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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 | 연재 [상식철학]
2014 희망찾기
김의수 교수(2014-02-05 14:49:15)

희망. 우리는 언제 희망을 생각하는가? 삶이 고달플 때다. 우리에게 더 나은 삶에 대한 갈망이 있을 때다. 그렇다면 희망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나는 지난해 내내 절망에 빠져 허우적댔다. 희망을 기다리기에는 그 거리가 너무도 먼듯했다. 간간이 그 편린을 보기도 하고, 절망 속에서도 의지를 다지기도 했지만, 실제론 희망보다는 절망 속에서 겨우 생존을 유지하는 기분이었다. 20세기에 인류는 전쟁의 참화를 겪으며 실존철학에 의지했다. 우연, 한계상황, 우울, 죽음 등의 개념들이 기조를 이루는 실존주의는 1차 세계대전 후에 생겨났고, 2차 대전 이후에는 전 세계를 풍미했다. 근세 이후 이성과 진보를 말하던 철학이 절망과 생존을 사색하는 철학으로 변한 것이다. 그러다가 파괴된 도시들을 다시 건설하고 시간이 치유해 준 피폐한 마음의 상흔을 잊어야 할 즈음, 철학은 새로운 개념 ‘희망’을 말하기 시작했다.

 

대한민국이 IMF의 지휘 통제 아래에 들어갔던 절망스런 경제위기 상황에서 나는 ‘한국인의 희망철학’이라는 글을 썼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섣부른 희망을 노래한 것이 아니다. 뼈를 깎는 노력으로 진정한 희망의 미래를 개척해야 한다는 호소였다. 더불어 위기 극복을 위한 준비된 지도자 김대중 대통령을 너무 쉽게 넬슨 만델라와 매치시키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남아공의 만델라와 달리 김대중 대통령은 유신 잔당 김종필과 연합해 겨우 정권을 창출했기 때문이다.

지난해 나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두 번 부러웠다. 한번은 전설적인 팝가수 로드리게스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를 감상했을 때이고, 한번은 넬슨 만델라의 장례식 때였다.

 

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의 독재국가와 소수 백인이 다수 흑인을 노예처럼 부리던 시절, 절대 다수 국민들이 해방의 노래로 부르던 ‘로드리게스’의 노래들을 민주화가 실현된 해방의 나라에서 그와 함께 부를 수 있게 된 그들이 너무도 부러웠고, 진심으로 축하해 주게 되었다. 그리고 27년이라는 길고 긴 시간을 감옥에서 보내면서도 민주주의와 인권의 세계적인 정치지도자로 우뚝 솟아 나라를 구해 정착시켜 놓은 만델라가, 천수를 누린 후에 온 국민과 전 세계인의 사랑을 한 몸에 안고 세상을 떠나는 모습이 너무도 부러웠다. 이 모든 부러움은 바로 민주주의를 후퇴시킨 이명박 박근혜 두 대통령 때문이고, 그것은 곧 2013체제를 도둑 당한 채 절망에 빠져 견뎌 온 지난 해 우리의 운명이기도 했다.

 

아직도 절망적인 상황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가능성이 보이기 시작했다. 국정원의 대선 개입에 대하여 대통령의 사과와 국정원 개혁을 요구하는 시민들의 목소리가 고등학생부터 대학교수까지, 시민단체로부터 종교인들까지, 그야말로 각 계 각 층 모든 영역 모든 시민들로 퍼져나갔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계속 묵살하는 대통령, 합법노조 전교조를 하루아침에 법외노조로 밀어내고 철도노조원들을 수백명씩 수천명씩 마구 잘라버리는 대통령이 바로 절망의 근원이었으나 이제 다시 그러한 절망이 희망의 출발지로 위상이 바뀌고 있다.

그의 미련하고 미흡한 버티기 작전과 사악한 덮어씌우기 밀어내기 술책은 시민들의 행동을 꿈틀대게 만들었다. 대통령 “사과” 요구는 대통령 “퇴진” 요구로 진화했다. 정의구현사제단과 함께 모든 종교계가 일어나고, 어느 대학생이 대자보를 붙이니 전국의 대학을 넘어 전 세계로 확산되고 있다. 대통령의 모자람이든 뚝심이든, 고집이든 불통이든 그런 것은 더 이상 의미도 없고 힘도 없다. 민주시민들의 힘은 이미 둑을 넘었고, 나라의 경계를 넘어섰다. “요즘 대학생들은 너무 사회 문제에 둔감합니다. 80년대에는 그들이 사회운동의 중심이었잖아요? 30대 대학 강사의 말이다. “그 때는 그들이 사회운동의 중심이었고, 사무직 노동자들이 마지막에 동참했지만, 지금은 그 위치가 바뀌었지요. 이제 대학생들마저 움직인다면 이 운동은 절정에 이른 것으로 봐야지요.” 나는 이렇게 희망을 노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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