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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3 |
[명인명장] 석공예 명장 - 권오달
관리자(2010-03-03 17:22:30)
석공예 명장 - 권오달 권오달 명장 걸어온 길 1942년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안동권씨 양반 집안에서 출생 1981년 익산 신용동에 석공예 공장 설립 1994년 기능올림픽 전국대회 심사위원 1996년 문화재 수리 자격증 취득 1997년 석공예 직업훈련 전문교사 자격증 취득 1998년 대한 전문건설협회 인정 기능사 선발 심사위원 대한민국 석공 명장으로 지정 1999년 ‘익산지역의 석조미술과 돌다루기’출판 2000년 서동문화축제 이사 2004년 제7회 전국돌문화축제 제전위원장 2005년 석공예 명장 심사위원 위촉 2006년 명지대학교 대학원 문화재과 객원교수 2009년 제12회 전국돌문화축제 자문위원 2010년 ‘2010 익산세계돌문화비엔날레’재단이사 취임 남강석재 대표 “석공은‘장인’라기보다는 ‘쟁이’지요, 돌쟁이! ” 배운 자의 고통이 얼마나 큰지 아느냐? 제 할아버님이 고종황제 시절에 육군부위를 지내셨어요. 한일합방으로 나라가 없어지니까 벼슬은 안 하신다고 그만 두셨어요. 벼슬을 하려면 일본 사람들 녹을 받아야 되잖아요? 그래서 그거안 하신다고 고향에 돌아오셨는데 그 뒤로 집안이 몰락이 돼버려요. 그러자 집안에 있던 가노들도 다 나가버리고 생활도 어려워지고…. 우리 아버님은 일본 징용 안 당할려고 만주로 다니시고…. 뭐 독립운동 그런 거는 아니고 일본 징용피해서 다니셨어요. 내가 태어나고 3년 후에 해방이 됐는데, 할아버지가 아들 태어나봤자 일본놈들 군인이나 될 거 아니냐, 그래서는 안 되겠다해서 나이를 줄였어요. 그래서 내가 군대 갈 무렵에 내 친구들은 다 상병, 병장을 달았어요.우리 할아버지가 우리 아버지보고 뭐라고 하셨냐면, 배운 자의 고통이 얼마나 아픈지 아냐? 당시는 일본 정치 때니까. 우리 할아버지가 대한제국 시절에 일본 유학 갔다 와서 육군 부위 벼슬을하셨으니까 정3품인데, 일본이 36년간 통치하던 시절이 와 버리니까 그 사람들이 우리 할아버지를 불러다가 써먹을려고 얼마나 구찮게 굴었을거여. 아, 생각을 해봐요. 일본말을 모르는 사람도 데려다가 써먹을 판인디 그 이전에 일본에서육군사관학교를 나온 사람이니까 일본말을 얼마나 잘 허겄냐 그 말이여. 그러니까 일본 사람들이데려다가 써먹을라고 난리를 쳤지. 근디 나라는없지.그렁게 말하자면 당신이 충신으로 태어나 명문집안의 아들로 태어나서 오리지날 양반 200명만뽑아서 일본에 유학을 갔다 왔는데, 왜 그러냐면그때가 세계열강이 힘을 과시할 땐데 나라가 개혁을 할라먼 군인부터 개혁을 해야된다. 그래서오리지날 양반 아들만 200명을 뽑아서 일본 유학을 보냈단 말이여. 그때 갔다 오신 양반이여,우리 할아버지가. 전주 35사단인가 생길 때도 최초의 창설자는 육군 부위 출신이었어요. 육군 부위가 대단히 높은 거였어요. 