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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 |
임안자의‘내가 만난 한국영화’
관리자(2010-01-05 17:44:35)
우연히 닿은 인연이 내 삶의 방향을 바꾸었다 - 임안자 영화평론가 독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스위스 바젤에서 살고 있는 영화평론가 임안자입니다. 혹시 독자님 가운데 과거 영화전문지 영화예술, 영화 또는 씨네21을통하여 제 글을 읽으신 적이 있거나, 아니면 부산영화제나 전주영화제의 극장가에서 알게 모르게 서로 마주친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이제 문화저널에서 새로이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앞으로 지면을 통하여 독자님들과 자주 이야기를 나눴으면 하는 마음으로 이 자리를 빌려 경인년의 새해 인사를 드립니다.저는 1989년 우연한 기회로 한국영화계와 인연을 맺으면서 전문지에글을 쓰고 여러 국제영화제를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1996년 부산영화제가 생기면서부터 2003년까지 영화제의 고문으로 있다가 2004년전주영화제의 부집행위원장으로 부임을 받고는 전주로 일자리를 옮겼습니다. 그리고 6년간 일을 하던 중 건강이 좋지 않아 2009년 제10회를 끝으로 영화제를 그만두었습니다. 솔직히 말해 영화제를 떠나면서 어쩐지 전주 고유의 멋지고 향기로운 문화적 분위기로부터 멀리 떨어져나가는 기분이 들어 아쉬움이 컸습니다. 다행히도 퇴직하고 반년뒤 문화저널의 지면에 2010년 1월호부터 글을 쓰게 돼서 참으로 기쁩니다.앞으로 얼마 동안 제 글은 두 가지 주제를 중심으로 써지리라 싶습니다. 하나는 1989년부터 이십여 년 동안 국내외의 영화계와 교류하면서쌓은 제 개인적 경험을 바탕으로 80년 대 이후 한국영화의 국제적 발전상을 돌아보며 재음미하는 것이고, 둘째는 전주영화제에 합류하면서부터 제가 담당했던 <발굴의 영화>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하여 5년 동안 3대륙을 이리저리 헤매던 오디세이적인 모험의 기행을 글로 쓸려고합니다. 더불어 제 글이 한국영화가 과거 어떤 과정을 거쳐 오늘의 국제적으로 높은 경지에 오르게 됐는지를 이해하는데 조금이라도 보탬이되기를 감히 바라는 바입니다. 글 가운데 일부는 앞에서 말했듯이 세영화잡지에 실린 바 있었습니다. 그러나 문화저널을 위해 이전 글들은다시 다듬고 보충돼서 새롭게 쓰입니다. 독자님들의 영화예술에 대한많은 관심을 기대하며 혹시 글이 잘못 써진 곳이 있으면 고쳐주시고 비평의 충고도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나를 한국영화로 이끈 배용균 감독의 첫 영화 배용균 감독과의 만남은 평론가로서의 내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꿔놓은 잊지 못할 사건으로 기억에 남아있다. 1989년 초여름, 나는 우연히 한 영화관에서바젤 자이퉁(지역신문)의 영화부 편집장인 친구 부르노 애끼를 만났다. 그는 나를 보자 느닷없이 한국에곧 갈 일이 있냐고 물었다. 내가 어머니의 병환 때문에 곧 갈 참이라고 대답하자 그럼 제발 배용균 감독을 만나 인터뷰를 해오라고, 신신부탁을 하는 것이었다. 이유를 묻자, 그가 운영하는 국제배급사 트리곤 필름(Trigon Film)에서 배용균 감독의 <달마가동쪽으로 간 까닭은?>을 그 해 로카르노 영화제의경쟁부문에 올려놨는데 인터뷰 재료를 준비하지 못해 걱정을 하던 차에 나를 만나 아주 잘됐다는 식이었다.나는 친구의 간청에 못 이겨 결국 배 감독을 서울에서 만났다. 