어본 말이기 때문에 경기전이 조선왕조를 세운 태조 이성계의 영정을 모셔놓은 곳이라는 것과 조선왕조실록을 보존한 전주사고가 있었던 곳이라는 것 정도는 알 터이지만, 타 지역 사람들에게 아직도 경기전은 생소한 곳임에 틀림없습니다. 경기전을 경기장과 혼돈할 정도이니 더 말할 필요도 없겠지요.
전주사람들 역시 경기전에 대한 지식은 제 각각입니다. 문화해설사가 배치되고 수많은 전주역사와 문화에 대한 교육이 이루어지고 유적답사가 있었지만, 정확하게 경기전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먼저, 대부분의 사람들은 경기전이 조경묘를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조경묘(肇慶廟)의 존재 자체를 모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림 1>에서 알 수 있듯이 엄연히 조경묘와 경기전은 분리된 두 개의 공간이었습니다. 별도의 담으로 구분되어 있고, 홍살문과 하마비(下馬碑)도 따로 따로 설치되어 출입로가 구분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은 이 두 개의 공간을 전부 둘러싼 담장이 설치되어 있어 경기전하면 으레 조경묘까지를 함께 칭하게 된 것입니다.
조경묘는 전주이씨 시조인 이한(李翰)의 위패를 모셔놓은 사당입니다. 영조의 명을 받아 정조가 위패의 글씨를 쓰고, 위패를 전송할 때 영조가 서빙고 나루터까지 나와 배웅했다고 합니다. 때문에 태조 이성계의 영정이 모셔진 건물과는 그 격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다음은, 경기전의 모습은 일본인들에 의해 많은 변형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입니다. 홍살문과 하마비의 위치가 바뀌었고 영정이 모셔진 진전의 서쪽 부속건물이 일본에 의해 모두 철거되고 그 자리에 소학교(현 중앙초등학교)를 세운 것입니다.
경기전은 전주성의 남동쪽 모퉁이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성벽과의 거리가 매우 가까웠습니다. 태조로의 경기전쪽 인도부근이 성벽이었다고 생각하면 지금처럼 정면에서 경기전에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때문에 <그림 1>에서 알 수 있듯이 경기전은 성벽을 끼고 서쪽에서 동쪽으로 향하여 들어와 외신문을 보고 왼쪽으로 돌아 진입하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홍살문과 하마비는 지금 주차장의 서쪽 끝 부분에 서쪽을 향해 서있었습니다. 조경묘는 옛 중앙초등학교 정문쪽 지금의 경기전 서쪽 문을 통해 출입했기 때문에 홍살문과 하마비는 새로이 복원된 경기전 서쪽 부속건물의 뒷편에서 역시 서쪽을 향해 있었습니다.(사진 3)
그러던 경기전이 변형되기 시작한 것은 1907년부터 시작된 전주부성 성벽 철거 이후일 것입니다. 정확한 시점을 알 수 없지만 홍살문이 외신문(外神門) 앞으로 옮겨졌으며, 하마비는 성벽이 있던 도로쪽으로 남향하게 된 것입니다. 경기전의 서쪽 부속건물은 1919년 철거되고 소학교가 세워졌습니다.(사진 1)
또한, 경기전내에는 조선왕조실록과 왕실의 족보인 선원록, 고려사절요 등의 사서(史書)를 보관하고 있던 전주사고(全州史庫)가 있었으며, 그 자리는 임진왜란 이후에 별전(別殿)에 세워져 1937년까지 존속했다는 점입니다. 즉 경기전의 주요한 특징은 태조 이성계의 어진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어진의 봉안과 함께 사고(史庫)의 설치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조선왕실의 창업자인 이성계의 어진 봉안과 그가 세운 조선왕조의 역사를 보존하는 사고의 설치는 조선왕실의 영원함을 바라는 점에서, 풍패지향(豊沛之鄕) 전주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별전(別殿)은 정유왜란 때 사라져 버린 전주사고를 대신하여 화재 등의 유사시에 태조 어진을 이전 보존하기 위하여 세운 것으로 진전과 마찬가지로 정(丁)자 형의 건물로 되어 있었습니다. 덩그라니 건물만 한 채 남아있는 전주사고는 그것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드러내기에 너무 부족한 것이 사실입니다.(사진 2)
끝으로, 전주성벽이 헐리고 전체적으로 경기전의 동쪽 부분이 높아진 것으로 보여집니다. 지금 홍살문에서 외신문으로 이어지는 통로의 동쪽부분이 1미터 이상 높아져 있습니다만, 예전에는 그처럼 높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전주시가지가 전체적으로 동고서저(東高西低)의 형태이기 때문에 동쪽이 높은 것이 일반적입니다만, 현재의 모습대로라고 한다면 하마비를 지나 어진이 있는 진전을 내려다보면서 들어가는 형국이기 때문에, 예법상으로도 맞지 않을뿐더러 우기 때에 배수 등의 문제가 발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경기전은 전체적으로 경기전 울타리 밖 동쪽 부분이 담장 안쪽보다 상당히 높아져 있습니다. 이는 성벽이 헐리는 과정에서 북돋아 진 것으로 여겨집니다. 일제시대 남아 있는 대부분의 사진들을 보면 동쪽 부분이 지금처럼은 높지 않을뿐더러 거칠게 흙더미가 놓여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경기전은 서쪽 부속채 일체가 복원됨으로써 국가의 멸망과 함께 없어져 버린 옛 모습을 다시 찾았습니다. 옛 모습을 복원한다는 것은 그것이 가지고 있는 역사문화적 의미를 새롭게 재구성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2005년 현재 우리에게 있어 경기전은 어떤 모습으로 남아야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