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 네비게이션


분야별보기

트위터

페이스북

2010.2 |
임안자의‘내가 만난 한국영화’
관리자(2010-02-02 13:42:48)
임안자의‘내가 만난 한국영화’ 임권택 감독과 낭트영화제와의 추억 - 임안자 영화평론가 낭트영화제를 향하여 그럼에도 내 첫 반응은‘내가 집을 비우면 가정일과 애들은 어떻게 하지?’하는 가정주부 특유의 주춤병이 반사적으로 나를 얽맸다. 그런데 부르노의 다음설명이 더욱 매력적이었다. 낭트에서 임권택 감독의 헌정 회고전이 열리는데 거기서 임 감독을 만나 <씨받이>의 유럽판권에 대해 협상을 한다는 것과 내가통역을 맡아주라는 부탁을 덧붙였다. 임감독의 회고전은 신나는 뉴스였으나 통임권택 감독과낭트영화제와의 추억임안자 영화평론가1989년, <로카르노국제영화제>의 가슴 뿌듯했던 경험이 서서히 일상생활 속에 묻혀가던 그 해 초겨울에 나는 또 다시 트리곤 필름(앞으로는 트리곤)의 프르노 야끼(앞으로는 부르노)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그는 11월 말경에 있을 <낭트영화제>에 일주일 참석할 수 있느냐, 여행비는 모두트리곤에서 대준다는 등의 너무도 매력적인 계획을 나에게 제안했다.임안자의‘내가 만난 한국영화’역 문제는 경험이 거의 없었던 지라 그건 어렵겠다고 솔직히 말했다.그러나 부르노는 로카르노에서 배용균, 박광수 감독들의 통역을 맡았을 때 문제가 전혀 없었는데 무슨 걱정이냐며, 내 말을 일축해 버렸다.낭트영화제 참가 문제는 끝에 가서 주변의 협조로 쉽게 풀렸다. 직업이 의사인 남편은 집안일은 본인이 해결할 테니 바람도 쉴 겸 좋은기회를 놓치지 말고 낭트에 가는 걸 권했고, 초등학교에 다니는 두 아이는 옆의 친구 집에서 일주일을 머물 수 있게 되자 손뼉을 칠 정도로좋아했다. 드디어 나는 날아갈 듯 홀가분한 마음으로 낭트로 향해 먼길의 기차 여행에 올랐다.여기서 트리곤 배급사의 성격에 대해 짧게 말할 필요가 있는데, 이회사는 우루과이 협상이 이뤄진 일 년 뒤인 1987년에 스위스의 정부와 민간지원단체가 공동으로 만든 비영리성의 영화의 배급사로서, 제3국의 영화를 돕기 위해 출발한 유럽 최초의 연대 조직체이다. 알다시피 2차 대전 이후 영화배급 제도는 서구, 특히 미국 위주의 독점주의로 빠지면서 오로지 영익 단체로 발전하여 치열한 국제적 경쟁을불러일으켰다. 그 결과 막강한 서구의 경제체제 밑에서 저개발국가의영화는 작품의 우수성에 상관없이 대부분 국제 배급망을 뚫지 못했고그런 상황은 갈수록 더욱 나빠져 가고 있다.물론 오늘 제3국이라는 부정적 개념은 사라졌고 그 대신 개발도상국으로 불려진다. 트리곤은 전적으로 비서구권 지역에 속하는 개발도사상국의 영화를 사들여 배급한다. 80년대 설립 이후부터 지금까지 팔십만 편이 넘는 영화들이 트리곤을 통해 스위스 또는 유럽 여러곳의 영화관에서 상영됐다. 한국영화의 경우, 배용균 감독의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1989)과 임권택 감독의 <씨받이>(1986)와<춘향뎐>(2000) 그리고 송일곤 감독의 <꽃섬> (2001)이 이에 속한다. 낭트의 국제영화제 프랑스 서북부의 대서양 근처에서 열리는 <낭트영화제>는 1979년에 설립된그다지 크지 않는 영화제다. 7~80년대에 유럽의 여러 곳에서는 칸느, 베를린,베니스 등의 보수 색채의 대형 영화제에맞서는 크고 작은 규모의 대안 영화제들이 주로 이름난 평론가들을 중심으로 동시다발식으로 생겼던 시기였다. 칸느의감독주간, 베를린의 국제포럼 그리고 베니스와 간격을 둔 토리노 영화제들이 가장 대표적인 예이며, 낭트영화제의 탄생도 그 범주 안에 든다고 말할 수 있다.‘제3세계와의 영화작품을 통한 연대감의 형성’이라는 이 영화제의 슬로건에서도 볼 수 있듯이 낭트영화제는 소위제3세게 영화에 집중적인 접근을 시도했고, 영화제의 공식명칭을 <3대륙의영화제>(Festival des 3 Continents)라고 부르는 데는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아시아의 3대륙을 의미하며, 그건바로 저개발의 3대륙을 의미한다.