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6 | [서평]
적막과 죽음에 관한 보고서
『섬, 나는 세상끝을 산다』(한창훈, 창작과비평사, 2003)
송준호 우석대 교수 국문과(2003-07-04 15:46:32)
소설은 자아와 세계의 대립을 드러내는 서사양식이다. 실제로 소설은 그 대립이 심각한 양상을 띠고 전개되던 시대의 산물이다. 그러므로 자아와 세계의 대립은 허구적 서사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들은 현실 대응력을 견지하는 가운데 외부세계를 객관적인 방식으로 드러냄으로써 소설의 현실비판 기능을 수행해 왔던 것이다.
'리얼리즘이 부재하는 시대'라들 한다. 이는 물론 소설의 현실대응력 약화를 빗댄 말이다. 과거와 같은 지배이념 혹은 거대담론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이제는 시대가치나 현실가치가 특정 이념을 중심으로 단일화되기 어렵게 됐다. 작가들 입장에서는 현실문제에 접근하는 통로를 차단당한 셈이다. 그래서 작가들은 사회와 역사에 애써 무관심한 척하거나 자기 세계 속으로 매몰되는 경향을 보인다.
그리하여 오늘날의 많은 소설은 본래의 서사성을 버리는 대신 이미지 중심의 서정적 내면세계로 문체와 구조를 옮겨가고 있다. 사회적 존재성은 현저히 떨어지는 대신 나르시시즘에 빠진 작중인물을 우리는 요즘 소설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서정적 인물과 서사적 인물의 경계도 모호해졌다. 그것은 곧 장르가 따로 존재하지 않는 시대의 시작을 의미한다. 시적 감성이 두드러지는 소설, 서사적 성격을 띤 시, 수필체의 소설이 그런 예일 것이다. 그리고 이는 전통적인 서사 문법의 파괴로 이어지고 있다.
이런 시대적 배경에서 이야기꾼이 부재하다 보니 소설의 현실대응력은 현저히 약화되고, 그 자리를 인간 내면의 서정적 성찰이 대신한다. 이는 곧 소설이 현실과 유리된 환상이나 꿈, 혹은 자연과 무위의 세계를 추구하게 되었다는 말인데, 한창훈의 소설 『섬-나는 세상끝을 산다』도 거기에 해당된다.
『섬-나는 세상 끝을 산다』는 섬에서 유년기를 보낸, 작가의 분신으로 보이는 작중화자 '나'가 넓은 세상을 찾아 뭍으로 나가지만 떠돌이 밑바닥 인생을 면치 못하다가 중년 초입에 들어서 '외따로 뚝 떨어져, 끝간 데 없는 바다만 보이는' 외로운 섬에 '스스로를 유폐시켜놓고 한세상 보내보려고' 찾아든 한 사내의 일상과 시간을 넘나드는 사유를 담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한 사내의 이야기라기보다는 작중화자 '나'의 눈에 비친 자연, 혹은 자연으로서의 사물과 '나'가 동화(同化)되어 가는 과정을 서술한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각각 독립된 제목을 달고 12개의 장으로 이루어진 이 소설은 일종의 옴니버스 형식을 취하고 있다. 각각의 장을 연결하는 모티프는 물론 자연과 적막과 죽음이다. 그 중에서도 죽음은 이 소설의 핵심 모티프로 자리매겨진다.
이 소설의 작중화자인 '나'의 눈에 비친 모든 사람과 사물은 모두 자연과 동화되거나 그곳으로 돌아간다. 그런데 인간이 자연과 완전히 동화될 수 있는 길은 죽음을 통해서만 열려 있다. '등대섬 벼랑 아래에서 그물을 걷어올릴 때' 먼 발치로 '나'가 처음 보았던 여자는 하나의 자연 풍경으로 내게 다가오고, '나'의 일상 역시 그 여자의 '풍경'으로 존재한다. 그 여자가 섬까지 찾아든 것은 추억을 반추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과거와의 단절 혹은 과거의 시간을 죽이기 위해서이다. 어릴 적에 '나'와 이웃해 살았던 수(琇)라는 여인 역시 자연과 동화된 인물이다. '나'가 늘 일체감을 갖고 지켜보았던 흰무늬 고양이도 검둥이와의 싸움 끝에 죽고 마는데, '나'는 흰무늬 고양이의 주검을 보면서 '내 거처 옆 햇볕 잘 드는 곳에 묻어줄까 궁리'를 하지만 '야생은 끝까지 야생으로 남아야 할 것 같아' 그만둔다. 목이버섯을 따러갔다가 죽은 '낡고 늙어버린 두 할매' 역시 '나'에게는 '바닷속 아름다운 세계로' 돌아간 것으로 인식될 뿐이다. 