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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2 |
송구영신
관리자(2005-12-09 15:50:12)
12월의 달력을 미리 들추어 보았습니다. 1일이 목요일이고 31일이 토요일이라 올해 12월 달력의 밑변은 군더더기 없이 아퀴가 지어져 있었습니다. 열두 겹 기다림을 소화한 그림에서 처음 달력을 받아보았던 그날의 모습 그대로 마른 잉크 냄새가 납니다. 문득 오후 3시는 무슨 일을 하기에도 너무 이르거나 너무 늦다는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일 년이 하루라면 12월이 3시일지, 5시 반일지, 아니면 10시일지 모르지만, 그 프랑스 사람의 독백이 생각난 것은 참 오랜만이었습니다. 오래 전에 읽은 소설의 한 구절이 설렁탕 속에 숨어있던 비곗덩어리처럼 입맛을 교란시키는 순간, 익숙한 망설임의 기억이 동시에 배경에 깔리는 것이었습니다. (선택은, 사소한 것마저도, 우리를 갈림길에 몰아넣어 흔들리게 만듭니다.) 표정이 이게 뭐람, 이렇게 혼잣말을 하면서 저는 열두 장의 달력을 다시 한 장씩 넘겨 들여다보았습니다. ---- (중략) ---- 각설하고,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는 말은 글자 그대로 풀어도 재미있습니다. 인간은 오래 전부터 제 몸을 자로 사용하여 물건의 크기를 측정하였습니다. 이미 단위로서의 기능을 상실하였지만, 손바닥을 편 뼘이나 두 팔을 벌려 재던 발은 그 흔적을 보여줍니다. 영미에서는 어른의 엄지손가락 한 마디인 인치, 발바닥의 길이인 피트, 코끝에서 뻗은 손가락 끝까지로 정한 야드 따위를 여전히 사용하고 있습니다. 미터는 지구 자오선 길이의 40,000,000 분의 1로 정한 단위입니다. 그것이 피트와 야드를 몰아내기 위한 정치적인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주장도 주장이지만, 저는 몸 밖에서 표준을 찾았다는 점에 더 주목하고 싶습니다. 한편, 시간을 재는 단위는 본래부터 몸 밖에 있었던 것처럼 보입니다. 하루라는 단위는 저 태양의 행보로 정해지니 말입니다. 그러나 시간을 몸으로 재기도 하였습니다. 피사의 두오모 성당에서 흔들리는 램프를 관찰하다가 진자의 등시성을 발견할 때 갈릴레이가 사용한 시계는 자신의 맥박이었습니다. 인간척도 명제는 프로타고라스의 말이라고 전해집니다. 조각으로 전해지는 그의 말은 일반적인 해석에 따를 때 진리의 기준이 개인적이며, 따라서 상대적일 수밖에 없음을 뜻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참과 거짓을 다루는 진리의 상대성이란 보기에 따라서 체제의 안정성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될 수 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우리들의 시대는 그런 가능성을 체제 유지의 불가결한 요소로 간주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아름다움의 추구를 삶의 중요한 목표로 정해놓은 저는 진리도 상대적일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참되고, 옳고, 아름다운 것들이 공존하는 영역을 그리워합니다. 길게 말하려니 다시 말문이 막히려 하거니와, 내 몸의 지각을 바탕으로 하는 지극히 이기적이며 상대적인 미적 감각이 결코 공동체의 이익을 저해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 저의 입장입니다. 경험과 목표의 유사성이 공동의 예술을 충분히 보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경험의 해석을 독점하여 관습으로 구축하려는 경향과 맹목적 절대성의 추종은 제가 보기에 둘이 아닙니다. 연말입니다. 묵은 해를 보내고 새 해를 맞을 때입니다. 즐겁게 보내십시오. 그럼 내년에 또 뵙겠습니다. | 정철성 편집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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