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제문 / 문화저널의 시대적 역할과 사명 정철성 문화저널 편집주간 문화저널 2005년 11월호는 통권 210호로, 창간 18주년 기념호였다. 창간 오년, 십년을 맞았을 때처럼 또는 100호, 200호를 찍었을 때처럼 들썩거리는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감회가 새롭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변화에 대한 요구가 임계점에 달한 것처럼 보이는 저간의 형펀도 지난 세월을 뒤돌아보게 만들었다. 문화저널은 전북문화예술전문지이다. 정보와 전문의 차이는 한눈에도 명백하다. 여기서 문화저널이 제 몫을 하고 있느냐는 질문은 현재의 문화저널이 충분히 전문적인가라는 것으로 치환된다. 문화저널이 기대하는 것만큼 전문적인가? 그렇지 못하다고 한다. 변화에 대한 요구가 안팎으로부터 들려온다. 진정 변화가 필요한가? 문화저널을 바꾸어야 한다는 말이 안에서 나오든 밖에서 나오든 여기에는 그동안의 업적에 대한 자신감 또는 성취에 대한 기대가 숨어있다. 그것을 요약하자면, 그동안 한 일 다 아는 처지이니 앞으로 본때가 있게 무슨 일을 한 번 해보자/보라는 것이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앞으로 잘하자/하라는 다짐/충고이다. 지킬 것을 지키고 바꿔야 할 것을 바꾸면 된다. 그런데 범부는 또 묻지 않을 수 없다.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바꿀 것인가. 그것이 문제이다. 변화에 대한 판단과 기대가 다르고, 변화에 대한 지지의 수준이 음양을 널뛴다. 변화가 아니라 변화의 방향이 문제이다. 문화저널의 힘은 인력에 있으며, 인맥은 창간 이후 변함없는 자산이었다. 문화에 대한 인식의 공유를 바탕으로 하는 인맥의 그물이 문화저널을 지탱해 왔다. 이러한 인맥을 발행에 직접 참여하는 인원 외에 독자, 필자, 후원자로 구분할 수 있다. 문화저널을 일정한 수준의 독자를 요구한다. 그리고 그런 독자의 계층이 존재한다. 고답적이거나 현학적인 독자를 말함이 아니라, 적어도 이 시대의 한국사회에는 문화저널이 보증하는 수준의 문화적 향유를 선망하는 문화적 인간이 적지 않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계몽이 아니다. 계몽을 꿈꾸는 순간 문화저널은 믿는 도끼가 변하여 아니 땐 굴뚝의 속된 권력이 될 것이다. 잘 가공된 정보와 시원하고 전문적인 안내가 바로 그들이 원하는 물건이다. 다양한 필자의 발굴은 문화저널이 동호회지가 아니라 사회적 역할이 분명한 잡지라는 점에서도 계속 추진돼야 할 과제이다. 풍부한 외부 필진과 더불어 강화될 점이 있다면 능력 있는 기자의 육성일 것이다. 문화의 현장에 언제나 문화저널의 기자가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하여 방법을 강구하고 있다. 각설하고, 문화저널을 거쳐 간 기자들이 손으로 꼽아도 한참인데, 그들은 모두 다른 분야에서 역량을 발휘하고 있다. 한편 기자의 빈번한 교체는 지나치게 외부필진에 의존하는 관행을 낳고 자체 실행능력을 갖춘 시스템의 부재로 귀결된다. 문화저널이 기자로서의 평생직장은 아닐망정 적어도 십년직장은 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어야 한다. 가을날의 뜨락음악회가 가장 극적인 예이겠지만, 문화저널의 발간을 비롯하여 사단법인 마당이 모든 사업을 계속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후원자들의 덕분이다. 이 자리에서, 백제기행을 전시와 공연에 적용한 문화길라잡이 사업을 제안한다. 전시장에서 무엇을 보아야하는가? 공연장에서 무엇을 느껴야 하는가? 해설이 있는 전람회를 조직하여 안내하고 그 결과를 문화저널의 기사로 활용한다. 공연에 앞서 사전 정보를 제공하고 공연이 끝나면 감상을 공유한다. 이는 자연스럽게 관객비평의 형태로 공연자를 긴장시킬 것이며, 이런 관객의 증가는 공연의 수준 향상을 압박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