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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4 |
[브로크백 마운틴] 브로크백, 텍사스, 전주, 그리고 악양
관리자(2006-04-08 15:11:20)

흰 구름 아래 브로크백 두 남자 이야기. 말 타는 카우보이지만 총싸움하는 웨스턴 영화가 아니다. 목동 이야기 같아도 스테파네트 아가씨가 별똥별을 보면서 머리를 기대는 알퐁스 도데의 낭만적 소설 같은 이야기는 더욱 아니다. 이 두 남자는 근근이 먹고사느라 <해피 투게더(春光乍洩)>처럼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있는 멋진 등대로 여행을 가지도 못한다. 단순한 선과 악의 캐릭터가 없는 데다 관습을 뛰어넘는 특별한 퀴어가 없으니 극적 긴장도 적다. 당연히 아무런 성교육도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로크백 마운틴>에는 메아리가 길어 그 잔상은 오래 남는다. 이것은 잃어버린 낙원에 대한 기억의 이야기이기에. 뭉게구름 같은 스물의 젊은 날. 세상과 떨어져 있는 수려한 산 브로크백 양떼 방목장, 여름 한 철 함께 일하게 된 두 청년의 머리 위에는 하얀 적운(積雲)들이 큰 키로 떠 있다. 바람 한 점 없는 맑은 하늘, 지상에서 저 높은 데까지 걸쳐있는 맑은 구름 안에는 천둥과 번개, 강한 소나기, 때론 우박을 내리게 하는 물방울들이 숨어 있다. 그 멋진 그림 속, 양치기 그들에게는 째나는 목조가옥 하나 없어 냄새나는 천막이 전부. 우박과 추위에 잠 못 드는 숲 속의 외로운 짐승 에니스(히스 레저)와 잭(제이크 질렌할)은 서로를 껴안는다. 이것이 사랑이라면, 사랑의 방식이라면, 이것은 자연의 선택과 적응의 방식이었을까? 그러나 그들은 이것이 사회적 수치라는 걸 알고 능동적 중용을 택해 몸과 마음을 수습하지만…… 방목철이 끝나자 두 사람은 흐르는 강물처럼 헤어져 인생의 폭포 속으로 떨어져 나간다, 다시 만날 기약도 없이. 에니스는 알마(미셸 윌리엄스)와 결혼하여 두 딸을 먹여 살리고 구차한 컨테이너 집이나마 평수를 늘리느라 잭을 잊고 살아간다. 한편, 로데오 경기에 참가했다가 로린(앤 해서웨이)을 만나 결혼한 잭은 텍사스 어딘가에 정착하여 부자 장인의 애물단지로 삶을 유지한다. 4년이 흐른 어느 날, 내 친구의 집이 어디인가도 모르는 채 하층민으로 살아가던 에니스에게 잭의 엽서 한 장이 도착하는데. 몇 자 적히지 않은 그 엽서는 에니스에게 그간 잊고 살았던 브로크백의 날들이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이 아니라 낙원이었다는 것을, 그 감정이 잠깐 내린 소나기가 아니었음을 깨닫게 해 준다. 텍사스, 와이오밍 화폐교환이 삶의 중심인 전성기의 미국. 살림살이가 어려워지면 당연히 속도가 떨어진다. 중심에 있지 못한 그들은 굼뜨고 느리다(말과 고물 트럭을 보라). 그들은 억제할 수 없는 열정에 휩싸인 소울 메이트지만 이 느린 종족은 문명 속에서는 살 수가 없다. 미국이란 커뮤니티는 남자끼리 혼숙을 허용하지 않기에(우리네 중화산동 모텔과 달리) 그들이 갈 수 있는 곳이라곤 브로크백 흐르는 강물 앞에서의 캠핑이 전부. 미래의 꿈을 기약하지 못한 채 고작 1년에 한두 번 지속되는 중독의 관계를 짧은 만남과 부재에 따른 긴 그리움을 받아들이며 그들은 20년의 세월을 보낸다. 소수자는 언제나 주류의 목표가 된다. 주류의 시선은 그들을 소수적 취향이라기보다 사회적 이상자로 보기 때문에 이 시선의 결들은 그들을 갈라놓는다. 망원경으로 감시하는 목장주의 비웃는 시선은 그들을 타자로 몰아세워 하찮은 양치기 자리에서 쫓겨나게 하고 에니스의 아내가 갖는 경악의 시선은 그를 이혼의 굴레로 몰아넣는다. 