그냥 나가면 호조판서도 할 판이고 그게 계속 이어졌으면 할아버지 은덕을 입어서 내가 참봉이라도 할 판인디, 나라가 없어져 버리니까 집안이 몰락해 버리고 오늘날 와서는 아무것도 없어져 버렸지.그러니까 우리 할아버지께서 하신 얘기가 나라 잃은 슬픔에다가 배운자의 고통이 얼마나 심한지 아냐? 너는 내가 가지고 있는 재산만 잘 관리하고 살아도 먹고 사는 데 지장은 없으니까 그냥 살아라. 그러면서 고의적으로 안 가르쳤어요. 가치관을 바꿔버린 거죠. 그냥 너는 가진 것 가지고 농사나 짓고 살아라, 그렇게 바꿔버린 거죠. 나라도 없는데 니가 배워서 어디 가서 충성을 할 거냐, 그런 거죠. 그러니 이제 명문 집안의 대가 끊기는 거 아니요? 아호를 천년세라고 지었어요 그래서 내가 인자 1942년도 음력으로 12월 1일 날 태어났는데 우리할아버지가 내 이름은‘천년세’라고 지었어요. 천년 동안 살으라고. 그래서 내 아호가 천년세요. 할아버지가 부를 때는 천년세라고 불렀고 하인들이 부를 때는 천년세 도련님이라고 불렀어. 그렇게 불러야 오래 산다 그거여. 옛날에 왜 말똥이 쇠똥이 그랬잖아요? 천하게 불러야 전염병 같은병도 안 걸리고 오래 산다고. 농사일 잘하면 돌쇠, 3월에 태어나면 삼월이, 간난이…. 뭐 그렇게 불렀잖아요. 하여튼그렇게 할아버지가 고의적으로 안 가르치다 보니까 당신이 알고 있는 일본어라도 가르칠 수 있었는데 전혀 안가르치셨어요. 그래도 아버지 시절에는 일본어를 안 하면 배급도 못 받고살 수가 없으니까 생활 일본어는 곧잘 하셨어요. 글씨로 쓰지는 못했어도. 그래도 아무개 아들이다 그래서주위에서 눈총을 많이 받았죠.우리 아버지는 아무런 사상도 없고아는 것도 없는데 6·25때는 참 숭악한 시절이었어요. 낮에는 아군이들어와 있고 밤에는 북한군이 들어와 있고 그런 때였어요. 내가 태어난 곳이 경기도 양평인데, 그 사람들이 무슨 사상이 있겠어요? 그저집에 그 사람들이 들어왔다 하면 그 사람들이 시킨 일을 안 할 수가 없었어요. 아군이 시키면 아군일을 하고 적군이 시키면 적군 일을 하고 그럴 수밖에 없었어요. 안 하면 죽으니까. 그런디 옆에서그런 일 했다고 손가락질 하면 그래서 또 죽는 거야. 그래서 피해 다니시다가 내가 일곱 살 되던 해에 돌아가셨어요. 행방이 불명된 거예요. 나중에어디서 돌아가셨다는 얘기만 전해 들었어요. 시신도 못 찾고. 그때는 뭐 아군이라도 죽이고 적군이라도 죽이고 뭐 아주 안타까운 시절이요 그때가. 하루아침에 거지가 돼버린 거지 그래 가지고 먹을 게 없는 거야 우리 집안이.그때만 해도 동네에 논떼기가 좀 있었는데 우리집에서 부리던 하인들이 집을 나가면 그 사람들한테 띠어 주기도 하고, 종살이 하다가 나가면 독립을 시켜줄라고 논 몇 마지기씩 띠어줬어요. 경기도 지방에 가면 닷마지기 열마지기가 여기로말하면 몇 필지하고 맞먹어요. 엄청나게 큰 거예요. 왜그냐면 산골짜기에 논이 어디가 있어? 한20마지기만 있어도 부자로 쳐줬어요. 하여튼 그렇게 노나 주기도 하고 또 피해 다니시다 보니까농사도 못 짓고…. 또 도조라고 그래서 다른 사람한테 농사를 짓게 하고 쌀을 얼마씩 받아먹었는데, 우리 집이 일곱 식구였는데 입 하나 덜라고우리 고모는 열여섯인가 일곱에 시집을 보냈어요. 말하자면 씨받이 비슷한 걸로 갔는데 양반집딸이 그렇게 가서 갖은 고생을 하다가 죽었어요.