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9 | 칼럼·시평 [서평]
욕망의 도도한 행렬에 대한 반성
복효근의 <새에 대한 반성문>
장창영 전북대 국문과 강사(2003-07-03 10:52:49)
지리산 자락에 얹혀 사는 복효근 시인이 {새에 대한 반성문}이라는 세 번째 시집을 냈다. 늦더위에 짓눌려 소나기같은 시 한 편이 몹시도 그리웠던지라 이번 소식이 무척이나 달게 느껴졌다. 첫시집 {당신이 슬플 때 나는 사랑한다}(1993)와 두 번째 시집 {버마제비 사랑}(1996)을 접하면서 지리산을 훑고 내려온 계곡물의 시원함과 들꽃 내음의 은은함을 어렴풋하게나마 맛보았던 기억이 새로웠기 때문이다.
모처럼만에 만나는 이번 시집의 제목은 이채롭다. 새에 대한 '반성문'이라니, 더군다나 그 주인공이 오랫동안 식물에 기반을 둔 상상력을 펼치는 데 익숙했던 시인이기에 더욱 낯설다. 성급한 이라면 벌써 이 시집 제목으로부터 환경이나 사냥과 같은 창백하고 도식적인 단어들을 툭툭 건드려보았을 것이다. 하기야 누구라도 새에 대한 기억 하나쯤은 간직하고 있지 않겠는가. 그것이 참새이거나 비둘기, 그도 아니면 이름 모를 들새이건간에, 복효근 시인의 시에 남다른 울림을 주는 것은 자기 반성의 목소리이다. 그리고 그 한 축을 더듬어 가다 보면 사랑과 그리움으로 점철된 시인의 맨얼굴을 만날 수 있다. {당신이 슬플 때 나는 사랑한다} {버마제비 사랑} 등의 시편들이 그랬듯이, 이번에 나온 세 번째 시집 {새에 대한 반성문}에서도 그는 '사랑'과 '그리움'에 많은 빚을 지고 있다. 하지만 어쩌랴. 그것들이 시인을 잉태하게 한 씨줄이었고, 그의 시를 지탱해 준 날줄이었음을.
이번 시집 한귀퉁이에 잠시 눈길을 다독여 보자. 시인은 빙어를 먹으며, "사랑마저도 스스로를 위해서만 해온/나는/살 떨리게 두려"(「빙어회를 먹으며」)워 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광어에게 "너의 살을 먹으며 왜 내가 아프냐"(「광어에게」)며 반문하고, 심지어 어머니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 역시 두려움과 자성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시인의 고뇌는 빙어와 광어를 먹으면서도 그 맛을 음미하기도 전에 자신을 관통하는 죄의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데 있다. 싱싱한 살의 움직임을 밋밋한 죽음으로 이끌어내는 이 잔혹한 의식 앞을 끊임없이 서성이면서 식욕에 충실할 수 없다는 것은 그의 말처럼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저주"가 아니던가. 이러한 자성은 나이 사십의 시인에게 "새벽 콩나물국밥집에서 풋눈을 맞던 기억으로/다시 울 수 있을까 다시 그 설레임으로/심장은 뛸 수 있을까"(「눈 오는 날 콩나물국밥집에서」)와 같은 미래에 대한 소담스런 조망으로 투영된다.
그동안 시인의 시에 애정을 표해온 이라면 간파했겠지만, 새에 대한 시인의 관심은 연원이 제법 오래다. 첫시집에서 "새가 되고 싶었"(「저울 위에서」)다고 자신을 술회하던 시인의 시선은 '새를 위한 변주곡'이라는 부제하에 13편의 연작시에게 두 번째 시집의 한 영역을 송두리째 비워주고 있다. 이 연작시에 등장하는 새들은 다쳐있거나 슬프고 때로 힘겨운 모습으로 독자들의 눈물샘을 자극한다. 연작시에서 나타나듯이 새들에 대한 각별한 관심과 애정은 삶과 현실을 진솔하게 껴안으려는 시인의 눈물겨운 노력에서 비롯된다. 그렇기에 새는 시인으로 하여금 "새 소리로 하여/산 하나가 온통/사랑인줄 처음 알"(「새 울어 비로소」)게 만드는 자양분이기도 하다. 어쩌면 이러한 깨달음은 지리산 자락에서 시심(詩心)과 심안(心眼)을 키워온 시인이기에 가능한 것인지 모른다.
