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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 |
봉평과 페어몬트
관리자(2006-01-06 11:38:39)

“봉평은 지금이나 그제나 마찬가지나, 보이는 곳마다 메밀밭이어서 개울가가 어디 없이 하얀 꽃이야” 이효석의 단편소설 ‘메일꽃 필 무렵’의 한 대목이다. 봉평 장을 마치고 대화 장을 향해 가는 어둑어둑한 길, 장돌뱅이 허생원과 조선달, 그리고 허생원의 아들일 지도 모르는 젊은 총각 동이가 나귀를 끌고 가면서 젊은 시절 봉평에 얽힌 이야기보따리를 푸는 장면에서 나온 대사다. 작년 가을, 가족과 함께 봉평의 이효석축제에 간 일이 있다. 멀찍이 차를 세워놓고, 복원되었다는 생가를 찾아갔다. 작은 개천을 넘으니, 군데군데 소설 속에 나오는 장소가 재현되어 있었다. 충줏집(주막), 물방앗간, 마굿간…. 메밀밭은 아예 관광객의 사진촬영장소로 쓰기 위해 만들어진 것 같은 생각이 들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그 속에서 정겨운 포즈를 취하며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런데, 어디를 가도 감자전에 막걸리 판이다. 이효석의 생가를 묻는 말에, 들어올 손님이 아니라고 판단되었는지, 돌아오는 대답은 잘 모른다거나, “저기로”, “저쪽으로” 가보란 퉁명스런 말이 전부다. 마침 비가 와서 질척한 길을 30여분 헤맨 끝에 생가는 방문하지 못하고, 기념관에 가게 되었다. 그런데, 그 기념관이란 곳도 산 위에 있어서, 이미 헤매다 지친 탓도 있지만, 아래에서부터는 오르기 꽤 벅찬 곳이었다. 그래도 기념관은 비교적 잘 되어 있었다. 이효석의 일대를 알 수 있는 각종 연대기와 TV문학관에서 방영된 ‘메밀꽃 필 무렵’이 돌아가고 있었고, 소설 속에 등장하는 당시 사회상과 이효석이 살았던 시대를 엿볼 수 있는 각종 자료가 충분히 전시되어 있었다. 더 좋았던 것(?)은 저 아래 장터와 달리 사람이 드물어 한적하였다는 것이다. 10년 전 제임스 딘 유족이 제임스 딘의 이름과 초상을 허락 없이 사용했다는 이유로 우리나라 의류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사건이 있었다. 분쟁협상 과정에 필자는 제임스 딘의 생가가 있는 도시인 인디애나 주의 페어몬트를 방문했는데, 인구 4,000명이 채 되지 않은 이 도시에는 놀랍게도 제임스 딘 박물관이 3개나 있었다. 영화배우로 고작 2~3년간 활동하면서 '자이언트', ‘에덴의 동쪽', '이유 없는 반항' 등 3편의 영화만을 남기고 25세에 요절한 그에게, 무슨 유물이 그리 많기에 박물관이 3개씩이나 있단 말인가? 필자는 궁금증을 풀기 위해 그 중 한곳에 들어가 보았다. 제임스 딘이 사용했던 만년필, 노트 등이 무슨 고려자기나 되는 양 유리관 안에 진열되어 있었다. 그런데 필자의 시선이 멈춰선 곳은 유품이 아니라 어떤 할머니였다. 칠십은 족히 되어 보이는 할머니는 제임스 딘이 썼다는 머그잔 앞에 의자를 놓고 앉아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고 있었다. 제임스 딘이 열 살 때 캘리포니아에서 생모가 죽자 아버지는 생모의 시신이 들어있는 관과 함께 제임스 딘을 기차 화물칸에 태워 고향으로 보냈다고 한다. 어린 제임스 딘은 관 속에서 생모의 머리털을 잘라 그것을 베개 속에 넣고 살았으며, 제임스 딘의 반항적인 기질은 그때 생겼을지도 모른다는 설명 등…. 머그잔 앞에서 반나절씩 보내기로 치면, 일주일도 모자라는 관광코스임이 분명하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지금도 해마다 9월말에 있는 제임스 딘 추모기간에는 전 세계에서 구름같이 많은 인파가 찾아오고 있다고 한다. 지하자원만 자원이 아니다. 제임스 딘은 인디애나 주에 있어서 그 어떤 자원보다 귀한 자산이 아닐 수 없다.   