그나마 몇 십 마지기 있는 것 가지고 세 받아 먹을라고 노나줬던 것이 농지개혁이 들어오는 거여. 그러니까 농사짓는 사람들이 자기가 깔고 앉은 걸 신고를 해뻐리면 정부에서 강제로 몰수를하는 거야. 그게 농지개혁이여. 그러면 그걸 농사짓는 사람한테 그냥 노나주는 거라니까. 지주라고 할지라도 자기 땅이 아니여. 도조도 못 받고.말하자면 아주 헐값으로 넘기고 우리는 하루아침에 거지가 돼버린 거지. 당시 우리 마을 일대에있는 쑥, 질갱이, 나물 쭉떼기, 이런 것들이 우리집에서 십 리 안에는 없다고 그래. 우리 식구가다 파먹어서. 우리는 몇 대로 부자로 잘 먹고 살다가 농지개혁이 되면서…. 그것도 안 할 수도 있었는데 우리 할아버지가“나다!”하고 얼굴 내밀면 안 할 수도 있었는데 초야에 묻혀서 전혀 상관을 안 했어. 그래서 다 뺏겨버렸지. 산골짜기 가서 가재 잡아먹고…. 도련님을 먹여 살리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다 망했다고 하니까 우리집에서 부리던 사람 중에 한 사람이 돌일을 했대요. 일본정치 전에 가노들을 내보냈는데 우리 할아버지를 영감님이라고 하면서 자주 찾아왔어요.뭐라도 하나 들고 오고 그랬는데, 그 사람들도 하도 뺏기고 그러니까 뭐 가져올 것도 없지. 헌데그 중에 돌일하던 사람이 와서-이미 할아버지는나 열네 살에 돌아가셨는데-열다섯 살 때 와서할머니한테“도련님을 나한테 주시면 굶기지는않겠다”고 한 거여. 나가 우리 집 맏이거든. “내가 할아버지한테 은혜를 입은 사람인데 도련님굶기지는 않겠고, 잘 모시겠다”고 자꾸 달라고해. 그래 자네 뭐하는 사람인가? 그러니까 그냥밥만 먹고 살아요, 그래. 그때게는 무슨‘쟁이’이러면 아주 무시하고 천하고 사람취급도 안 했는데양반집에서 그런 걸 좋아할 리가 없죠. 그래도 하도 사정을 하니까 입 하나 덜라고 우리 고모 시집보내듯이 나도 열댓 살에 밥이나 먹을라고 갔지.그때부터 돌일을 배웠으면 좋았을 텐데, 말하자면 내가 도련님이라 고생시키면 나중에 죽어서라도 어떻게 영감님을 뵙겠느냐 그러면서 이 양반이 나를 도련님 모시듯 헌 거여. 마지못하면 심부름이나 시키고. 그래서 내가 기술은 크게 배우지는 못했지만 그게 말하자면 돌일을 하게 된 계기여. 그렇게 인연이 된 거여. 항상 내가 하는 말이“배고파서 할 수 없이 배울라고 나섰다”고 그러지. 밥은 먹을 수 있었으니까. 잘 먹었어요. 그때는 논마지기나 있고그러면 발로 디뎌서 디딜방아를 쿵닥퉁닥 찧었는데-오죽하면 옛날 소리에‘시어머니 죽어서 좋다고 했더니 보리방아 물 부어놓고 또 생각난다’고 해. 그게 시어머니가 있어서 우그려 넣어줘야 보리를 빻지. 혼자는 못해. 그래서 생겨난 것이 맷돌이라든지 절구통이에요.-그 양반이 나를데리고 한 4년 대녔어요. 열여덟, 열아홉 살까지.어느 동네에서 와달라고 하면 그 동네에 가서 절구통을 만들어. 나무로 된 절구통은 가볍기는 한데 때리면 끄떡끄떡하고 귀찮거든. 그러면때릴 수가 없잖아. 힘이 있는 여자도 때릴 수가 없어. 그런데 돌절구로해놓으면 닦기가 좀 고약스러워서 그러지 아주 떡메를 치던지 뭘 하던지때리기만 하면 잘 되잖아요. 그러니까 그냥 구멍만 파는 거여. 당시에는신흥부자들이 생겨나던 때였어요. 