영화제는 시작부터 필립 그리고 알랑잘라도 형제가 공동집행해 왔는데 동양지역에서는 동생 알랑 잘라도의 활동 지역이었다. 그는 80년대 중반에 대만 출신의 무명 감독 후 시아오시엔을 발굴하여 세계적 감독으로 만들었고, 한국의 경우 옛 영화공사 시절부터 서울을 드나들며 일찍이 한국영화에 관심을 돌렸다. 예로서, 1984년에 임권택 감독의 <만다라>가초청됐는가 하면 1986년엔 유럽 최초의‘한국영화 파노라마’를 진행시켰다.그 때의 파노라마 프로그램을 보자면 한국영화 2세대에 속하는 최인규 감독의 1946작 <자유만세>에서부터 하명중 감독의 1984년 작<땡볕>에까지 40여 년 간의 작품 13편을 보여줬는데, 놀라운 건 20세기 말에 가서야 평단의 심층적 관심을 모았던 김기영 감독의 <하녀>(1960)와 <충녀>(1972) 두 작품을 이미 80년 중반에 낭트에서 시사했던 점이다.그리고 1989년 영화제 제11회를 맞으면서 세계적 최초의‘임권택감독을 위한 헌사의 회고전’을 다시 마련함으로서 그는 자타가 인정하는 한국영화의 일인자로 떠올랐으며, 그 때만도 아주 드물었던 친한파의 한 사람으로 한국영화계의 대우를 받아왔다. 그러나 90년대이후 스위스의 프리부룩 그리고 오스트리아의 인스부룩 등에서 낭트와 비슷한 성격의 영화제들이 생기면서 낭트영화제는 차츰 독자성을잃어가고 있는 듯 하며 2009년으로 30년을 이어온 잘라도 형제의체제는 끝을 맺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 한국영화는 발 빠른 발전을 거듭하면서 오늘 날 세계적 명성을 누리고 있으니 격세지감이 크다. 낭트에서 만난 임권택 감독과 그의 회고전 나는 낭트에서 임권택 감독을 처음으로 만났는데도 이상하리만치전혀 낯설지 않았다. 먼저 그의 소위 표준어로 쓰는 서울말의 티가 없는 느릿한 리듬의 전라도 사투리에서 느껴지는 친근감이 내 마음을편하게 해주었고, 그래서 그런지 통역에 어려움이 많지 않을 것 같다는 좋은 느낌이 들었다.내가 살고 있는 스위스는 독어, 불어,이탈리아어, 레토로만어 네 종류의 언어를 국어로 쓰는 나라다. 거기에다 지역마다 색깔이 다 다른 지역언어(사투리)를 쓰기 때문에 표준어의 개념이 없는것과 마찬가지다. 그 대신 자기 지역의언어에 대한 애착과 관심은 아주 유별나다. 전라도 말을 은근히 업신여기는 한국의 풍토에서 자란 나였는지라 지역 사투리를 존중하고 그걸 문화의 다양성으로 이해하는 스위스의 언어정치의 전통은 스위스 생활 40년이 지난 지금도 깊은 감동은 준다. 그러기에 나는 전라도사투리를 고향의 아주 귀중한 문화적 유산으로 간주하고 아끼는 편인데, 나는임 감독 영화에서 자주 만나게 되는 모더니즘 이전의‘촌스러움’의 낯익은 정서적 분위기의 밑동은 전라도 사투리라는 걸 아주 늦게 깨달았다. 낭트회고전과 임권택 감독 이제 말머리를 바꾸어 회고전에 대해 쓸 차례다. 낭트회고전을 통해 국제관객에게 처음으로 소개된 영화는 12편이었다. 그와 동시에경쟁부문에 들었던 <아제아제 바라아제>까지 합치면 모두 13편이시사됐는데, 한마디로 1978년의 작품 <족보>에서 1988년의 <아다다>까지 10년에 걸친 임 감독의 영화작업의 발전상을 한 자리에서볼 수 있었던 드문 기회의 자리였다.여기서 임 감독의 전기를 잠깐 소개하자면, 그는 1934년 전라남도장성에서 유교전통의 풍부한 가정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러나 그의집안은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좌파성향의 삼촌 때문에 풍비박산이 됐고, 그는 겨우 중학교를 마치고는 어린 나이에 부산으로 가 장바닥에서 미군 군화를 팔며 배고픈 세월을 보냈다. 그러다 선배인 정창화 감독의 주선으로 충무로의 영화계에 들어간 뒤 온갖‘잡일’을 하다가1962년 첫 작품 <낙동강아 잘 있거라>로 감독의 자리에 오른다.그리고 이 영화의 상업적 성공으로 그는 70년 초까지 일 년에 5편,때로는 7편 영화를 찍을 정도로 아주 잘 나가는 멜로드라마의 감독이돼서 1973년에 이미 그의 작품 수는 50편에 달했다. 