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만화방에서 우연히 집어든 두꺼운 그림 일기책을 그 자리에서 단숨에 읽어버렸다. 문득 우리 아버지의 이야기가 듣고 싶어졌다.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작가상 2013’ 후보이자 전주 우진문화공간 올해 청년작가로 선정된 조해준(41)의
전시를 보고 난 느낌이었다. 2002년부터 아버지와 함께 드로잉 연작을 발표하고 있는 그가 십년 만에
고향에 들고 온 이야기는 수집 이상의 것이었다. 이번 전시는 조해준의 그간 작품을 집대성한 전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03년부터 지난해까지 작업한 설치, 드로잉, 조각 등 다양한 작품을 전시한 이번 초대전은 고향에서 여는 십여년 만의 전시라 더 뜻깊다. 많은 작품 중에서도 아버지와 함께 작업해온 드로잉 연작이 눈길을 끌었다.
작가 조해준과 그의 아버지 조동환씨의 공동작업은
2002년부터 거슬러 올라간다. 서울에 살던 그는 고향 전주에 계신 아버지에게 묻고 또
물었다. 그의 구구절절한 사연은 들을 때마다 놀라웠다. 아들은
이런 개인사와 가족사를 글과 그림이 있는 다큐멘터리 드로잉으로 만들어 보자 권했다. 그후 아버지 조동환씨는
옛 기억을 더듬어 종이에 연필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 여기까지 왔다. 처음 아버지가 그린 그림은 1941년 할아버지가 징용되는 이른 새벽의 장면이었다. 방안에서 할아버지가
아들들의 머리를 만지면서 ‘잘 있어라. 나중에 너희를 일본으로 꼭 불러들이마’하는 것이었다. 아버지의 드로잉을 볼 때마다 놀라웠던 그는 어떻게 한 사람의 삶이 이렇게 굴곡질 수 있을까 싶었다. 그래서일까. 아버지 조동환씨의 그림에는 꼬장한 어르신의 진부한 교훈
대신 살아 꿈틀거리는 촌철살인 같은 이야기가 많다.
조해준은 이처럼 자신이 계획하고 아버지가 그린 드로잉 연작으로 우리네 과거를 친절히
설명해주기도 하지만, 전시장의 대형 유화 작품 한점으로 할 말을 압축해버리기도 한다. 그것이 바로 아버지의 국선 낙선작 ‘정읍에서 본 풍경’이다. 아버지
조동환씨는 이 작품의 액자 여백에 종이를 덧대 이렇게 썼다. “막내아들 해준아, 이 그림을 층계창고에서 찾아 먼지를 털고 여백을 만들어 이 글을 쓴다. 이
그림은 1960년대 초에 그려 국전에 출품하여 낙선한 작품이다. 네가
있어 아버지는 노년에나마 빛을 보게 되어 기쁘다.” 집 창고에 방치 돼 있던 이 그림을 아들 조해준이
굳이 전시장으로 옮겨온 이유는 아버지에게 과거를 되돌려주고 싶어서가 아니었을까.
그간 아버지에게 이야기를 끄집어내게 하고 그림 그리기를 종용했던 그가 자신의 이야기를 끄집어낸 그린 사연은 무엇일까. 그가 아버지와 작업하기 전 아버지 인생을 몰랐듯, 초중고교 시절
그가 무슨 생각과 행동을 하며 보냈는지 몰랐다는 아버지는 말한다. “나는 네가 무슨 생각과 행동을 하며
보냈는지 궁금하다.” 이 전시를 보는 내내 처음부터 끝까지 궁금했던 건 어떻게 이렇게 상세하게 기억하고
그림으로 다시 그려 내는가였다. 아무래도 부전자전이 아닐까. 말
나온 김에 조해준이 그 이야기를 코멘터리 드로잉으로 풀어내기로 하고 2009년부터 2년에 걸쳐 작업에 들어갔다. 그래서 나온 작업이 코멘타리 연작 ‘어깃장난
아들 - 1979년부터 1990년까지’다. 이 작품은 드로잉 밑에 주석처럼 간단한 코멘트를 단 것으로, 조해준이
대학 입학 전까지 자신의 기억을 재구성해 그림과 글로 녹여내고 아버지 조동환씨가 육필로 ‘코멘트’를 단 연작이다.
투박한 그림체지만 글보다 더 구체적이고, 군더더기가 없는 문장은 쉽게 잘 읽힌다. 이 작품은 개인의 소소한 이야기가 한 소읍의 풍경이 되고, 그 풍경이
곧 시절의 한 단면으로 기억되고 있음을 알려준다. 무엇보다 캔버스 안에 옮긴 부자의 댓글놀이가 즐겁다.
“엄마는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해준이
공부 안하냐?!”라는 말을 자주 하곤 했다. 나는 그럴 때마다
이 이는 이, 이 이는 사, 이 삼은 육… 이런 식으로 그
때만 공부하는 척 하곤 했다. 하루는 공부하라는 말씀을 하시길래 내 방 책상과 의자에 옷과 종이박스, 베개, 수건을 이용해 ‘공부하는 나’를 만들어 놓고 밖에 놀러 나간
적이 있었다.“ 하고 과거의 아들이 말하면, ”나는 오늘에야
나를 속인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어릴 때 행위라 이해가 가며 재미있다.“ 하고 아버지가 답한다.
“아버지가 그려낸 우리 부모 세대와 조상들의 이야기가 그들의 삶을 대변한다고 생각해요. 내 아버지, 어머니가 걸어온 세월 속에서 경험하고 보고 들은 것은
내가 아버지와 대화하기 이전에는 알 수 없는 것들이었어요. 아버지의 삶에 대해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우리 부모 세대와 조상들의 삶에 대한 경외입니다.”
조해준은 지나온 전시를 통해 아버지의 삶과 가족사에 대한 기억을 함께 되살리면서, 한국 사회의 가파른 현실과 체계를 이야기의 힘으로 재조명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개인사가 결국 우리네 역사의 한 줄기라는 사실을 넌지시 던져주면서 아버지와 자신이 어떻게
성공적으로 소통했는가 힌트를 알려준다. 아버지의 삶을 엿듣는 일은 시대의 일대를 통째로 훔쳐보는 일이었고, 아버지의 개인사는 가장 진솔한 시대의 자화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