머슴살이 하던 사람들이 다 논도 생기고 가정을 이루니까 가정에서 절구통이 필요한 거여. 옛날 부자들은 찧어와라 하면 누가 찧어다 주지만 신흥부자들은 그렇지 않으니까. 이 집에서 하나 해놓으면 좋거든? 그러니까 또 우리 집 것도 봐주시오. 그래서 한 동네 들어가면 그 동네서 4, 5개월? 그렇게 있었어요. 그런데 나한테 돌 깎는 일은 안 시켜요. 어쩌다 내가 망치질이라도 하면 그 양반한테 들켜. 아이고 도련님이 왜 그런데 손을 대냐고, 못 쓴다고, 도련님을그런 걸 할 사람이 아니잖냐고, 못하게 해. 임시로 나랑 있는 거지, 돌쟁이하라고 데려간 게 아니니까. 월남 갔다 와서 빚을 다 갚고 그래가지고 군대 가기 전에 동네서 어떤 아저씨뻘 되는 사람을 모함해서 내쫓을라고 해서 내가 아니라고 말리다가 싸움을 떠맡게 돼버렸어.그 대가로 장리쌀 열가마니 빚을 졌는데 그때 장리쌀 열 가마니를 갚을라면 일흔 가마니가 있어야 돼. 일흔 다섯 가마니.나 군대 가기 전에 농사도 머리 써가면서 기가 막히게 잘 지었어요. 한2, 3년 동안 집에 있으면서 농촌진흥청에서 교육도 받고 농사를 잘 해볼라고 했어. 이쪽 돌일 쪽으로 갈라고 안했어. 콩농사 지어서 대가리 짤르는 것도 내가 최초로 했던 거여. 콩농사를 기가 막히게 지었는데, 그때막 농촌지도소라는 것이 생겼어. 제가 살았던 곳이 경기도 양평군 용문린데 용문리 지도소 직원 하나가 내가 지은 콩농사를 보고 조사를 해서그 농법이 퍼져갔어. 농사 쪽으로 나갔으면 성공했을 거여. 머리를 써가면서 농사를 지었으니까. 그래서 동네 사람들이 나를 못 나가게 허는 거야. 그때 내가 중학교 졸업을 못 허고 중퇴였는데 그 정도 실력이면 농촌지도소 같은 데 갈 수도 있었어.근데 군대 갔다 와서 보니까 열 가마니가 일흔 다섯 가마니로 불어나있는 거여. 갚을 길이 없잖어? 그래서 내가 월남을 간 거여. 월남 가서죽으면 2백만원 나왔어. 당시에 천만원이면 최고 부자라고 했는데 3개군을 통틀어야 한 사람 나올까 말까 그랬어. 그랬으니 2백만원이면 어마어마한 거지. 졸부지 졸부. 그래서 월남 가면 당시 쌀 한 가마니가 2천원인가 천오백원인가 그랬으니까 돈 만원이면 갚을 수 있겠더라고. 그래서 월남 갔다 와서 그 빚을 다 갚고 돈 좀 남은 걸로 우리 동생-동생도월남을 또 갔다 왔어-돈하고 같이 합쳐서 양계를 시작했어.닭은 한 천 마리 길렀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그때 결혼을 안 하면영영 못하겠더라고. 내가 월남 갔다 오니까 나이가 벌써 스물여덟이여.그때 나이가 스물여덟이면 노총각이여. 나만 보면 사람들이 큰일 났다고그려. 어른들이 지나가다가도 나만 보면“큰일 났다!”그러고 지나가. 진짜로 걱정이 돼서 그런 거여. 뉘 집 손자인데 스물여덟까지 장가를 안 갔으니까 손이 끊어지게 생겼잖아. 내 친구들은 결혼해서 애들까지 낳았는데. 그때도 내가 전라도 색시하고 결혼을 헐라고 하면 했어. 그때 경기도동네에다 전라도 색시들을 20명에서 30명 정도로 몰고 올라와. 방에다이렇게 놔두고 창호지 문을 뚫고 딜다봐. 요러고 쳐다보다가“저기 털있는 잠바 입은 아가씨가 맘에 든다”고 딱 찍으면 데리고 온 아줌마가“그아가씨는 쌀이 세 가마니요.”그래. 그렇게 결혼을 했어요. 