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9 |
블랙홀 광주와 피렌체 전주
관리자(2005-09-08 16:51:46)
블랙홀 광주와 피렌체 전주
글 | 이두엽 예원예술대학교 문화·영상창업대학원 부원장
송찬호의 시(詩) ‘임방울’을 읽을 때는 막걸리 석 잔은 마셔야 한다.
“삶이 어찌 이다지 소용돌이치며 도도히 흘러갈 수 있단 말인가.
그 소용돌이치는 여울 앞에서 나는 백년 잉어를 기다리고 있네.
어느 시절이건 시절을 앞세워 명창은 반드시 나타나는 법
유성기 음반 복각판을 틀어놓고, 노래 한 자락으로 비단옷을 지어 입었다는
그 백년 잉어를 기다리고 있네.
들어 보시게, 시절을 뛰어 넘어 명창은 한번 반드시 나타나는 법
우당탕 퉁탕 울대를 꺽으며 저 여울을 건너오는
임방울, 소리 한가락으로 비단옷을 입은 늙은이
삶이 어찌 이다지 휘몰아치며 도도히 흘러갈 수 있단 말인가”
임방울의 쑥대머리를 들으면 ‘전라도’가 느껴진다.
판소리를 적시는 막걸리 잔에는 묵은 김치가 어울린다. 걸죽하고 씨원한 맛이다.
‘잘 삭힌, 시원하고 칼칼한, 생기있는 맛’이 전라도 발효음식의 ‘맛’이라면, 판소리를 따라가는 조선의 미감(美感)과 음감(音感) 또한 ‘잘 삭힌, 시원하고 칼칼한, 생기있는 맛’이라고 강영희는 말한다. (『금빛 기쁨의 기억 - 한국인의 미의식』)
유전자속에 오랜 세월 축적된 미의식이 전라도는 다르다. DNA에 안겨있는 ‘문화적 감각’이 전라도는 뭔가 다르다. 이 남다른 문화적 감수성과 미의식, 그리고 ‘상상력의 힘’이 ‘전라도의 힘’이다. 전라북도로 좁혀보자. ‘이야기’의 고장이요 사상(思想)의 고장이다. 춘향전 흥부전 콩쥐 팥쥐에, 동학이 있고 증산이 있으니 도처에 콘텐츠의 밭(田)이 널려있는 가히 노천광맥과 같은 곳이다.
경쟁자들이 모방하기 어려우며, 거대한 성장 잠재력을 갖고 있는 미개척의 시장이 요즘 유행하는 블루오션(Blue ocean)이다. 전라북도의 수많은 이야기(동경대전을 비롯한 동학과 증산의 상상력을 포함하여), 나아가서 동아시아의 옛날이야기는 디지털 콘텐츠 시장의 ‘블루 오션’이다. 해리포터나 반지의 제왕은 북구의 신화가 토대가 되었지만 동아시아의 신화/전설/민담의 광대한 대초원은 미디어 혁명 시대의 개화를 기다리고 있는 처녀지와 같다. 누가 이 광대한 처녀지를 선점할 것인가.
블루오션은 새롭게 ‘창출’하는 것이다. ‘상상력의 힘’을 가진 선도 집단이 블루오션 전략을 체계화하고 전략적으로 실행할 때 ‘동아시아의 옛날이야기’라는 처녀지는 그들에게 정복 될 것이다. 영상산업을 핵(核)으로 하는 디지털 콘텐츠 산업은 ‘미래사회의 농업’이다. 영상은 공기처럼 우리의 삶을 휘감는다. 향후 반도체 기술의 발전에 따라서 척척 벽에 붙이는 필름TV가 개발되고 내손안의 TV/DMB가 일반화되면 우리는 그야말로 ‘영상의 숲’에서 살게 될 것이다.
부산이 영상문화중심도시이기 때문에 영상산업과 관련한 인프라는 부산으로 집적되어야 한다는 논리는 터무니없다. 한전이 이전되는 지역만 전기불이 들어오고 도로공사 가는 지역만 길 닦는다는 말인가? 영상산업은 21세기의 기간산업이기 때문에 여러 지역이 경쟁적으로 키워가야 하는 핵심 산업이다.
전북은 영상산업을 육성하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말하는 주장은 한마디로 시대착오적이다. 쌀시장이 전면 개방되면 총소득의 15%가 감소하는 농도 전북이야말로 미래형 신산업이 없으면 낙후를 면할 수 없다. 한국 영화의 43%를 전북에서 찍고 있고, 영상산업은 전후방 고용창출효과가 가장 큰 산업이다.
