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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9 |
[모악산]전주의 섬, 모악에서의 이틀
관리자(2005-09-08 16:58:15)
전주의 섬, 모악에서의 이틀 모악은 오르기 힘들었다. 모악 산행기를 부탁 받은 후, 모악을 오르기로 계획한 날은 어김없이 비가 내렸다. 정말이지 유독 모악을 오르고자 한 날은 꼭 비가 내렸다. 그러다 행여 볼일이 있어 멀리 떠날라치면 모악은 맑은 하늘과 찌는 듯한 더위 아래서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비를 맞으며 오르면 그만이었으나 궂은 날씨 속에서 모악을 오르기 싫었다. 산이야 장대빗 속에라도 오르면 어떠랴마는 모악은 어머니이기에 어머니의 마음이 편한 날 그 품속을 헤집고 들어가 어머니의 진솔한 속내를 듣고 싶었다. 그렇게, 그렇게 기다리며 날이 지나갔다. 선배의 권유로 선배의 일행과 남해의 작은 섬으로 여행을 떠나는 날에도 모악 산행기는 시작도 못하고 있었다. 그 날은 원고 마감이 며칠 남지 않은 날이었다. 마음이 조급했지만 선배에게 여행에서 빠지겠다는 말을 꺼내지도 못하고 따라나섰다. 몇 해 전부터 내 삶의 형식이 외곬이라는 조언을 해주던 선배였다. 산 속에만 갇혀 지내지 말고 바다에도 나가 넓은 바다를 즐겨 보라는 취지였다. 사려 깊은 배려였다. 인자요산(仁者樂山). 사실 내가 산을 좋아하게 된 것이 어진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어렸을 때 사촌 형을 따라나선 기억이 무심코 산으로 발길을 옮기게 된 계기였다. 많은 세월동안 내 앞에 우뚝 솟아 있는 산 속으로 빠져들며 차츰 산 생활의 요령을 익힌 것이었다. 숲 속 가득 드리워진 새벽 안개가 바람에 실려 나무사이를 가뿐히 떠다니며 이곳저곳의 꽃  잎들과 작고 예쁜 곤충과 새들의 단잠을 깨우다, 나뭇잎 사이로 스며드는 아침 햇살에 맑은 물방울로 변하는 작은 요술을 피우는 곳이 산이었다. 부러져 볼 품 없이 쓰러진 오래된 나무가 작은 씨앗을 보듬고 제 몸을 바쳐 어린 나무를 키워내는 곳이 산이었다. 그러한 요령들이 은근히 몸에 베이게 되어 이곳저곳에 산 냄새를 풍기게 된 모양이었다. 그 냄새를 선배는 외곬이라 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풍랑주의보가 내려진 날이었다. 승용차를 39대나 실을 수 있는 페리라는 큰 배였지만 목적한 섬은 갈 수가 없었다. 선배 일행이 이끄는 데로 내린 섬은 아주 작은 섬이었으나 가두리 양식장과 곳곳에 황금, 방풍, 오가피 같은 약초를 재배하는 그런 섬이었다. “섬 생활이라는 게 제 몸 부지런히 움직이면 먹고 살만하지요”라는 민박 주인의 말처럼 그렇게 살고 있는 듯한 곳이었다. 외롭지만 평화롭고 부산하지 않은 곳이 섬인 듯했다. 바람이 조금씩 거세졌다. 먼 곳에서부터 몰려오는 파도가 큰 소리와 함께 해벽에 부딪치며 흰 포말을 높이 뿌려대고 있었다. 매우 멋진 풍경이었지만 파도가 높아질수록 걱정이 되었다. 높은 풍랑 때문에 제 때에 전주로 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모악을 오르려 전주에 가야하기 때문이었다. 모악은 오르기도 힘들지만 모악으로부터 도망칠 수도 없었다. 참으로 모악은 넓디넓은 오지랖을 지닌 어미였다. 글 청탁을 받자마자 떠오른 글의 제목은 ‘전주의 섬, 모악에서의 이틀’이었다. 여느 도시처럼 전주도 도시의 팽창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그 빠른 팽창 속도만큼이나 급격히 소중한 것들을 잃어 가는 중이었다. 사람과 사람사이에 생긴 커다란 간극은 급기야 어미에 대한 그리움이나 공경심 마저 잃게 만들었다. 이제 사람들은 노상 어미를 찾지 않고 있었다. 또한 모악은 언제부터인가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강풍이 지나간 뒤거나 아니면 많은 비가 내린 다음이면 몰라도, 분명한 제 모습을 보이지 않고 희미한 모습을 보이고 있거나 아예 우리들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전주의 대기가 오염되었기 때문이었다. 