그런데 전라도 색시들이 아주 악바리요. 일을 기가 막히게 잘해요. 그 아줌마가 나한테도 그렇게 결혼을 하라는 거여. 그런데 그것은 싫더라고. 사람이 무슨강아지도 아니고…. 나가 어렸을 때부터 책 읽는 걸 굉장히 좋아했어요.노예제도 이런 걸 다 알았어. 사람이 무슨 노예도 아니고 저런 식으로 사람을 데려와서야 쓰겄냐, 그래서 절대로 안 한다고 했어. 내가 워낙 못사니까“너는 쌀 한 말만 주면 아주 젤 예쁜 색시로 하나로 해줄 테니까나중에 잘 살게 되면 인사나 하러 오라”고 하는데도 내가 안 했어. 이거 아니면 죽는다 하여튼 그래서 내가 거짓말을 하고 결혼을 했어. 양계장이 전부 내꺼다고 거짓말을 했어. 근데집사람이 결혼하고 보니까 아니거든? 그러니까어느 날 집사람이 하는 얘기가, 여기서 이렇게 썩을 것이 아니라 서울로 가자고 그래. 여기서 양계농사 지어봤자 이자주고 나면 아무 것도 없지 않냐고. 차라리 서울 가서 막노동을 해먹읍시다, 그래. 그때는 한번 시집오면 다시 못 가는 거여. 지금은 가 봐서 아니면 너 같은 놈하고 안 산다 그러고 가면 되지만 당시에는 그런 건 생각도 못했지. 집사람이 하도 서울로 가자 그래서 하는 수없이 서울로 올라갔지. 한 6개월 정도 놀다가 그때건축공사장 이런 데를 쫓아다녔어. 벽돌 짊어지고 올라 다녔지. 그런데 시골서 농사짓는 것하고벽돌 짊어지는 것하고는 완전히 다른 거여. 농사지을 때는 일을 하다가 쉬기도 하고 떠들기도 하고 그러는데 이건 쉬면 바로 쫓겨나죠. 그때는 일거리가 없어가지고 너 내일부터 그만 나와, 그러면 끝이여. 그런데 내가 2개월 일하고 오야지, 책임자가 됐어. 왜 그러냐면“이거 아니면 죽는다”는 생각으로 했으니까. 그때 내가 벌써 딸이 두명에다가 어머니에다가 고모에다가 집사람에다가 동생들하고 일곱 식구를 먹여 살려야 했어. 동생은 내가 월남 가서 벌어온 돈 다 써버렸다고 맨날 입이 요만큼 나와 있어. 협조도 안 해주고 맨날 불퉁거려. 그래서 내가 이거 아니면 죽는다는생각으로 하니까 다른 사람이 벽돌 스무 장 짊어질 때 나는 서른 장 짊어져요. 다른 사람 열 번 댕기면 나는 열 다섯 번 댕기고. 그렁게 주인이 벽돌짊어진 지 딱 두 달 만에 책임자를 시켜주더라고.그러다가 어느 꼼꼼한 중앙감사원의 과장쯤 되는 양반집 담장 공사를 맡게 됐어. 건물을 짓게됐는데 어찌나 꼼꼼한지 내가 손해를 봤어. 그때는 돈을 뭉텡이로 받는데 여기저기 보강공사를해주다 보면 돈이 적자가 나는 거여. 그때 한 20만원 적자를 봤는데 그때 돈 20만원이면 엄청난돈이여. 별 수 없이 우리 집사람한테 사정을 해서 우리 집사람이 세멘 개주고 나는 벽돌 쌓고 그랬지. 그 양반이 오명근 씨라고 아주 경우 바르고좋은 분인데 직업은 못 속여. 어찌나 꼼꼼한지, 내가 그 양반한테 취직을좀 시켜달라고 했어. 근데 그 양반이 돌일에 아주 밝어. 일본에서 오다를맡아다가 물건을 만들어서 팔고 그랬는데 그 양반이 거래하는 업체에다나를 취직을 시켜줬어. 첫 달 월급을 3천원 주는 거여 그게 왕십리에 있는 석재업체인데 사장이 나랑 동갑이여. 근데 그 사람이 불교미전에서 일등을 해가지고 주가가 하늘이었어. 그니까 나한테“나하고 동갑인디 여기에서 뭘 하겠냐”고 그래. 이런 일은 힘이 들어서못 하신다고, 아예 일을 못하게 하는 거야. 