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9 |
[모악산]후천개벽의 염원을 간직한 산
관리자(2005-09-08 16:56:08)
후천개벽의 염원을 간직한 산
전라도 동쪽의 후덕한 산악지대인 무진장, 임순남 (무주, 진안, 장수, 임실, 순창, 남원을 그렇게 부른다) 지역을 전라도 땅 아니라고 할 사람은 없지만 흔히들 전라도 하면 김제, 만경 넓은 들과 황토 벌판을 먼저 떠올리는 것을 어쩌지 못한다. 그래서 전라도의 삶의 터전은 가없는 바다와 그에 이어지는 질펀한 들판으로부터 시작이 된다. 대륙의 누런 흙먼지가 답답한 봄 하늘을 가득 덮으며 서풍을 타고 바다를 건너 제일 먼저 땅을 딛는 곳이 바로 여기인데, 그래서 전라도의 황토는 대륙을 닮았다.
그곳의 중심 전주로 들어선다. 전주의 주산(主山)은 대부분의 기록에 건지산이라 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로 전주를 감싸 안고 정기를 공급하는 산은 승암산과 기린봉인 듯이 여겨진다. 8년 동안 전주에 살면서 그런 생각을 많이 했다. 아마도 전주의 주산은 어떤 이유가 있어 바뀐 것일 거라고.
여하튼 전주의 주산이 따로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산은 모악산이다. 일컬어 엄뫼, 어머니인 산이다. 산 이름이 모악인 것은 정상 서쪽에 자리 잡고 있는 쉰질바위라는 커다란 암반의 모습이 아기를 안고 있는 어머니 같기 때문이라고 한다.
일망무제의 호남 벌과 험준한 덕유, 지리산맥 사이에 평지돌출로 솟아오른 모악산은 해발 793미터로 이 일대에서는 돋보이는 높이를 가진 산이라 할 수 있다. 금남정맥(錦南正脈), 호남정맥(湖南正脈)으로 자리바꿈을 하는 위치에 둥지를 튼 이 산은 예로부터 호남사경(湖南四景)의 하나로도 유명한 곳이다.
산의 높이에 비해서는 산체가 완만한 것이 무척 둔중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실제 산에 얹히게 되면 멀리서 능선을 바라보듯이 그렇게 단순하고 간단한 산만은 아니라는 것을 곧 알게 된다. 뭐랄까, 속살이 단단한 산이랄까. 외모는 청아하나 주름이 깊은 산이랄까, 그런 느낌을 갖게 해준다.
이상하게도 이 산에는 민족적 색채가 강한 신흥종교들이 많이 번성하고 있다. 신흥종교를 연구해온 전북대 철학과 이강오 명예교수에 의하면 계룡산 지역보다 오히려 더 많은 종류의 신흥종교가 있는 곳이 바로 모악산이라고 한다. 그런데 더욱 이상한 것은 모악산은 계룡산처럼 외지에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다는 사실이다. 왜 이 산에 그렇게 모여들었을까. 하필이면 그들이 왜 이곳에서 종교 활동을 고집하고 있는 것인가.
대저 산이란 우리에게 있어 무엇인가. 우리에게는 서양과 같은 창조신화는 없다. 하늘과 땅이 스스로 그 문을 열어 세상을 시작한다는 천지개벽의 신화만이 있을 뿐이다. 이때 하늘의 영원성과 땅의 유한성을 연결시켜주는 고리 노릇을 산이나 나무가 맡는데, 나무인 경우는 대부분 산에 있는 것으로 배경이 주어지기 때문에 그것을 산으로 한정시켜도 별로 무리가 되지 않는다. 따라서 산은 우리들 모두에 있어서의 원형이다. 우리들의 원형은 모든 것의 있음의 근원에 대한 원초적인 사고의 틀, 바로 그 “위대한 어머니의 품”을 뜻하는 말로 이해가 된다.
위대한 어머니의 품인 산은 따라서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생생히 살아있는 영원한 고향이다. 하물며 시베리아 더 멀리에서부터 한반도에 이르기까지 산과 산을 이으며 유랑해 온 우리 겨레에 있어서는 더 말해 무엇하랴. 여기에 정착이 되어 살며 그들은 평지돌출(平地突出)의 그러그러한 산들을 보며 영원한 고향, 어머니의 품을 되새기게 되었다. 그런 산들 중에서도 자태의 신령스러움이나 지맥의 기력이 더욱 덧보이는 산들이 선택되어졌다. 그것이 바로 모악산인 것이다.
무릇 산이 사람을 끄는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가. 배운 사람들의 말을 빌리자면 상징성이라든지 성소라든지 하는 얘기로 설명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명산이니 명당이니 하는 말 역시 우리 식의 배운 사람들의 말장난일 뿐이다.