시인은 운암호를 나는 청둥오리떼를 보며 현실 속에 안주하는 데 익숙해져 있는 자신을 직시한다. 거기에서 시인이 만나는 것은 세파 속에 몸을 섞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다.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현실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점령하고 있는 욕망의 실체를 아프게 껴안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현실에의 욕망을 거두고 시인으로 참되게 살아가기 위해 자성의 칼날을 갈아야 한다는 사실이 버거워보인다. 하지만 시인은 "더 추워야겠다 나는/한껏 가난해져야겠다"(「새에 대한 반성문」)라고 자신을 혹독하게 몰아세우며 삶과 타협하려는 나약한 자신에게 빗장을 지른다.
이 과정에서 시인은 좀체로 쉬이 잠들지 않는 욕망에게 "애욕이여/옛다"(「무주상보시」)하며 자신을 보시하기도 하고 "정상위와 후배위와…… 이 여자/저 여자 두루 꿈꾸어"(「아귀는 나를 아귀라 부른다」)보기도 한다. 욕망으로부터 발원한 기나긴 여정은 시인으로 하여금 자신을 보배가 아닌 "잘익은 상처 하나"(「상처의 집」)로 만들고픈 소박한 꿈에 이르러 절정에 달한다. 마침내 시인은 위층집의 배수관을 타고 "쏟아지는 오물" 소리로부터 "아, 이 청량한 소리 세례"(「소리세례」)라는 범박치 않은 진리를 읽어내기도 한다. 자신을 휘감아도는 욕망의 도도한 행렬 앞에서 시인은 사랑과 관용의 힘으로 자신의 치부를 '진신사리'로 만듦으로써 오랜 장정의 종지부를 찍고자 하는 것이다.
나는 믿는다. 낡고 지친 날개로 시인에게 반성문을 쓰게 만들었던 새가 언제가 시인의 가슴 한켠에 튼실한 둥지를 내리고 힘찬 날개짓으로 화려하게 비상하리라는 것을, 그리고 그 때쯤이면 우리도 오랫동안 접어두었던 꿈을 이루게 되리라는 것을, 그것이 가슴 속에 품고 지내던 눈물겨운 첫사랑을 다시 만나는 일이건, 아니면 전라선 통일호 타고 중강진 어디메까지 한달음에 도달하는 일이건간에.
E-mail:jusine@dreamwiz.net
장창영/1967년 전주 출생. 전북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박사과정(현대문학)을 수료했다. 현재 전북대 국문과 강사로 출강하고 있으며 얼마전 전북 작가회의 『작가의 눈』시부문 신인상에 당선됐다.
모처럼만에 만나는 이번 시집의 제목은 이채롭다. 새에 대한 '반성문'이라니, 더군다나 그 주인공이 오랫동안 식물에 기반을 둔 상상력을 펼치는 데 익숙했던 시인이기에 더욱 낯설다. 성급한 이라면 벌써 이 시집 제목으로부터 환경이나 사냥과 같은 창백하고 도식적인 단어들을 툭툭 건드려보았을 것이다. 하기야 누구라도 새에 대한 기억 하나쯤은 간직하고 있지 않겠는가. 그것이 참새이거나 비둘기, 그도 아니면 이름 모를 들새이건간에, 복효근 시인의 시에 남다른 울림을 주는 것은 자기 반성의 목소리이다. 그리고 그 한 축을 더듬어 가다 보면 사랑과 그리움으로 점철된 시인의 맨얼굴을 만날 수 있다. {당신이 슬플 때 나는 사랑한다} {버마제비 사랑} 등의 시편들이 그랬듯이, 이번에 나온 세 번째 시집 {새에 대한 반성문}에서도 그는 '사랑'과 '그리움'에 많은 빚을 지고 있다. 하지만 어쩌랴. 그것들이 시인을 잉태하게 한 씨줄이었고, 그의 시를 지탱해 준 날줄이었음을.