딴에는 전공이 영화사였지만 느지감치결혼하고 애 둘을 기르느라 80년대 초에 가서야 스위스의 주간지에 가끔씩 영화평을 쓰고 어쩌다 라디오 프로그램에나가는 정도였을 뿐 영화계와는 접촉이없었는지라 영화감독과의 인터뷰는 처음이었다. 서울 경복궁 옆의 어느 찻집에서 만난 훤칠한 모습이었다. 그는 초긴장을 하고 있는 나를 시답지 않게 여겼는지 처음엔 내 물음에 건성이었다.초조한 10여 분이 지날 쯤 그는 갑자기태도를 바꾸고는 내 질문이 갈수록 마음에 든다면서, 인터뷰를 새로 하자고 했다. 그러고는 두 시간이 훨씬 지나서야그는 대담을 그쳤다. 얼추 작은 책자 하나를 메우고도 남을 분량의 인터뷰 내용이 내 녹음기에 기록돼 있었는데, 그는차분한 목소리로 자기 작품이 완성될 때까지의 과정을 강의하는 식으로 설명을했는데, 질리기는커녕 그의 논리적인 수사에 홀려 나 역시 시간가는 줄을 몰랐다. 실지로 배 감독은 파리에서 미학을전공한 교수로서 대구의 효성여자 대학에서 강의를 하면서 영화를 만들었다.하지만 그 길고 긴 대담을 다 쓸 수는없는 터라 스위스에 돌아온 뒤 나는 그걸 A4 원고지 12장쯤으로 줄여 독어로 번역한 뒤 영화제 시작 직전에 친구에게 넘겼다. 그런데 놀랍게도 내 인터뷰 기사는 영화제의 공식 일간지인 파르도의 지면에 전부 실렸고 그 뿐 아니라 기자들의 프레스 박스에까지 넣어졌다. 그 때만해도 국제영화제에서 한국영화에대한 정보재료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때였는지라 내 글은 기자들 사이에 인기가 높았다. 나는 트리곤 필름의 친구가 왜 인터뷰 기사를 놓고 그렇게 서둘렀는지를 그때 가서야 알게 됐지만, 우리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배용균 감독은 첫 영화를 가지고 제42회 로카르노 영화제서 황금표범상을 받은 것이다. 70년이 넘는 한국영화사에서 한국영화가 주요 국제영화제서 대상을 받은 건 그게 처음이었다. 그것도 영화제작의 중심지였던 충무로 밖에서 감독 혼자 아주 어렵게 만든 비주류의영화가 대상을 탔다. 나는 한국영화사에 한 획을 그은 역사적인 사건의 그 자리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게 너무 감격스러웠고 한국영화가 그저 자랑스럽기만 했다.배 감독의 영화에 대한 기자들의 반응은 한마디로 문화적 충격 그것이었다. 냉전 이데올로기가 끝나가던 80년대 말쯤 영화계는 사실뭔가 새로운 미학, 새로운 영화철학을 찾던 정서적 혼란의 시기였다.그런 시점에서 정교한 불교미학을 바탕으로 영혼의 구원에 대한 인간의 깊은 고뇌를 다룬 배용균 감독의 영화는 관객에게 깊은 감화를 주기에 충분했다. 배 감독은 수상의 기자회견 석상에서 영화를 만든 동기에 대해 나는‘관객을 위해 명상의 사원을 짓고 싶었다’라고 설명했는데, 아주 적절한 표현이었던 같다. 수상발표가 나가던 날 배 감독을 인터뷰를 하던 스위스 텔레비전 영화부의 여편집장은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을 본 뒤 한동안 정신적 충격에 빠져 일에 손이 잡히지 않았다며, 눈시울을 붉혔다.그런가 하면 많은 기자들은 한국에도영화가 있냐고, 물을 정도로 한국영화를모르고 있었던 터라 수상 소식에 너무놀라워하는 눈치였고 뭣보다 배 감독 영화의 공교한 카메라 움직임의 기술적 솜씨에 찬탄을 쏟았다. <달마가 동쪽으로간 까닭은?>의 성공은 그것으로 그치지않았다. 이 영화는 한국영화로서 좀처럼뚫기 어려웠던 국제배급의 좁디좁은 통로를 거쳐 파리, 런던, 로마, 베를린 등유럽의 큰 도시의 일반 상영관에서 이례적인 대성공을 거둔 첫 작품에 속한다. 스위스의 로카르노 영화제 알다시피 로카르노 영화제는 칸느 영화와 동갑이다. 그러나 정부의넉넉지 못한 지원과 전국적으로 생산성이 가장 낮은 이탈리아 언어권의 소수민 지역에서 행사를 치르는 바람에 오랫동안 작은 규모의 영화제로 남았었다. 그 때문에 영화제의 집행위원장이 자주 바뀌고 프로그램의 방향이 갈팡질팡했었다. 그런 가운데 80년대 중반 스위스출신 대비드 스트라이프가 집행을 맡으면서 영화제는 차츰 안정성을찾았고 90년대 중반에 닿아서는 세계가 인정하는 알찬 영화제로 치솟으며 전성기를 이루었다. 