그것은 곧 죽음을 통한 새로운 삶의 재생을 상징하는데, 이는 '나'의 어린시절 한 섬에 살았던 이웃집 누나 '소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소녀는 어느날 바다에 잠긴 채 죽음을 맞이함으로써 불구의 삶으로부터 벗어나 스스로 재생을 이룬다. 남편을 버리고 뭍으로 도망쳤다가 돌아온 여인은 남편의 강요로 바닷속에 잠겨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하지만, 남편의 손에 이끌려 함께 섬으로 다시 돌아옴으로써 죽음과 재생을 반복하는 상징적인 제의를 치른다. '단(壇) 쌓는 노인'도 스스로 죽어 누울 자리를 만듦으로써 '죽는다는 것이 밥이나 술묵댓기 아무렇지도' 않은 일로 받아들이고자 한다. 그리고 작품의 마지막 장에서 '나'는 살고있는 곳의 번지수도 없이 그 여자에 의해 '등대섬과 바다가 바라보이는 고개 너머에서 혼자 사시는 분'으로 바다와 안개처럼 하나의 자연물이 되어 새롭게 재생한다. 여자에게서 받은 편지는 표면상 '나'와 외부 세계를 연결하는 끈으로 보이지만, 역설적으로 '나'가 이제는 외부세계와 완전히 차단된 채 자연 속에 동화되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죽음 앞에 온갖 세상사는 무화(無化)된다. 더구나 생명의 죽음은 자연과 온전히 하나가 되는 것으로서 신화적으로 보면 새로운 탄생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자연은 그 자체가 하나의 죽음이고 생명이다. '나'가 섬으로 들어간 것은 세상살이에서 벗어나 자기 성찰을 통해 스스로를 자연 속에 유폐시켜 자연과 하나가 되기 위해서였다. '나'가 섬을 선택한 것도 그곳이 생명의 근원인 바다로 둘러싸여 외부와 완벽히 차단되어 있기 때문이다.
『섬…』에서 작가는 작중화자 '나'의 뒤에 숨어 있다. 그런데도 '나'는 사건의 전면에 드러나는 법이 없다. 설령 그렇게 보이는 대목에서도 관찰자로서의 자리를 벗어나지 않는다. 뭍으로 나갔다가 돌아온 아내에게 남편이 죽음을 강요하는 장면을 '나'는 마치 그 언저리의 나무나 풀 혹은 안개인 양 그저 바라만 볼뿐이다. '나가 서술의 전면에 드러나는 것은 자연과 동화되는 순간뿐이다. 마파람에서 바다와 교미하는 '나'는 더이상 자연과 동떨어져서 그것을 관조하는 인간이 아니라 "빗물로 목을 축이고 안개로 품격을 높이는 바위와 나무와 풀 같은 것이" 되는 자연물의 일부가 되기를 자처한다. 또한 "나는 자꾸 바닷속으로 들어갔고 종내는 성기를 바다의 질에 꽂고 낮게 흐느끼기 시작했다."고 하여 인간과 자연이 합일의 경지에 이르는 세계로 다음과 같이 우리를 끌어간다.
'이제 나와 바다와 비의 경계는 허물어졌다. 빗방울은 바다에 떨어져도 좋고 목덜미를 타고 나에게도 우주가 있었다는 흔적, 배꼽까지 흘러내려가도 좋게 되었다. 차가운 기운이 서늘하게 가슴을 타고 내렸다. 몸으로 견뎌내보려고만 한다면, 작은 물알갱이 하나도 바다와 같은 무게를 지니게 될 것이다. 바람을 타는 돛배처럼 믿고 맡겨버려야 된다.'
'나는 거듭 한 척의 배가 되어 망망대해의 안개 속을 떠다녔다.'고 하여 자연과 합일되어 우주의 끝까지 뻗어가는 작중화자 '나'의 의식은 독자를 존재와 생명의 근원에 대한 신화적 상상의 세계로 이끌어간다. 이러한 '나'의 의식과 사유를 통해 인도된 신화적 상상의 세계에서 인간과 자연, 이성과 환상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인간을 포함한 삼라만상이 하나가 되는 것을 궁극적 지향점으로 설정하고 있는 것이 이 소설 『섬-나는 세상 끝을 산다』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이 소설의 작중화자 '나'에 대한 의문 혹은 불만은 가시지 않는다. 풍부한 감수성 혹은 과잉의 감상은 "자연과 인간의 진정한 관계에 대한 밀도 있는 성찰"을 가능하게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를 통해서 인간 존재의 근원을 생각하게 할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도 현실성이 담보된 바탕 위에서 가능하다는 이유에서이다. 그러므로 현실대응력을 포기한 채(더 정확히는 거기에 실패하고) 납득할 만한 까닭없이 스스로를 자연 속에 유폐시킨 채 허공을 떠다니는 안개같은 이 소설 속의 자아에 대한 동의는 유보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