그때가 스물아홉 살인가 그랬는데 내가 그랬어. 해보다가 정 안 되면 그만 둘 테니까 장갑 값이나 주라고. 그러고 대들어서 일을 했는데, 나는 무슨 일을 하던 죽기 살기로하니까 다른 사람보다 낫어. 돌일이라는 것은 아주 단순노동이에요. 그런데 첫 달 월급을 받았는데 3천원을 주는 거야. 내가 일곱 식구를 먹여살려야 되는데 겨우 3천원 가지고 어떻게 살어? 그래서 내가 왜 나는 3천원만 주느냐, 다른 사람들보다 적게 일한 것도 아닌데…. 그랬더니 동갑내기 사장님이 하시는 말씀이“아 장갑 값만 달라고 했잖아요?”그래.그러니 뭐 어떡허겄어? 다시 그 오명근 씨를 찾아갔어. 어쨌든 취직을시켜줬으니까 고맙다고 말을 해야 하지 않겄어? 그랬더니 그 사람이“야 이 사람아,사람이 그럼 못 쓰네.”그려. 무슨 말인가 했더니 취직이라고 시켜줬으면 쏘주라도 한 병 들고 찾아와야지 어떻게맨입으로 왔냐 이거여. 나보고 경우 없는 사람이라고 그려. 그 소리를 들으니까 눈물이 막 쏟아져. 주체를 못할 정도로 눈물이 쏟아지는 거야.막노동할 때는 하루에 800원씩 받으니까 먹고살고 오야지할 때는 하루에 1,500원씩 따져 주니까 먹고 살고 그랬는데 돈 3천 원을 가지고 한달을 어떻게 살어? 일곱 식구 다 굶어죽게 생겼는데. 그래서 내가 여차저차 사정을 말했지. 장갑값만 달라고 했더니 진짜로 장갑 값만 줬다고. 그랬더니“나쁜 놈 같으니!”하고 그쪽하고 거래를끊어버리고 나를 데리고 3만원씩 주더라고. 그양반 밑에서 한 3년 있었는데 그 양반이 중간에안 좋은 일이 있어서 그만 두고 꼴아 박았어요.그래서 집에서 쉬고 있는 판인데 익산 황등에서 연락이 온 거여. 일본말도 좀 할 줄 알고 돌일도 할 줄 아는 사람을 찾더라고. 그래서 황등으로오게 된 거여.여길 와 보니까 일본 사람들이 일을 맡기는데 말을 못 알아들으니 일을 맡을 수가 없는 거야. 그래서 내가 와서 그걸 했어요. 내가 익산에 내려온지 한 40년 됐어요. 서른하나에 내려와서 지금 내가 온 나이로 육십 여덟이니까. 그러니까 돌 경력으로 치자면 엄청난 거지. 한 53년 정도 됐죠. 서울과의 기술 차이가 30년 나요 여기 내려오니까 서울하고 기술 차이가 한 30년 나요. 어떤 면에서는 10년에서 15년 정도 차이가 나고. 그래서 내가 사람들에게 이런저런 기술을 가르치고 그랬어요. 나는 나 혼자 먹고 살겠다고 한 적 없어요. 일단 돌일을 살려놔야 사람들이 이쪽으로 오지. 지금도 그 마음은 변함이 없어요. 나 혼자 뭐 이름나고 돈 벌고 부자 되는 것은원하지 않아요. 그렇게 되지도 않고요. 손님이 열명이 이쪽으로 오면 열 사람 중 한 사람이 내 손님 되는 거지, 열 사람 다 내 손님 되겠어요? 열사람이 다 내 손님이라고 해도 내가 그 일을 다해내지도 못해요. 그러니까 나는 여기 (황등) 입구에 있으면서 손님들이 오면 절대로 단가를 안낮춰요. 다른 집 찾아가 보라고 하지.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박정희 대통령 당시 삽교호 준공탑을 내가 만들었는데, 나도 하청을 받아서 한 거라 내 이름이 나오지는 않죠. 더블유(w) 모양인데 높이가 한 3미터 정도 됐는데 당시에는 대작이었어요. 