사진예술의 전문가인 스트라이프 집행위원장은 시작부터 대형영화제와 피나는 경쟁을 하는 것보다 작은 영화제의 역할에 알맞은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함을 강조했다. 그에 따라 로카르노 영화제는 이때부터 젊은 감독들의 초기 작품과 대형 영화제서 제대로 빛을 받지 못한 수작을 불러 모아 젊은이를 위한 영화제로 방향을 바꿈과 동시에 스타 대신에전적으로 감독 위주로 행사를 치르면서영화제의 경비를 줄여나갔다. 스위스 국민의 특성인 현실성의 실용주의에 뿌리를 둔 스트라이프의 영화제 정책은 로카르노 영화제를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행사로 만드는데 성공했다.사실 배 감독의 영화가 로카르노에서대상을 받게 된 것도 집행위원장의 정책과 무관하지 않았다. 알다시피 그의 영화는 칸에서 관객의 관심을 사는데 크게실패했다. 그럼에도 로카르노에선 이 영화의 우수성을 의심치 않았고 트리곤 필름 배급사와 협조하여 국제경쟁부문에초청하여 대상의 기회를 만들어줬던 것이다.그것 말고도 로카르노 영화제는 그 해한국영화계에 또 하나의 선물을 안겨주었다. 한국영화의‘새로운 물결’의 대표적 인물로 국내에서 주목 받던 박광수감독의 첫 영화 <칠수와 만수>가 경쟁부문의‘젊음이의 상’을 받은 희소식이었다. 그로 인해 1989년 로카르노 영화제는 한국영화의 존재를 국제적으로 알리는 데 더 없이 좋은 무대가 됐었다. 한국의 최초 작가영화에 속하는 배용균 감독의 작품과 서울대를 중심으로 일어난‘얄라성’영화운동의 일인자 박광수 감독의 저예산 영화는상업영화가 주류를 이루던 80년 말경 한국에서 새로이 나타난 긍정적 변화의 현상으로 로카르노 영화제서 첫 열매를 맺은 것이다.로카르노 영화제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게 있다. 한국의 두 감독들이 수상식에 올랐던 야외 상영장 피아짜 그랜데가 바로 그것인데, 시의 중심에 자리한 이곳은 낮에는 시민들이 들랑거리는 평범한광장이지만 영화제 동안은 밤마다 7천여 명의 관객이 밀집하는 곳으로, 유럽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대형 화면을 통하여 영화를 즐길수 있으며 해마다 입장권판매로 거두는 돈은 영화제 경비의 1/3에 해당하는 수입원으로도 아주 중요하다. 비좁은 땅을 늘려 쓸 줄 아는 스위스 사람들의 지혜에서 나온 걸작이다.글의 맨 앞에서 말했듯이 배 감독을 만나면서 나에겐 많은 변화가왔다. 그의 성공 덕분에 나는 스위스와 독일의 두서너 영화전문 잡지의 프리랜서로 글을 쓰게 됐고 스위스 평론협회와 국제평론협회의 회원권을 얻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변화는 한국영화계와 접촉할 수있는 새로운 계기가 생긴 점이다. 배 감독을 만날 때까지 나는 한국영화를 볼 기회가 거의 없었다. 내가 졸업논문을 일본 감독 아키라 쿠로사바의 초기 영화로 정한 것도 70년대에 한국영화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국영화계와 인연을 맺으면서1989년 로카르노 영화제 이후 2009년까지 20년 동안 나는 한국과유럽영화계를 잇는 다양한 작업을 해왔다.이게 모두 한번의 인터뷰 때문에 생긴 일이다. 영화가 얼마나 매력있는 예술인지를 이제야 좀 알 것 같다. 임안자 전북 진안 출생으로 스위스 프리부룩 대학 신문학과 영화사를전공했다. 스위스 로크르노 영화제 국제평론협회 심사위원과, 이탈리아 몬테카티니 국제 단편영화제 본선 심사위원을 맡기도 했다. 또한부산국제영화제의 고문과 전주국제영화제 부집행위원장으로 활동했다. 현재 프리랜서 영화평론가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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