올해도 스키 시즌 시작과 함께 많은 한류 관광객들이 욘사마를 스타덤으로 올려놓은 겨울연가의 촬영지인 용평스키장을 방문하고 있다. 남이섬을 방문하는 일본관광객들은 서울을 거치지 않고 인천공항에서 바로 남이섬으로 직행하고 있다는 말도 들린다. 그런데 최근 조사에 의하면, 한류 관광객이 순수하게 우리나라에서 쓰는 돈이 1인당 10만원이 채 되지 않는다고 한다. 우리 돈으로 15만원이나 되는 욘사마 사진집이 발매되기도 전에 10만부가 예매 완료되었다는 바다 건너편 소식과 비교할 때, 놀랍다 못해 씁쓸하기까지 한다. 물론, 최근 들어 정부도 한국관광공사를 필두로 하여 한류열풍을 산업으로 연결시키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그러나, 수백만 명의 관객을 끌어 모은 영화 실미도의 촬영세트장이 팬들에게 알려져 관광지로 개발될 조짐을 보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산림훼손 등 무허가 건축물임이 밝혀져 해당 지방자치단체가 부랴부랴 이를 철거해 버렸다는 뉴스는 우리를 맥 빠지게 한다. 미국에는 주별로 자기네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다른 나라나 다른 주를 의식하지 않고 만든 특별법이 더러 있다. 제임스 딘의 인디애나 주와 엘비스 프레슬리의 테네시 주는 유명배우나 가수의 초상 또는 성명을 상업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권리, 이른바 퍼블리시티라고 하는 권리를 매우 두텁게 보호하고 있다. 예를 들어, 인디애나 주의 경우 그 권리를 사후 100년간이나 보호해주고 있어, 미국 내에서조차 좀 심한 것이 아닌가 하는 논란이 있을 정도다. 정부는 각종 과도한 규제를 풀어 기업과 경제를 살리겠다는 공약을 수없이 되풀이해왔다. 그러나 무허가 건축물이라는 이유로 이미 관광장소가 돼버린 영화세트장을 헐어버리는 경직성을 갖고는 문화의 산업화가 활발하게 추진될 수 없다. 자기가 만든 것도 아닌데 자기 것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은 더욱 그럴싸하게 포장하여 전설로 만드는 일본과 미국의 예는 욘사마와 한류열풍을 해프닝(Happening)이 아닌 전설(Legend)로 만들기 위한 민간과 정부의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지 보여준다. 얼마 전부터, 몇몇 역사드라마의 성공으로 이제 드라마의 세트장을 서로 유치하려고 지방자치단체마다 야단이라고 한다. 문화를 산업화한다는 점에서 이제 위에서 예로 든 실미도와 같은 일의 재발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 지방자치단체들의 의식이 과거보다 훨씬 나아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더 욕심을 내자면, 몇 년 못갈 이벤트성 사업에 투자하기 보다는 장기적이고 깊은 안목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소설 속에서 허생원이 봉평 장을 찾지 않을 수 없듯, 다시 한번 아이들 손을 잡고 그곳에 가고 싶다. 그러나, 여전히 효석 생가가 어디인지를 묻는 것이 낯설게 느껴진다면, 재차 가지 않을 것이다. 첫날밤이 마지막 밤이 되었던 그날을 허생원은 이렇게 읊조린다. “돌밭에 벗어도 좋을 것을 달이 너무도 밝은 까닭에 옷을 벗으러 물방앗간으로 들어가지 않았나…” 봉평의 “달밤”, “물방앗간”, 그리고 눈이 내린 듯 허연 “메밀밭”을 어디 그 흔한 감자전이나 막걸리와 바꿀 일인가? (연세대 법대 교수, hdn@leek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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