까만돌(오석)로 만들었는데 까만돌을 잘 다뤄보지 않아서 상당히 어려웠어요. 그런데‘이제는 말할 수 있다’에 버금가는 얘긴데, 작품을 다 만들어놓고 2, 3일 후면 준공식인데 탑을 싣고 갈려고 새벽같이 일어났는데 윗부분 목 세 개가 나란히 일직선으로 면도칼로 끊은 것 같이 끊어져서 발밑에가 서 있어요. 그때는 여차직하면 빨갱이로 몰려 죽을 때예요. 대통령이 나와서 테이프 끊는 준공식인데 준공탑이 목이 끊어졌다고 허면 나도 모가지 나가는 거요. 내 모가지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여. 아, 정말 나라에 큰일이 생길라나보다, 그런 생각을 했지. 그렇게 희한한 일을 난생처음이여. 지금도 불가사의해. 그날 테이프 끊고 박정희 대통령이 돌아가셨잖어. 그 날 밤에 돌아가신 거여. 삽교호 준공식 마치고 올라가서.준공탑을 어떻게 했나면 일직선으로 나란히 끊어졌기 때문에 아래위로구멍을 뚫어서 쇠막대기를 넣고 접착을 해버렸지. 원래 돌이 까마니까표시가 안 나요. 그래서 무사히 넘어간 거여. 하여튼 그런 일이 다 있었어. 때려서 깨뜨린 것은 금방 알아봐요. 그건 눈으로 보면 금방 알아요.오석은 때리면 하얘지기 때문에 글씨를 파서 비석을 만드는 돌이잖아요? 그래서 금방 아는데, 그건 그런 것도 없어. 어떻게 그렇게 아무 데도충격 받은 데가 없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나란히 모가지가 끊어졌는지지금도 불가사의해요. 무서운 시절이었어요 그래서 나는 지금도 우리 돌쟁이들이 뭘 하든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그렇게 생각해요. 준공탑만 해도 나라에 큰일이 있다는 것을 알려준 것아닙니까? 나는 그렇게 생각해요. 그래도 그때 당시에는 그런 말을 하지못했지. 그 말을 했다가는 죽으니까. 한번은 영산강 근처의 준공탑을 내가 만들었는데 제막식을 어떻게 하는지 너무나 궁금한 거야. 그런데 나한테는 초청장이 안 왔어. 그런데 너무 걱정되고 궁금해서 방파제 입구에 갔더니 어떤 젊은 놈이 왔다갔다 하면서 어디 가냐고 물어봐. 그래서내가 준공식 탑을 맨든 사람인데 제막식이 잘 되나 궁금해서 가보고 싶다고 했더니 거두절미하고“돌아가!”그러는 거야. 젊은 놈이 그러니까나는 별 염두에 두지도 않고 몇 발짝 걸어갔더니“이 XX놈이, 뒤질래?”그러면서 권총을 딱 꺼내는 거야. 군대를 갔다 와서 나는 그 총이 어떤총인지 알잖아? 총구가 이만하게 보이는 거야. 당시는 그렇게 무서운 시절이었어요. 전두환 때까지는 그렇게 무서웠어. 그 자리에 오줌을 지릴정도였으니까. 놀래가지고 한 4킬로를 어떻게 뛰어왔는지도 모르고 뛰어왔어. 한 달 반 강의하니 밑천이 드러나 버려 어쨌거나 그렇게 해서 여기에 살게 됐는데, 돌에 대해서 알고 그러니까 익산시에서 행사를 하면 대표로 나가서 하고 조형물도 만들고 그랬지. 남산에 묻어놓은 타임캡슐 안에도 돌쟁이로는 제가 유일하게 들어갔어요. 200년 후에 열어본다면서? 그런데 아직까지 무형문화재를 못 받아서 좀 서운하기는 하지만 조만간에 될 거라고 생각해요. 제가 돌일을늦게 시작해서 망치질이 시원치가 않아요. 