한마디로 영화계에 들어간 지 11년 만에 50편 영화를 만들었다는 소린데, 당시의사정으로는 흔한 일이었다고는 하지만, 일단 다작은 영화의 질과 직결되는 문제여서 명성이 높아질수록 감독에게는 자랑스럽지 못한 과거사가 됐다.그러다가 70년대를 맞으면서 <버려진 과부>와 <증언>(둘 다 1973년 작)과 <족보>(1978년)를 만들면서 60대의 멜로드라마 시대를 마치고 감독의 독자적 미학과 철학이 담긴 제2기 작품의 전환기를 맞는다.낭트의 회고전은 바로 이 시기의 작품들을 중심으로 이뤄졌고 주로 일본의 식민주의, 냉전의 이데올로기, 유교전통 사회의 이중적 성적 모랄, 남북의 분단, 한국의 근대사에서의 여성의 위치, 자본주의로 인한인간성의 상실 등 한국현대사의 비극적 현실을 주제를 다룬 역작들로서, 이들은 90년대 이후의 민속학적 전통의 미학을 바탕으로 한 제3기의 창작품과는 완연히 차별된다.낭트 이전에도 임권택 감독의 영화는 베니스, 몬트리올, 모스코바영화제에 초청되면서 국제적으로 어느 정도 알려졌었으나 번번이 여우주연상으로 끝나는 바람에 작가로서 인식과 대우를 받기엔 역부족이었다. 임 감독은 낭트영화제를 발판으로 드디어 자신의 작품의 창작자로 국제무대에 올라서게 됐고, 그의 작품에 대한 보다 체계적인평론의 장이 유럽에서 열리게 됐다. 이 점이 낭트회고전의 진짜 의미였다고 보며, 유럽의 이름난 평론가들이대거 참가하면서 임 감독 열풍을 일으켰다. 다만 프로그램에 오른 12편 영화 가운데 3편이 자막이 아예 없는 채 상영을하여 관개들이 줄줄이 나가는 가슴 아픈사태가 일어났는가 하면, 영화 한 편은틀린 다이아로그 리스트를 가지고 통역을 하는 바람에 관객석에서 항의가 벌어지기도 했다. 예를 들어, <오염의 자식들>에서 안성기 배우가 부인에게 분통을 터트리는 장면에서 객석에서는 폭소가 터져 극장 안에 있던 한국 관객을 어리둥절하게 했다. 참다못해 나는 영사실에 뛰어갔지만 통역자는 영화와 상관없는 다이아로그 리스트를 가지고 있는 걸보고 실로 망연자실 할 수밖에 없었다.최악의 상태를 막기 위해 파리의 불문학 학생과 나는 나머지 자막 없는 두 영화의 대화를 살리기 위해 파리에서 불문학을 하는 여학생과 나는 이틀 동안 밤이 늦도록 불어의 다이아로그의 리스트를 만들었으나 둘 다 전문가가 아니어서관객의 불만을 잠재우기엔 물론 역부족이었다. 낭트에 영화진흥공사의 해외 담당자들 몇몇이 와있었지만 국제적 회고전에 경험이 전혀 없었던 그들은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사건에 속수무책이었고 준비를 제대로 못한 영화제 측에서도 모든 침묵으로 일관했다. 한국의 역사적인 첫 해외 회고전은 그 중요성에도불구하고 그렇게 웃지 못 할 해프닝을 남기면서 끝났다.그러나 다행히 영화전문가들은 허점 보다 임 감독 작품의 장래성에더욱 관심을 두는 듯 열성을 보여 큰 위로를 받았고, 다음에 다시 말하겠지만 이들의 후속 작업 덕분에 낭트의 회고전은 예상 밖의 큰 파급효과를 불러왔다. 그리고 나를 낭트로 데리고 간 부르노 역시 회고전의 가치성을 높이 평가하면서 <씨받이> 계약이 잘 끝나서 만족하는 눈치였다. 애주가인 그와 임 감독은 몇 번이나 자리를 같이 하면서새벽 2~3시까지 술잔을 기울이며 영화를 놓고 이야기를 나눴는데,나는 이들의 긴 이야기를 통역하느라 계속 잠을 설쳤고 거기다 갑자기 프랑스의 영화전문지「포지티브」의 평론가 장 피에르 베르토메까지 인터뷰 글을 쓰기 위해 통역을 부탁하는 바람에 입술이 불어터질지경으로 피곤한 일주일을 보냈다. 그러나 일이 잘 끝났다는 데서 오는 성취감은 나의 삶에 자극제가 된 신선한 경험이었다. 임안자 전북 진안 출생으로 스위스 프리부룩 대학 신문학과 영화사를 전공했다. 스위스 로크르노 영화제 국제평론협회 심사위원과, 이탈리아 몬테카티니 국제 단편영화제 본선 심사위원을 맡기도 했다. 또한 부산국제영화제의 고문과 전주국제영화제 부집행위원장으로 활동했다. 현재 프리랜서 영화평론가로 활동 중이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