기실 우리들에겐 도심의 한복판에서 모악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은 어미의 넉넉한 품에 안겨 있다는 사실에 다름 아니었다. 보이지 않는 어미와 어미를 공경치 않는 자식들… 모악은 이제 우리들에게 아틀란티스이거나 아니면 도시 한복판에 외로이 떠있는 섬으로 비쳐지고 있는 것이었지만 이런 단절된 관계를 인정할 수 없었다. 따라서 섬 같이 물러나 앉은 듯한 모악을 이틀동안 관찰해 보자는 마음이었다. 풍랑이 멎자 재빨리 전주로 돌아온 나는 수 천년동안 내리 쏟았을 어미의 사랑을 찾아내고자 마음먹었다. 아직도 진행형으로 남아있을 어미의 사랑을 찾아내지 못하면 모악과 우리들간의 인연은 점점 멀어질 것이었다. 자식을 버리고 떠난 어미처럼, 어미를 팽개친 자식처럼, 모악이 가슴에서 지워질 판이었다.   산행 방법을 세웠다. 어둠이 깔리기 시작할 때 모악에 올라 새벽에 모악의 곳곳을 밟고 내려오며 어미와 자식 간의 사랑의 증거를 찾고자했다. 구이 상학 마을을 시작으로 대원사, 수왕사를 거쳐 정상인 국사봉을 오르고 혹, 날이 좋지 않으면 수왕사 입구에 있는 정자에서 밤을 보낼 계획이었다. 저녁을 먹고 다가선 모악은 구름에 가려 발치만을 겨우 보이고 있었지만 비가 내리지 않는 상황을 위안 삼아 오르기로 했다. 도립 미술관을 지나 산길 초입으로 들어섰다. 지난 폭우에 입은 피해로 길이 많이 상해 있었다. 낮게 깔린 짙은 안개는 해드랜턴의 불빛을, 겨우 한치 앞 만을 구분할 수 있게 만들었다. 땀과 안개로 흠뻑 젖은 몸은 힘들었지만 차가운 밤 공기와 계곡을 흐르는 상쾌한 물소리로 견딜 만 했다. 계곡 물소리가 잦아들자 수왕사 입구의 정자가 보였다. 수왕의 물은 모악을 흐르는 피, 그 한 바가지의 물로 숨을 골랐다. 정자는 깨끗이 정리되어 있었다. 칠 흙 같은 어둠 속에서 정자에 앉아 옷을 챙기며 밤을 새울 준비를 했다. 잠시 뒤 몇 명의 남녀 일행이 정자에 도착했다. 그 일행은 인터넷 카페 산우회 회원들이라고 자신들을 소개했다. 현대 정보화의 사회는 피붙이들 간의 인연은 돌보지 않고 전혀 알지 못하던 사람들과 기계를 통해 새로운 인연을 맺을 수 있게 만든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했다. 그리고 혼란스러웠다. 라면을 끓여 나눠 먹으며 즐겁게 떠들던 일행 중 한 명이 많은 양의 종이를 태운다. 무엇이냐 물으니 편지라 했다. 무슨 사연이었을까 이 늦은 밤 모악에 올라 육필 편지를 태워야 한 그 연은… 야구 방망이를 들고 오른 또 다른 남녀 일행은 오랜 시간 야구방망이로 골프 스윙 레슨을 시작했다. 11시가 넘은 야심한 밤, 모악은 여러 형태의 사람들을 맞고 있었지만 그것은 내가 찾고자하던 증거는 아니었다. 그들이 모두 내려간 후 두꺼비가 엉금엉금 내게로 다가왔다. 귀뚜라미 소리가 매미 소리를 대신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며 침낭을 당겨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독경 소리에 눈이 뜨여 시계를 보니 새벽 세시, 그곳은 나 밖에 없었다. 쿵! 쿵! 쿵!  쉬- 쉬-. 번쩍 정신이 들었다. 다시 시계를 보니 5시. 모악을 오르는 사람의 소리였다. 다시, 쿵! 쿵! 쿵! 쉬- 쉬-. 내 곁을 조용히 스치며 정상으로 오르는 두 번째 사람의 발소리와 숨소리였다. 벌떡 일어났다. 쿵! 쿵! 쿵! 쉬- 쉬-. 쿵! 쿵! 쿵! 쉬- 쉬-. 쿵! 쿵! 쿵! 쉬- 쉬-.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사람의 발소리와 숨소리였지만 그 소리는 어미의 품에서 살아 뛰는 어린 생명의 심장과 그 생명을 길러내는 양수의 파도소리였다. 쿵! 쿵! 쿵! 쉬- 쉬-. 모악의 하루가 이렇게 밝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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