산이 사람을 끄는 힘은 사람이 직지(直旨)하게 받아들이는 느낌일 뿐이다. 저기에 산이 있고 그것이 나를 부른다. 나를 부르는 산으로 내가 간다. 그런데 아무 산이나 사람을 끄는 것은 아니다. 특히 못견디게 사람을 잡아끄는 산이 있다. 그것을 무엇으로 비유할 수 있을까. 사람이 자라면서 피할 수 없이 감당해야 하는 삶의 고아감 속에서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떠올리는 어머니의 품속 같은 것이라고 얘기할 수 있을까. 끝도 없는 여행길에서 서있기조차 괴로운 피로를 느끼며 풀섶에 주저앉았을 때 떠오르는 고향 마을의 저녁 밥 짓는 연기 같은 것일까. 다시는 만나볼 수 없는 돌아가신 분을 떠올리며 느끼는 애틋한 고적감 같은 것인가. 천현(天玄)한 밤하늘을 바라보며 어쩔 수 없이 빨려들어가야 하는 한없는 오묘함인가. 도대체 무엇인가.
산은 그 모든 비유를 합친 것으로도 부족하고 또 어떠한 비유로도 설명할 수 없는, 오직 느끼고 그리고 본질을 직관해야 할 그 무엇이다.
특히 그 느낌이 강한 산이 있다. 그러한 산을 사람들은 찾아 나선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당연히 가지고 있어야 할 산에 대한 느낌을 잃어버리고 산다. 세속의 삶이란 것이 본능으로 마음 속에 깃들여 있는 원형적인 느낌을 지워버린 것이다. 흔히 하는 얘기대로 현대인들의 인간성 상실이 그로써 드러난 셈이다. 모악산은 세속의 삶을 초월하여 본질에 다가가서 살아보려고 노력했던 사람들이 찾아나선, 느낌이 강한 산이다.
모악산 주변에 기대어 웅거하고 있는 교단이 모두 순수하게 세속의 어려움을 탈각하여 새로운 세상을 고대하며 수련한 사람들이라고 믿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후에 신도들이 모이고 돈이 쌓여 보다 더 세속화되기 이전에는 진정 인간의 한계성을 가슴 아파했고 삶의 어려움을 고통스러워한 적이 있었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돈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라 해도 좋을 만큼 타락이 생기니 이는 무슨 조화인지.
조선 왕조가 낙일에 이르던 무렵 증산교의 문을 연 증산 강일순도 이곳에서 큰 도를 깨우친 경우이다. 겨레의 위기와 나라의 절박한 상황을 고민하며 동학에 관심을 갖기도 하고 나름대로의 진로를 모색하던 그는 서른을 바라보는 나이에 두승산 시루봉에 모신 할머니의 산소를 성묘하러 갔다가 비로소 두승산이 끌어당기는 강렬한 느낌을 체험하고, 미친듯이 이 산에 매달리게 된다. 이것이 옛 구도자들이 자기를 계발하기 위하여 산으로, 광야로 퇴수(退修)하였다가, 힘과 영광에 가득찬 초인으로 변모하여 동료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속세로 복귀하였다는 인퇴와 복귀의 율동이었는지는 모르겠으되, 대 전환점이 되었으리라는 짐작은 든다.
그러나 모든 일을 자유자재로 할 수 있는 권능이 아니고서는 뜻을 이루지 못할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자, 이제 보다 더 그 권능을 얻기 위하여 유리하다고 생각하는 땅을 찾아나서게 된다. 이때 찾은 산이 모악산.
드디어 서른 한 살 되던 해 여름, 그리도 찾아 헤매던 산, 모악산에서 큰 비가 쏟아지고 다섯 마리 용이 심한 폭풍우를 불어내는 조화 바람 속에서 천지의 큰 도를 깨닫고, 인간의 어리석음의 근본인 탐욕과 성냄과 음란과 무지를 극복하고 절대 정적인 경지에 들어섰음을 실감하게 된다.
상통천문(上通天文) 하찰지리(下察地理) 중달인의(中達人義)의 거칠 것이 없는 차원으로 들어선 것이다. 그는 후일 문도들에 의하여 신격화되었으나, 나는 그가 광인처럼 그를 해방시켜 줄 땅을 찾아 헤맨 것으로 이해한다. 그래서인가 이곳 산자락 금산사는 말세 중생 교화의 방편이 되는 미륵신앙의 본고장으로서의 구실을 맡고 있다.
증산은 죽기 전에 예언한다. 나를 보려거든 금산사의 미륵불을 보라고. 그들은 영안의 후천개벽을 이곳 모악산에서 기대하고 있다.
최창조 | 서울대 지리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국토개발원연구원 주임연구원, 전북대학교 지리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지리학과 교수를 지냈다. 저서로 『한국의 자생풍수』, 『한국의 풍수지리』, 『좋은 땅은 어디를 말함인가』, 『땅의 눈물, 땅의 희망』이 있고, 역서로 『청오경』, 『금남경』, 『서양인이 본 생활풍수』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