IT산업과 디지털 콘텐츠 산업은 다르다. 디지털 콘텐츠 산업은 기술적 기반도 중요하지만 ‘스토리 구성’을 기본 축으로 하는 ‘인문학적 상상력’이 보다 중요한 ‘상상력 산업’이다. 과거에는 지상파 TV방송사 등만이 고가의 장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영상/방송 산업을 독점할 수 있었다. 하지만 기술의 혁신이 진행되면서 최근 출시된 500만원대의 6mm HD 카메라로 영화의 제작도 가능하게 되었다. 전북에서도 이제는, 사람만 있으면, 충분히 영상산업을 발전시킬 수 있다.
‘상상력의 힘’이 강한 전라북도는 디지털 콘텐츠 산업에 명운(命運)을 걸어야한다. 전략은 (1)핵심 인프라의 유치 (2)관련기업의 유치 (3)대형 펀드의 조성 (4)대학원 이상의 전문 인력의 양성이다.
필자는 정읍에 HD 디지털 방식의 세계적 수준의 제2종합 촬영소가 유치되면 부안 영상 테마파크와 섬진강 영상벨트를 연계하고, 전주를 컴퓨터 그래픽과 애니메이션 허브로 집중 육성한 후 익산에 백제 테마파크, 남원에 민속 테마파크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문화와 관광과 영상이 함께 돌아가는 전라북도에 가장 알맞은 ‘신 발전모델’이 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한나라당 부산 출신의원들의 삭감요구에 부딪쳐 기획예산처에서 표류하고 있는 타당성 조사 용역 예산 3억원은 ‘무슨 일이 있어도’ 살려내야 한다. 땅값이 20분의 1이고, 거리가 서울에서 차량으로 정읍 두 시간 반과 부산 다섯 시간의 차인데 어찌 반도의 남동쪽 끝인 부산에 종합 촬영소를 뺏긴단 말인가. 이 예산을 뺏기면 전북은 ‘제 밥도 못 찾아 먹는다’는 비판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디지털 콘텐츠 산업의 관문을 스스로 닫아거는 과오를 자초하게 될 것임은 물론이다.
전주 전통문화 중심도시 추진전략과 디지털 콘텐츠 산업 육성은 상호보완적이다. 예를 들어 650억 규모의 ‘무형문화의 전당’ 설립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디지털 아카이브일 수밖에 없다. 자료, 문헌, 녹음자료 등이 체계적으로 관리되고 영상 자료가 촬영, 편집, 인코딩되는 아카이브 구축에 충분한 돈이 쓰여져야 한다.
상해시는 700여개의 쌈지 박물관을 만들고 있다. 전주도 쌈지 박물관을 많이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콘텐츠가 있는’ 전통문화 중심도시가 되는 길이다. 1박 2일 이면 더 볼 것이 없는 ‘콘텐츠의 가난’을 극복하는 길은 다양한 쌈지 박물관 만들기 이고, 그 박물관은 영상중심으로 채워 질수밖에 없다. 이점만 생각해봐도 전북은 디지털 콘텐츠산업이 될 수 있는 지역이다.
머지않아 ‘문화중심도시 특별법’이 통과되고 광주에 2조8천억의 국가재정이 집중투입 되면 전주는 광주의 문화적 변방이 될 위험에 처할 것이다. 광주는 ‘블랙홀’이 되어 전주의 문화적 자산을 송두리째 빨아들일 것이다. 이러한 위기를 강 건너 불 보듯이 하는 전북의 현실이 필자는 안타깝다. 방법이 있다면, 있는 자원을 총동원하여 ‘차별화된’ 디지털 콘텐츠산업으로 승부하는 것이다. 그 전략이야말로 전북의 인문학적 토대를 튼튼히 하고,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정신으로 미래를 열어가는 지역혁신의 하나의 전범(典範)이 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태리에는 피렌체가 있고 피사라는 도시가 있다. 메디치가의 거대한 재력으로 르네상스를 일구었던 피렌체는 오늘도 문화/관광/영상 산업이 함께 발전하고 있지만, 이웃 피사는 사탑으로 먹고사는 낙후된 도시다.
전주는, 전북은, 자금 피사로 전락할 위기에 있다.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투지와 전략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판소리를 들으며, 막걸리 한잔 걸죽하게 들이키면서 뱃심을 키우자. 전통문화와 사상의 뿌리 깊은 나무에 디지털 콘텐츠의 과실이 열릴 날이 멀지 않았다. 전북이여 부디 피사가 되지 말고 ‘피렌체’가 되자.
이두엽 | 고려대를 졸업하고 KBS-TV 프로듀서와 (주)서울컴 대표이사, 통합민주당 양천(을)지구당 위원장, 문화전략연구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전라북도 문화·관광 비전 연구협의회장, (사)천년전주사랑 상임이사, 국립극장, 국립방송 자문위원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