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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2 |
[내인생의멘토] 전주‘얼화랑’한춘희 관장
관리자(2010-02-02 13:43:20)
전주‘얼화랑’한춘희 관장 멘토가 있는 삶은 다르더라 - 이일순 화가 어색하고 불안했던 시절의 나 그런데 그림을 그리면서나 내 일상적삶에 있어서 스승님 못지않게 마음 속 깊이 자리한 한 분이 떠올라 글쓰기의 권유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인생이나 화업의좌우명을 세워주었다기보다 항상 그 자리에 있으면서 언제든 찾아가 위로받고기운 받아 올 수 있는 무한 휴식처가 되어 주신 분이다. 그 분은 바로‘얼화랑’의 한 관장님이신데, 대학시절 처음 뵙게되었으니 그 분과의 인연도 거의 20년이다 되어간다. 화랑이 문을 닫고 자주 뵐수 없지만 나의 길에 꼭 계셔야 할 분으로 잠깐 글을 통해 관장님과의 만남을 적어보려 한다.어려서부터 이사를 많이 다니고 그러다 보니 마음속엔 친구나 살던 곳에 대한 그리움과 새로운 곳에 적응해야하는 부담이 늘 내 맘 속에 부족함, 또는 불안함을 만들어 주었던 것같다. 특히 전학을 다니며 새 학교와 친구들에게 적응하는불편한 순간은 그런 불안함이 극에 달했다. 그때마다 공책의빈 곳에 끼적끼적 그림을 그리며 시선을 피하기도 하고, 때로는 그렇게 조금씩 쌓인 그림실력이 낯선 곳에서 전학 온그림 좀 그린다는 애로 조금씩 나를 인식시키곤 했었던 것같다. 덕분에 자연스럽게 미술이란 것을 통해 만족감과 자신감을 얻게 되었고 남들과 비슷한 과정을 거쳐 미술대학에 입학하게 되었다.미술을 전공하게 되어서도 낯설고 어색한 분위기에 적응하기는 쉽지 않았는데 그 중 단연 어색했던 것은 어쩐지 평범하기만 한 나라는 사람이 갖가지 예술을 전공하는 끼와 재능을 가진 친구들을 보며‘과연 나도 저들과 어울릴 수 있을까? 예술적 소양이 있는 사람인가?’라는 생각 때문이었다.일 년 가까이 대학생활을 하면서 모든것이 새롭게 채워지는 느낌이었지만 그림 그리는 일은 즐겁기보다 아리송한 어려운 숙제에 가까웠다. 새 학기를 맞아수업이 없는 요일엔 계획을 짜서 뭔가 영감을 얻을 수 있는 알찬시간을 보내기로했다. 한 관장님 그리고‘얼화랑’과의 인연 그때 자주 가던 곳이 지금의 구 도청옆에 위치한‘얼화랑’이란 곳이었다. 화랑과 예술회관을 둘러보고 서점이나 영화관에 다녀오는 것이 나름대로의 내 미천한 미적 소양을 기르는 중요한 공부라고 생각했던 때라 가능하면 매주 가려고 노력했었는데 융통성 없고 부끄러움 많았던 나를 자연스럽게 그 곳으로 이끌었던 분이 바로 한춘희관장님이셨다.처음엔 인사도 없이 불쑥 들어갔다가 슬그머니 나왔었는데, 자주 가다보니 눈인사 정도 하게 되었고 어느 날 나에게도 앉을 자리를 내주셨다. 화랑에 발을 들인지 일 년여 만에관장님이 주시는 약차를 받아 마시며 처음 나를 소개하고 인사를 드리게 되었다. 그 후 그림을 보러 가는 목적도 있었지만 더 즐거웠던 것은 관장님을 만나 그간 입 속에 감춰두었던 궁금했던 물음을 묻고, 전시를 하고 계시는 작가 선생님들을 소개받는 영광도 누릴 수 있다는 점이었다. 학교에서의배움 못지않게 그림을 감상하고 작가 선생님들의 여러 모습을 직접 접하고 느낄 수 있는 또 하나의 학교로서 정말 소중한 곳이었다.원로선생님, 그림으로만 보았던 작품의 작가선생님들, 여러 학교의 선배님들까지 빙 둘러 앉아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어느새 화랑 밖 이야기까지 듣고 배우는 흥미로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어느 때부터 내 관심은 그림 보고 이야기 나누는 정도를 넘어서 관장님의 전시를 진행하는 모습,공손히 작가를 섭외하는 전화 목소리…,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 조명을 갈아 끼우는 모습, 화랑에 들어온 누구라도 반갑게, 따뜻하게 맞아 주고 마음을 풀어 놓게 하는 편안한 모습, 발송용 봉투작업을하는 모습 등을 지켜보고 배우는 것이었다. 