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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5 | [문화칼럼]
폭력의 시대를 청산하는 유쾌한 고집
우윤 전주역사박물관 관장(2003-06-02 11:49:16)
<메트릭스>란 영화가 있었다. 현실세계와 사이버세계의 대비를 통해 진실과 허구를 되짚어보게 하는 영화였다. 눈앞에 보이는 1999년은 메트릭스라는 프로그램으로 입력된 사이버세계이고 실제 현실세계는 2199년, 인공두뇌를 가진 컴퓨터가 지배하고 있다. 인간은 태어나자마자 뇌세포에 메트릭스가 입력되어 1999년을 현실세계인줄 알고 살아간다. 너무나 정교한 사이버세계이기에 관객도 착각에 빠진다. 현실이 완전한 허구인 것이다. 이 사실을 안 '네오'라는 해커가 메트릭스를 유지하려는 요원들과의 싸움에 들어가고 끝내 메트릭스의 경계를 뛰어넘는 순간 영화는 끝나고 만다. 180도 사고전환과 새로운 패러다임, 그리고 진실을 향한 용기. 이 영화가 우리에게 던지는 화두이다. 지난 수세기를 돌아보자. 대전환이 필요할 때마다 우리는 머뭇거리고 무사안일에 안주했다. 치욕스런 식민지 경험, 분단과 한국전쟁, 아직도 피를 흘려야 하는 민주화의 과정, 그리고 한꺼번에 모든 것을 '방' 날릴 수 있는 북핵과 미국의 압박. 머뭇거린 댓가로 치루었거나 치루고 있는 우리의 현실이다. 나는 영화 <포세이돈 어드벤쳐>를 기억한다. 뒤집어진 배 속에서 살 길은 180도 대전환이었던 것을…! 우리는 대전환기의 문턱을 넘어섰다. 그런데도 주변의 일상은 지난 20세기의 낡은 논리와 구태의연한 패러다임이 기승을 부리고 있는 듯싶다. 아니 즐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정치권의 요란한 성명전은 그 단적인 예다. 내 편 아니면 적, 이것 아니면 저것, 흑 아니면 백, 뭔가 경계를 분명히 해야 하고 그것도 상대를 완전히 제압해야만 저으기 안심한다. 적과의 동침은 생각할 수도 없다. 이 분명한 단순논리 앞에 줄을 서지 않으면 이쪽과 저쪽으로부터 '왕따' 당한다. 이솝우화의 박쥐처럼…. 박쥐의 선택이 미덕이 아니라 악덕으로 처단되는 사회에서는 메트릭스의 대전환과 같은 가능성의 문은 기대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박쥐가 왕따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의 이중성보다는 더 근본적으로 맹목적인 투사가 되기를 거부한 양심과 자유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날짐승이거나 뭍짐승이거나 똑같은 논리를 갖고 싸우는 서로의 적일 따름이다. 어느 쪽이 옳고 좋다고 말할 수 있을까. 똑같은 폭력의 패러다임을 갖고 있는데…. 그런데도 우리 사회는 여전히 이 둘 중 하나가 옳다고 선택하게 한다. 그 맹렬한 기세 앞에 누구도 맞서지 못한다. 지금까지는 그것이 어쩔 수 없는 대안일지 모른다. 그러나 독수리 아니면 사자를 선택해야 했던 시대는 폭력의 세기, 즉 20세기를 넘어설 때 두고 가야 할 저편의 잔 재일 뿐이다. 21세기에도 여전히 재활용하겠다는 시도가 있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우리들의 양심과 자유를 담보로 잡겠다는 위험한 도박임이 분명하다. 나는 이러한 편가르기와 흑백논리는 성적순으로 줄 세우기를 강요한 지난날 우리의 교육에 상당한 혐의를 두고 있다. 이쯤에서 '맹모삼천지교'를 떠올린다면 좀 엉뚱한 생각일까? 나는 맹모에게서 더 좋은 학군으로 이사다니고 쪽집게 과외선생을 초빙하는 맹렬 어머니 상을 엿본다. 성적순으로 앞줄에만 서면 좋은 학교에 진학할 수 있고, 괜찮은 직장이 보장되는 사회에서 이를 외면할 부모가 어디 있을까만, 이런 교육은 핑크 플로이드가 '벽(wall)'에서 노래하였듯이 너무나 우리를 우울하게 만든다. 물론 보릿고개를 넘자면 대량생산을 보장할 양질의 노동자를 안정적으로 확보해야 했다. 