돈에 환장한 아내와의 결별을 통해 두 사람만의 새로운 삶을 시작해 보고 싶어 하는 잭의 입장과 달리 가장의 역할에 충실하고 싶어 하는 에니스는 조심스레 관계를 유지하려는 절제된 태도를 보이지만, 금기를 깨는 자 죽음을 면치 못하는 것이 이 문명의 공식. 가난 혹은 결여의 운명을 짊어진 자들의 에로스는 잭의 석연치 않은 죽음으로 끝을 맺는다. 사고사라지만 처가의 모멸 혹은 세상의 시선이 귀여운 눈을 가진 그를 죽였을 것이라는 유추는 쉽다. 잭은 죽었지만 에니스는 잭을 보내지 아니하였기에, 그는 잭의 고향집을 찾아간다. 그가 브로크백 마운틴에 묻히고 싶어 했다는 잭의 소원을 풀어주기 위하여. 전주 메가박스 7관 외로움을 표현하는 배경으로서 롱숏으로 붙드는 산악의 만년설과 항상 푸른 나무들은 무심하다. 화면의 수려함을 비관적 사유가 덮고 있기에 양떼 빼고는 감탄을 할라치면 화면은 구차한 인생으로 얼른 비껴간다. 별이 떠 있는 강물이나 빗줄기가 마음을 건들고 지나가는 장면을 넣을 법한데 리안(李安)은 <가을의 전설>이나 <콜드 마운틴>에서처럼 멋진 풍경을 일부러 붙들지는 않는다. 왜곡과 과장을 자제하여 수려함을 무심함으로 바꾸면서 ‘여기 한 사랑이 있었노라’, 는 감독은 불친절한 사람. 그런데 이 독한 인간은 OST로 불편함에 위로를 던진다. 전주 메가박스 7관(객석이 제일 적은)은 엔딩크레딧이 끝나거든 상영장 불을 켜달라는 영화수입사의 주문을 무시하고 그냥 불을 켰다. 늦게는 일어섰지만 알바 여학생이 하품을 하던 불쾌함은 지울 수 없다. 빈 극장에 울려 퍼지던 저음의 He Was a Friend of Mine 는 그들의 애절한 사랑을 드러내는 노래이기에 여기 옮겨 본다. …/ 그를 생각할 때마다 눈물이 흐르네/ 그는 내 친구였기 때문에 그는 나그네처럼 떠돌다가/ 떠돌다가 죽었지 그의 영혼은 머물 곳이 없었네/ 그는 내 친구였네 난 그에게서 도망쳤지/ 그리고 난 울었네 난 가난했고 불안했기 때문이지/ 그는 내 친구였네/ … 악양 동매리 오두막 나도 커밍아웃해야겠다. 일년에 한두 번은 그의 오두막에서 자고 온다. 약양은 세 시간을 달려야 한다. 멀다. 나는 보급투쟁한 물품을 내려놓고 흙내 나는 방에서 쉰다. 그는 다시마를 먼저 끓이고 창고에 걸려있는 시레기를 삶아 찌개를 만든다. 익숙한 그의 도마질. 그는 밖에 나가 푸르른 나뭇잎 하나 혹은 꽃잎을 얹은 접시를 걸친 멋진 상을 차려낸다. 그는 볼륨버튼을 열한 시 방향으로 하고 음악을 튼다(산골이 쩡쩡 울린다). 우리는 아일랜드 민요나 김추자, 김정미 노래를 들으며 술을 마신다. 안방에서 담배를 피운다고 잔소리를 하는 아내가 없는 방에서 나는 끊임없이 묻고 윽박지른다. 그는 글을 쓰기 위해 바닥을 긁지 않고, 물이 고이기를 오래도록 기다릴 뿐이라고. 초저녁부터 마신 술이 바닥나는 새벽이 되서야 우리는 한 이불에 든다. 그가 늦은 아침상을 차릴 때, 나는 화장실 문을 열고 산 능선을 보면서 똥을 눈다. 이윽고 내가 세상으로 갈 시간, 나는 그를 잠시 껴안고 차에 오른다. 나는 백미러로 그를 본다. 독한 그는 담배를 피워 물 뿐. 사물은 거울보다 더 가까이 있다는데 그는 멀어진다. 사람이 외로우면 뭔 짓을 못하냐고, 궁금한 양반들. 그래서 통하였느냐고? 허허, 서생들 음란하시기는. 나? 제법 지적인 여성들이 게이 친구 하나쯤 있었으면 한다는 것을 <섹스 앤드 더 시티>를 통해 대충 느끼는 정도. 그래서 게이는 지적노동과 관계있을 것이라는 편견도 있었지만 이 영화를 통해 꼭 그것도 아니라는 생각. 동성애를 일반적 시선으로 보는 진보된 시도들이 있지만 아직 나에겐 계산과 측정이 불가능한 영역. 존중해야 할 타인의 취향이란 정도, 불간섭이나 무심함이 내 교양이다. 됐는가? 박남준, 어찌 내가 그의 가장 친한 친구겠냐만 그는 지금 악양에 없다. 북유럽 어딘가를 향해 상선을 타고 있을 그는 인도양 십자수 그늘쯤 지나고 있을까. butgood@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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