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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3 |
볼테르, 「관용론」(1763)
관리자(2006-03-08 21:10:38)

관용, 혹은 살림의 지혜 글 | 김영민 한일장신대학교 교수 사실 관용은 이미 낡고 낡은 얘기다. 표면상, 쉼 없이 차이들을 재생산하는 시장적 교환의 양식만한 관용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는가? 새로운 세대를 업고 등장하는 온갖 자본주의적 유행은 시시각각 불관용의 벽을 허무는 척한다. 실로 우리가 얹혀 살고있는 삶의 양식은 자본주의라는 바로 그 불관용의 체계 자체만 빼면 그 모든 것을 관용하는 듯하다. 더 나아가, 관용의 문제는 좌파 이론가들의 비판적 논의를 통해 그 이데올로기적 측면까지 충분히 분석된 바 있다. 가령, 마르쿠제는 『일차원적 인간』(1964)에서 부르주아 사회의 문화적 관용이란 결국 그 체계의 통합에 이데올로기적으로 복무하게 된다는 사실을 예리하게 밝힌다. 이글턴(T. Eagleton) 역시 그의 『포스트모더니즘의 환상』(1996)에서 개인의 권리가 주로 재산권에 집중되는 로크 이래의 자유주의적 국가이념은 그 시장주의적 관용의 환상 아래 불평등과 착취를 필연적으로 숨길 수밖에 없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관용은 스스로의 한계를 관용할 수밖에 없는 체계의 밖에서는 종종 무력하다. 가령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앞세운 전지구적 갈등이 잦아드는가 싶더니 종교적 분쟁의 모습을 띤 불관용의 백태(百態)가 화이부동의 미래상을 위협하고 있다. 9.11 사태 이후 부시 정부는 ‘이슬람교도들과 전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면서도 아랍인들에게 적대적 예각을 세우는 정책을 숨기지 않는다. 미국의 관용은 오만한 패권주의에 의탁해 있긴 하지만, 한편 마호메트를 만평(漫評)한 작가의 목숨에 현상금을 내거는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편협한 종교적 열정 역시 우리 시대의 오멘(omen)이긴 마찬가지다.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1996)에 따르면, 이른바 이데올로기의 종언 이후의 미래 사회에서 가장 위험한 충돌의 가능성은 1)서구의 오만함, 2)이슬람의 편협함, 그리고 3)중화의 자존심 등이 교차하는 가운데에서 잉태한다. 헌팅턴의 우파관료적 시각과는 별도로 그의 진단이 적중해가는 현실은 실로 걱정스럽다. ‘공동체’가 아닌 ‘체계’로서의 세계 속에서는 단지 관용만으로 평화를 보장할 수 없다. 그러나 역시 출발은 관용이어야 하며, 새로운 중세를 예고하는 미래사회의 지평에서 더욱 필요한 미덕은 한층 성숙한 관용일 것이다. 이런 뜻에서 볼테르(1694~1778)의 『관용론』(1763)은 정밀한 재독(再讀)을 요하는 고전이다. 이 책 자체가 억울한 죽음에 대한 정의로운 분노의 산물이기도 하지만, 현명한 관용의 힘이란 곧 사람을 살리는 지혜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성서』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하나님이 다른 모든 민족들의 종교를 용인했으며, 그들을 아버지와 같은 아량으로 돌보았다는 사실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어찌 다른 종교를 용인하지 못하는가?”1) 1)볼테르, 『관용론』, 송기형(외) 옮김 (한길사, 2001), 1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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