그 결과 만불 소득시대가 달성되었을지 몰라도 획일적인 인간, 몰개성적인 인간을 대량생산한 후유증도 만만치 않다. 학교 건물을 보자. 직육면체의 무지막지한 형태에다 조금도 인간미를 찾을 수 없는 죽 뻗은 복도, 겨우 마련한 듯한 운동장. 이런 공간 속에서 한 인간이 인생에서 가장 푸르디푸른 시절을 보내야 한다니 참으로 숨이 턱턱 막힐 지경이다. 끝없는 터널이 아니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길고 어두운 학창시절…. 끝내 학생들은 탈출하고 교실파괴가 진행된 우리의 교육현실, 그럼에도 교육개혁은 and기적거리며 답답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 사회가 이렇게 가닥을 잡지 못하면 사람들은 불안해질 수밖에 없고, 불안해질수록 사람들은 더욱 이쪽과 저쪽, 우리와 그들을 나누는 선긋기에 골몰한다고 한다. 어느 학자가 "적이란 무서운 위협이지만 -특히 시대가 사악할 때에는- 그만큼이나 그리운 대상이다."고 갈파한 것은 지극히 불쾌하지만 사실인 것 같다. 그런데 이런 시대에 제 철 만난 듯 더 바빠지는 군상들이 있다면 나는 정치인을 꼽고 싶다. 이들은 본능적으로 선긋기에 타고난 사람들이며, 상대를 짓밟고 말로 자신을 과대포장하는데 탁월한 능력을 지닌 자들이다. 과거의 행보를 보면 전혀 그럴 수 없는 정치인들이 평화의 수호자로 나서고 있고, 최근에 불거지고 있는 '호남소외론'은 대세에서 밀린 자들의 또 다른 선긋기에 지나지 않는다. 이들은 박쥐의 가능성을 말살하고 끊임없이 가상의 적을 만들어 자신의 입지를 강화한다. 사회가 분열되든 말든, 바깥의 적이 노리든 말든 제 밥그릇만 챙기면 그만이다는 식의 논리 앞에 우리 사회는 절망할 수밖에 없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고, 대안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고 과거로의 회귀는 최악의 선택이다. 전통 서당에 아이를 보내 전통 예절을 배우게 하고 한문을 익히게 하는 프로그램이 꽤 인기가 있다고 한다. 여기에 참여하는 부모의 발상에는 이 사회가 혼란한 것은 과거의 미풍양속이 허물어져서 그렇다는 인식이 자리하고 있다. 그래서 유교식 인성교육을 다시 시키겠다는 것인데, 여기에는 또 말썽없는 아이, 순종하는 아이로 키우겠다는 안이한 발상도 끼어들어있다. 변화를 이겨내고 독립할 수 있는 아이를 포기한 부모의 심각한 착각도 이쯤되면 누구도 못 말린다. 변화의 본질을 꿰뚫지 못하고 뒷걸음질만치는 이런 촌극들은 너무도 흔하게 벌어지고 있다. 여기에다 매일같이 쏟아져 들어오는 이라크의 참상,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경제위기, 그리고 저 성층권 너머에서 주고받는 북핵을 둘러싼 다자간 협상 등등은 우리의 머리를 혼란에 빠트리고도 남는다. 나의 선택이 배제된 이 압도적인 '힘' 앞에 도대체 누가 21세기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생존의 위협 앞에 인간은 얼마나 강할 수 있을까. 나는 이럴 때마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님은 갔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하며 조국의 어두운 하늘을 부둥켜안고 절규하면서도 애써 희망을 노래한 한용운의 '님의 침묵'을 떠올린다. 그러다 좀더 여유가 있으면 "남자가 어찌 땅을 보며 세수를 하느냐."며 평생 고개를 쳐들고 세수했다는 신채호의 유쾌한 고집을 떠올린다. 과거의 낡은 틀을 '탈탈(脫脫)' 털어 버리고 새로운 사고와 패러다임으로 거듭날 때는 포기하지 않는 희망과 스스로 지킬 수 있는 고집 하나쯤은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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