이번 시집 한귀퉁이에 잠시 눈길을 다독여 보자. 시인은 빙어를 먹으며, "사랑마저도 스스로를 위해서만 해온/나는/살 떨리게 두려"(「빙어회를 먹으며」)워 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광어에게 "너의 살을 먹으며 왜 내가 아프냐"(「광어에게」)며 반문하고, 심지어 어머니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 역시 두려움과 자성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시인의 고뇌는 빙어와 광어를 먹으면서도 그 맛을 음미하기도 전에 자신을 관통하는 죄의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데 있다. 싱싱한 살의 움직임을 밋밋한 죽음으로 이끌어내는 이 잔혹한 의식 앞을 끊임없이 서성이면서 식욕에 충실할 수 없다는 것은 그의 말처럼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저주"가 아니던가. 이러한 자성은 나이 사십의 시인에게 "새벽 콩나물국밥집에서 풋눈을 맞던 기억으로/다시 울 수 있을까 다시 그 설레임으로/심장은 뛸 수 있을까"(「눈 오는 날 콩나물국밥집에서」)와 같은 미래에 대한 소담스런 조망으로 투영된다.
그동안 시인의 시에 애정을 표해온 이라면 간파했겠지만, 새에 대한 시인의 관심은 연원이 제법 오래다. 첫시집에서 "새가 되고 싶었"(「저울 위에서」)다고 자신을 술회하던 시인의 시선은 '새를 위한 변주곡'이라는 부제하에 13편의 연작시에게 두 번째 시집의 한 영역을 송두리째 비워주고 있다. 이 연작시에 등장하는 새들은 다쳐있거나 슬프고 때로 힘겨운 모습으로 독자들의 눈물샘을 자극한다. 연작시에서 나타나듯이 새들에 대한 각별한 관심과 애정은 삶과 현실을 진솔하게 껴안으려는 시인의 눈물겨운 노력에서 비롯된다. 그렇기에 새는 시인으로 하여금 "새 소리로 하여/산 하나가 온통/사랑인줄 처음 알"(「새 울어 비로소」)게 만드는 자양분이기도 하다. 어쩌면 이러한 깨달음은 지리산 자락에서 시심(詩心)과 심안(心眼)을 키워온 시인이기에 가능한 것인지 모른다.
시인은 운암호를 나는 청둥오리떼를 보며 현실 속에 안주하는 데 익숙해져 있는 자신을 직시한다. 거기에서 시인이 만나는 것은 세파 속에 몸을 섞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다.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현실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점령하고 있는 욕망의 실체를 아프게 껴안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현실에의 욕망을 거두고 시인으로 참되게 살아가기 위해 자성의 칼날을 갈아야 한다는 사실이 버거워보인다. 하지만 시인은 "더 추워야겠다 나는/한껏 가난해져야겠다"(「새에 대한 반성문」)라고 자신을 혹독하게 몰아세우며 삶과 타협하려는 나약한 자신에게 빗장을 지른다.
이 과정에서 시인은 좀체로 쉬이 잠들지 않는 욕망에게 "애욕이여/옛다"(「무주상보시」)하며 자신을 보시하기도 하고 "정상위와 후배위와…… 이 여자/저 여자 두루 꿈꾸어"(「아귀는 나를 아귀라 부른다」)보기도 한다. 욕망으로부터 발원한 기나긴 여정은 시인으로 하여금 자신을 보배가 아닌 "잘익은 상처 하나"(「상처의 집」)로 만들고픈 소박한 꿈에 이르러 절정에 달한다. 마침내 시인은 위층집의 배수관을 타고 "쏟아지는 오물" 소리로부터 "아, 이 청량한 소리 세례"(「소리세례」)라는 범박치 않은 진리를 읽어내기도 한다. 자신을 휘감아도는 욕망의 도도한 행렬 앞에서 시인은 사랑과 관용의 힘으로 자신의 치부를 '진신사리'로 만듦으로써 오랜 장정의 종지부를 찍고자 하는 것이다.
나는 믿는다. 낡고 지친 날개로 시인에게 반성문을 쓰게 만들었던 새가 언제가 시인의 가슴 한켠에 튼실한 둥지를 내리고 힘찬 날개짓으로 화려하게 비상하리라는 것을, 그리고 그 때쯤이면 우리도 오랫동안 접어두었던 꿈을 이루게 되리라는 것을, 그것이 가슴 속에 품고 지내던 눈물겨운 첫사랑을 다시 만나는 일이건, 아니면 전라선 통일호 타고 중강진 어디메까지 한달음에 도달하는 일이건간에.
E-mail:jusine@dreamwiz.net
장창영/1967년 전주 출생. 전북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박사과정(현대문학)을 수료했다. 현재 전북대 국문과 강사로 출강하고 있으며 얼마전 전북 작가회의 『작가의 눈』시부문 신인상에 당선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