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10 |
외출
관리자(2005-10-13 17:19:13)
불륜도 사랑도 아닌 애매한 감정들, <외출>
프롤로그, 허진호의 초이스
연애 이야기의 세헤라자드, 허진호 감독이 창조한 남자 주인공들의 직업이 이채롭다. <8월의 크리스마스>의 한석규는 인물을 담는 사진사고 <봄날은 간다>의 유지태는 소리를 채집하는 음향 전문가. 이번엔 뭘까. 조명감독, 배용준. 하나 같이 선이 고운 남자들이다. 물론 목소리도 부드럽다. 모두 순간을 붙드는 사람들.
라이브 콘서트장, 조명을 만지던 인수(배용준)의 손전화가 울린다. 아내 수진의 교통사고 소식에 그는 강원도 삼척으로 향한다. 그리고 아내가 낯선 남자(끝내 누워만 있다가 죽는)와 함께 있었던 것을 알게 된다. 불륜이었음이 명백하지만 그는 ‘욘사마’답게 고통의 표정을 숨긴다. 순정만화 주인공 같은 이 부드러운 남자의 목소리는 작업 멘트에는 어울리겠지만 분노를 다스리기에는 뭔가 부족하다. 배용준의 이 애매한 표정과 목소리는 배신감을 감추기에 좋은 얼굴이고 서영 역의 청순미인(필자 취향은 아니지만, 남들이 그런다) 손예진은 고립감을 드러내기에 맞춤이어서 허진호의 쵸이스를 이해할 만하다.
애매하고 답답한 공기
지어미와 지아비의 바람기를 전혀 몰랐던 이 등신들은 각자의 웬수 간병을 위해 동해안 작은 도시(그러나 파도와 백사장이 있는)의 허름한 모텔에 장기투숙에 들어간다. 그리고, 경찰서에서 사고 물품을 정리하다가 또 누추한 병원 복도에서 애매한 표정으로 마주친다. 디카에 찍힌 불륜 동영상은 화려하고 웃음이 넘쳐나지만 영화 속 현실은 더할 수 없이 누추하다. 병원의 답답한 공기와 싸구려 모텔의 퀴퀴함이 직접 전해질 정도로 일상적이고 누추한 장면들로 가득 채워지는데……
두 사람은 불면의 층계에서 서성거리다 수면제를 사기 위해서 약국에서 조우하고 편의점에서 계속 스치게 된다. 일부러 가까이 하려하지 않아도 이 스침은 켜를 만든다. 이 조우 장면들은 <화양연화>의 따뜻한 조명이 갖는 스타일리쉬와는 거리가 멀다. 조명발이나 음악도 <외출>은 그저 불어대는 바람을 온몸으로 맞는 헐벗은 나무와 같을 뿐. 흑발의 양조위나 원피스가 잘 어울리는 장만옥처럼 화려함도 부드러움도 없는 무미건조 그 자체다. 손예진은 여관방에서 리모컨을 눌러대고, 배용준은 말없이 벽에 눈을 뭉쳐 던져대거나 닫힌 차안에서 노래를 부르며 스스로를 위로할 뿐. 남자도 여자도 그들이 만드는 공기나 화면도 애매하고 답답하다.
우연의 스침이 만든 허망의 켜를 쌓아간 두 사람은 답답함 속에서 조금씩 서로의 존재를 느낀다. 에둘러 에둘러 돌고 돌지만 절망의 늪에 이른 두 사람은 의지할 데 없이 헤매이고 또 마주친다. 결국 그들은 병상에 누운 배우자처럼 감정의 소용돌이에 빠져든다. 사랑이었을까?
안경 너머의 진실은?
같은 빛깔의 슬픔으로 인해 더 이상의 감정을 감추기가 어려워질 때, 그들은 외출한다. 절망의 공기가 무덤 속처럼 숨이 막히기에 그들이 거니는 바닷가나 통유리 찻집에서는 무슨 일도 일어날 수 있다. 이 초대받지 않은 외출은 당연히 고통의 행로가 된다. 그래서 호텔에서의 첫 번째 관계는 그 절망의 몸짓일 뿐. 기도가 되지 못하고 상처를 핥아주는 이상을 넘지 못함을 사랑이라 이름 붙이기 어렵다(베드신이 보여주는 노출의 심도로 하여 알 수 있다). 그러나 가슴 설렘보다는 가슴 찢음 속에서 진행되는 이 외출마저도 닫아야 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인수의 아내 수진이 의식을 회복하기에. 인수는 눈물을 흘리는 아내를 외면할 수가 없다. 그런 ‘욘사마’를 지켜보는 서영은 그가 선 자리가 다시 허방이었음을 알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야 함을 깨닫는다. 그래서, 그녀는, 운다, 오래도록. 강변으로의 외출 장면에서 춥다고 그리고 너무 멀리 왔다고 말하면서, 국도에서 해지도록 오래 앉아 가는 겨울을 그냥 보낼 뿐.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라고 술 마시고 꼬장을 부리지도 못한다. 막다른 자리에서 선택된 외출이 병상에 누운 아내에 대한 관용으로 작용하는 과정에도 배용준의 안경너머의 진실은 실로 애매하다. 남자는 단지 이 여인의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붙들어 매 줄 뿐.