열다섯 살 때부터 계속 망치질을 했어야 하는데 늦게 시작하다 보니까 신통치가 않은 거야. 망치질하는 대신 연구를 하고 이론을 더 공부했지. 그러니까 명지대학 같은 기독교대학에 가서 객원교수 노릇도 하고 그랬지. 그것도 해보니까 쉬운게 아니더라고. 처음에 나는 교수들은 입으로만 먹고 사는 줄 알았어요.그런데 해보니까 그것이 아니더라고. 막상 강의를 맡아서 해보니까 내가알고 있는 상식으로는 한 달 반 정도 떠드니까 밑천이 다 드러나 버리는거야. 그 뒤로는 똑같은 말만 해야 돼. 안 되더라니까. 그런데 실기와 이론을 같이 하면 1년도 할 수 있어. 실기를 빼고 완전히 이론만 하니까 한시간에 탑을 한 100개쯤 만들어 버려. 익산 돌문화가 제대로 대접 받아야지요 그러니까 석공들이 장인이라기보다는 쟁이지. 다른 사람 일을 대신 해주는 것뿐이여. 그런 인식이 있으니까 예술가하고는 달라요. 미륵사지석탑 해체 할 때도 우리 석공들이 참여를 했어야 되는데 우리 석공들은 다배제시켜버리고 자기들끼리 해버렸잖아. 홍 선생님은 석공이 아니고 드잡이꾼이에요. 드잡이는 목도꾼이요. 돌일할 때 옮겨주는 심부름 역할을하는 사람들. 석공하고는 다르지. 동탑을 보면20년쯤 됐는데 벌써 크랙이 서른 몇 군데 생겼대요. 석공들 빼고 하는 것은 좋은데 그럴려면 더잘해야 되는데 과연 그렇게 될까 걱정이 되는 것이지. 말은 명장이라고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쟁이 취급을 하는 거지. 실제로 돌쟁이들이 연구를 안 하고 공부를 안 한 측면도 있어요. 저는 그래서 하루도 안 빼고 일기를 쓰고 그림을 그리고내가 만든 작품들을 다 기록해 놔요. 세상에서 제일 큰 병이 무식병이에요. 무식병에는 약도 없어요. 내가 왜 그러냐면 돌문화축제를 초창기부터7, 8년 끌어왔는데 내부에 문제가 생겨서 모든걸 그만 두고 안 나오겠다고 선언했어요. 진짜 3년 동안 문 밖에도 안 나가고 가만있었어요. 그전에는 방송국에서 와서 취재도 오고 그러더니정말 아무도 안 오더라고요. 돌문화축제도 많이위축이 되고 그러니까 다시 나보고 위원장을 하라고 하는데 3, 4년 동안 가만히 집에 있다가 다시 나서기가 좀 그래서 지켜보고 있는 중이에요.어쨌든 익산 돌문화가 발전되길 바라는 마음밖에없어요.우리 둘째 사위가 내 뒤를 이어서 돌일을 하겠다고 하니까 기특하지요. 내가 꼬신 것도 아닌데고등학교 선생 하다가 자기가 해보겠다고 하니까내가 가르치고 있어요. 고생 많이 해요. 내가 성질은 괄괄하지 야단칠 때는 인정사정없어요.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티미하게 배우고 행동하면나중에 도움이 안 돼요. 지금쯤 후회를 할지도 모르지만 어떡허겄어요. 잘 해요. 잘 배우고. 그림도 그리고 연구도 하고. 나는 경험상에 비춰서 뭐가 잘못 됐다 지적해 주고…. 한 5년 밥을 같이먹으니까 내가 기침만 해도 무슨 소린지 알아들어요. 내 소망은 익산 돌문화가 제대로 대접받고 발전하는 것, 그것밖에 없어요, 잘 헤쳐 나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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