가끔은 관장님의 그 일들도 거들어 보고 싶었다. 그때마다 귀찮을 수도 있을 여러 일들에 대해 동생처럼 편안하게 가르쳐주셨다. 어느새 관장님은 친언니처럼 가깝고 든든한 존재가 되어 있었다.관장님의 모습 속에서 가장 마음을 울리는 것은 한결같음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사람이라면 누구나가지고 있고, 나 역시 항상 갈등 하는 여러 형상의 욕심보다 더 값진 것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관장님을 대하면서 정확히 어떤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가치관 형성에도 많은 영향을 받은 것 같다. 뛰어난 재능을 인정받고 그림이 알려지는 것도 좋지만, 여럿과 어울려 사는 세상 속에서 화려하지는 않지만 한결같은 모습엔 귀한 믿음과 힘이 있음을 일깨워주셨다. ‘관장님처럼 좋은 사람 되고 싶다’며 요즘 말하는 롤모델로 내 맘 속에 자주 등장하셨다. 내 인생의 영양제 사람의 사랑이나 우정 같은 관계들도 한 번씩 되새기게 되는 계기가 있는데 관장님과의 관계도 공기처럼 편안해 유별날 것 없이 느껴지기도 했지만 결혼을 하고 다시 한 번 그 고마움과 소중함을 느끼게 되었다. 결혼생활, 특히 어린 아이를 키우면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중요한지 매일매일 생각했었다.그림 그리는 시간을 내는 것도 쉽지 않고 발도 집에 꽁꽁 묶여있다고 생각하니 울적한 기분일 때가자주 있었는데 왜 그랬는지 문득문득 관장님께서 사무를 보시던 모습을 떠올려 보곤 했다. 전시장 한쪽에 반 평 정도 되는 좁은 공간이었다.어느 날 관장님의 그 책상에 앉아본 적이 있는데 밖에서 보던 빠듯함 대신 단정하고 아늑했던 기억이다. 그 사방 1㎡ 공간 속에서 오랜 시간 화랑 일을 보고 자신의 시간을 보내는 모습을 떠올려보며당시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힘들어하는 나에게‘공간의 크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앞에 앉아 일하는 이의 마음의 크기가 수치로 환산될 수 없이 귀한 것이다’라는 메시지를 보내는 것 같았다.그런 나름 의미 있는 메시지를 떠올리면서도 항상 관장님을 찾아가 힘드니, 어려우니, 늘 푸념 일색이었는데 항상 미소로서 받아주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철없고 부끄럽다. 아기의 백일이 지나고 처음나들이도 관장님을 만나러 갔었다. 관장님을 만나고 집에 오면 어떻게든 그림도 그려야겠다고 생각하고 또 언제 갈까 기대도 해보며 한결 내가 행복한 사람임이 느껴졌다. 관장님의 관심과 애정이 영양제처럼 어려운 고비를 넘기는데 힘을 주신 것이다. 2002년에 어렵사리 준비한‘얼화랑’에서의 두 번째개인전은 이후에 그림을 그릴 용기를 갖게 해준 전시인데 그 때 역시 관장님의 도움 속에서였다.글재주가 없어 고마운 마음과 당시 관장님을 연모하던 내 마음을 잘 표현하기가 힘들지만 숨겨두었던 마음을 표현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 같아 더듬더듬 추억을 떠올려보았다. 예전처럼 관장님을 자주 볼 수 없어서 어쩌면 지난 시간이 더 소중하게 느껴지는지도 모르겠다.내 인생에 중요한 시절마다 철없는 나에게 선생님이 되어주기도 하고 언니가 되어주기도 하신 관장님을 생각하니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어 보답할 수 있다면 … 생각해본다. 이일순 전남 강진에서 태어나 전북대학교 예술대학 미술학과 및 동 대학원 미술학과를 졸업했다. 그동안 전주와 서울에서다수의 개인전을 열었고 그룹전에 참여했다. 대한민국미술대전, 전라북도미술대전 특선과 전라북도 미술대전 입선 및 우수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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