음악과 화면이 만드는 사련의 불안함
‘우린 어떻게 될까요?’ 이성이 알 수 없는 방향으로 진행하는 감정들을 표현하기 위해 허진호는 여러 장치를 보여준다. 두개의 화면에 하나의 음악을 사용하는 것. 부담스런 외출 장면에 흐르던 음악을 끊지 않고 해결해야할 또 다른 사람과의 장면에 이어 붙이는 방법은 묘한 느낌을 준다. 역시 벗어날 길 없는 절망의 공기를 만들기 위한 장치일 것이다. 미혹으로 이끄는 감정의 순간들을 표현하기 위해서 감독은 일상이나 가족도 배제한 채 온전히 두 사람의 심리에만 집중할 뿐. 그래서 감독은 이들의 바닷가 외출 장면을 아름다운 화면 아닌 흔들리는 줌으로 클로즈업시키는데 화면 속 배우들은 말할 수 없이 불안한 느낌을 준다. 거의 강박관념 수준.
두 번째 베드신. 체위와 관련 없이 체취에 몰두하는 이 베드신은 슬픔의 정수. 그저 울어야 하는 사랑이기에, 어떻게 하지 못하니, 같이 우는 것이다. 같이 슬퍼하는 것이다. 사련(邪戀)이 갖는 슬픔의 심로를 아름다운 여체가 어떻게 표현하는가에 대한 허진호의 ‘장면’으로 기억하고 싶은데, 다른 이의 평이 궁금하다. 그래도 읽기 쉬운 것이 있으니 무대 조명을 만들 때의 흥분과 기대가 공연이 끝나면 치워야 하는 제설작업 같은 허무한 직업에 대한 은유 아닐까 싶다.
현재 사실의 반대가 갖게 한 의문
예쁘고 순종적 여성으로서 폭발하지 않고 가라앉기만 하는 의뭉을 표현하기에 손예진은 깊은 우물 속 같은 울림을 갖는다. 그러나 누워만 있다가 일어나 몇 마디 던지는 인수의 아내(임상효)의 선이 역할에 비해 너무 약하지 않았나 싶다. 간음한 여자를 용서하지도 버리지도 않는 내면 잔혹함의 변이과정을 배용준에게 부여했다면 임상효에게 주어진 부분은 미안함과 두려움으로 어쩌지 못하는 어려운 것일 텐데. 그런 점에서 임상효의 조연 배우로서의 누워만 있던 선이 지나치게 밋밋한 것이 감독 탓인지 배우 탓인지는 잘 모르겠다.
예술품 아닌 상품(?)으로서의 소박한 욕심을 부려 본다면. 이왕 배용준으로 가는 멜러라면 차라리 미장센으로 밀어붙였으면 하는 생각. 왜? 욘사마는 절대적 상품가치를 가진 ‘물건’이기에. 좀 더 화려하게 갔다면 애매함과 애절함이 팬시상품으로 전락했을까? 하나 더, <해피엔드>에서 불륜의 폴라로이드가 디카의 동영상으로 진화한 오늘을 담는 세련 모드로 갔다면 애매한 공기가 휘발되고 말았을까?
에필로그, 사월에 내리는 눈
이 영화를 본 후, 누군가의 귀밑머리를 붙들던 순간이 기억난다면 당신이라는 나무는 사월에 내린 눈을 경험한 사람. 꽃눈을 덮는 폭설이라 해도 다시 지나간 계절을 부르진 못한다는 것을 알기에 먼 길을 돌아온 사람. 그 눈 맞은 가지마다 피어날 이파리와 꽃들을 사랑이라 이름 짓든 아니면 말 못할 그 무엇이든, 잊을 수 없는 화인(火印)을 갖고 사는 사람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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