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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9 | 칼럼·시평 [서평]
고난의 시대에 피어난 흰 소의 화가
최석태의 <이중섭 평전>
구혜경 백제예술대 강사·서신갤러리 큐레이터(2003-07-03 10:51:35)
우리에게 '이중섭'이라는 작가는 너무도 잘 알려져 있다. 학창시절 미술시간에 보았던 그림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열명 중 여덟, 아홉 명은 이중섭의 소 그림을 떠올릴 것이다. 그 정도로 우리에게 인상깊다. 언제나 봐왔던 단 하나의 '흰 소' 그림이 너무도 많은 국민의 정서 속에 새겨져 있어 설명이 필요없이 우리의 근대 미술을 대표한다. 그래서 학교의 과제물이나 기타 여러 학회의 논문 주제로도 자주 등장해 우리의 눈과 귀를 계속 자극해 왔다. 왜 이중섭은 아직도 우리에게 영웅적인 민중의 화가일까. 여기에 대해서는 아직도 많은 연구와 논문 발표가 이어지고 있다. 우리는 새롭게 나온 또 하나의 연구 결과를 접할 수 있는데 최석태씨의 『이중섭 평전』이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이 시대의 사람이 이중섭을 평가한다는 것 자체가 어쩌면 무리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이러한 연구가 계속 이뤄지고 있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지금까지 우리는 이중섭의 회화세계를 단편적으로 소 그림에만 국한시켜 중점적으로 연구해 왔다. 사실 그도 그럴 것이 이중섭의 작품을 수록한 화집이나 자료가 미비하여 신화적인 존재이기는 하지만 보여줄 것이 없는 실정이다. 저자도 이 책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선진 각 국을 비롯한 많은 국가들은 자국이 낳은 훌륭한 미술가나 자기 문화와 관계가 깊은 외국인 미술가의 독립된 미술관을 따로 설립하거나, 그것이 여의치 않을 경우 별실이나 자료관을 두어 그 작가의 대표작과 중요 작품을 골고루 볼 수 있게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 그러한 배려가 전혀 없다. 이중섭의 작품들도 뿔뿔이 흩어져 있어 특별한 계기를 맞기 전에는 그 전모를 맛보기 힘들다. 이중섭의 그림은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조차 단 세 점만 소장되어 있고 사립인 용인 호암미술관에는 대표작에 해당하는 그림이 전시되고 있지만 아쉬움을 달래기에는 충분하지가 않다. 이러한 상황은 우리 미술에 대한 관심이나 정책, 행정의 실태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관중들의 이중섭에 대한 호응에 비해 미술전문가들이 보여주는 것은 너무도 부족하다. 말로는 신화니 영웅이니 하면서 실제로 우리가 본 것들은 항상 보아왔던 미리 짐작할 수 있는 그런 그림들이었다. 이에 저자는 이중섭 개인에 대한 정보는 물론, 그 시대와 사람들에 대한 수많은 자료와 생생한 증언을 토대로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았던 이중섭의 생애에 대한 여러 편린을 모아 복원시켰고, 작품이 낳은 시대적 상황과 개인적인 삶의 굴곡을 기본 바탕으로 전개시키고 있다. 우리는 이 책에서 이중섭의 새로운 작품세계와 성장과정의 여러 일화를 접할 수 있다. 

이중섭의 생애에 대한 고찰은 여러 사람들에 의해 많이 진행되어 왔는데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중등학교 시절부터 높은 수준의 미술교육을 받아서 일찍부터 자기의 기량을 다져 나갔다. 이러한 교육과정과 중등학교 시절 만난 도화교사 임용련은 그의 작업세계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지금까지는 소홀하게 다뤄진 부분이었지만 저자는 이 부분을 주변사람들의 증언과 자료조사를 통해 부각시키고 이중섭의 작품세계의 밑바탕으로 보았다. 또한 이 책에서는 이중섭을 바로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연결고리인 엽서 그림들에 많은 투자를 하고 있다. 젊은 시절 애인에게 보냈던 1백여장에 이르는 엽서는 지금까지 통상적인 연애편지 취급을 받아왔지만 이 그림들은 이중섭의 열정을 보여 주는 한편, 그가 어떤 습작 과정을 거쳐 거장이라고 부를 수 있는 실력을 지니게 되었는지를 충분히 느낄 수 있게 해주는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이 책에서는 엽서 그림들을 시기 순으로 배열하여 구성하기를 최초로 시도함으로써 이중섭의 그림이 어떠한 과정을 밟아 진행해 나아가는지를 확연하게 이해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고 있다. 책을 읽는 사람들이 이중섭의 작품세계를 쉽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시기 순으로 정리하는 수고를 감당하고 있다.

또한 이중섭은 암흑기인 식민지시대 말기에 민족미술단체인 '조선신미술가협회'를 결성하여 민족미술의 선구자적 역할을 담당하고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재료는 서구의 것을 사용하면서도 표현기법을 충분히 자기화 해냄으로써 민족적 품격이 가득하고 우리 고유의 미감이 풍부한 그림을 남길 수 있었다. 그리고 고구려 벽화나 고려청자의 무늬, 조선의 분청사기, 김정희의 서예 등 여러 종류의 민족문화유산에서 유래되는 기법을 구사하여 수준 높고 민족 색이 풍부한 화면을 만들어 냈다. 한가지 더 얘기하자면 문화예술의 창작과 비평에서 가장 중요한 화두인 '온고지신(溫故知新)' '법고창신(法古創新)'같은 덕목을 이중섭은 앞선 시기에 이미 일정부분 탁월하게 이루어 내고 있었다. 이런 점 때문에 그가 '국민화가' '민족화가'라는 칭송을 미루어 짐작해 본다. 

저자는 이중섭을 평가하는데 있어서 여러가지 관점을 세웠다. 첫째는 일제 강점기에 한글로 서명한 자주적인 태도와 전통예술에 대한 새로운 표현을 수립했다는 점, 둘째는 서예문화를 계승하고자 우리 민족문화의 여러 갈래의 특징적 요소를 자기화 했다는 점, 셋째는 기법뿐 아니라 소재에서도 깊은 탐구를 했다는 점, 넷째는 억압과 자유를 거쳐 격동의 시대, 혼돈의 사회를 살다간 화가이며 이런 격동과 혼돈을 누구보다도 생생하게 표현하는데 성공한 화가라는 점 등 이러한 관점으로 이중섭을 파악했다. 그러나 창작과 이론분야를 막론하고 아직까지도 우리 미술계는 이중섭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어 연구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안고 있는 실정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지금까지 연구되어진 많은 논문들에서 다루어져 왔던 내용들을 새롭게 정리하고 나름대로 소홀해진 부분을 더 보강하고 부각시켜 이중섭의 인간적인 면과 작품세계를 동시에 잘 보여주고 있다. 새롭게 선보인 많은 습작과 드로잉 작품들은 그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뜨리기에 충분하다. 우리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오는 『이중섭 평전』은 우리나라 근대 미술의 신화적인 존재로 인식된 이중섭에 대한 중요한 자료로 남게 될 것이다. 이 또한 한 시대의 거대한 작가를 제대로 알아 가는 기회를 마련하고, 이러한 저서를 통해 미술사학에 새로운 자극과 계기가 되어 더 많은 연구가 계속되어지길 바란다. 

E-mail:art-history@hanmail.net

구혜경/1971년 전주에서 출생했다. 원광대 한국화과를 졸업하고 숙명여대에서 미술사학과 석사 학위를 받았다. 평론과 강의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현재 백제예술대 강사로 출강하며 서신갤러리 큐레이터를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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