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8 | [특집]
문화가 생존 위한 필수영역이 된 시대
문윤걸 문화저널 편집위원(2003-09-05 11:34:10)
문화생활에 대한 시민의 관심이 뜨겁다. 이제 사람들은 '과연 먹을 수 있을까', '입을 수 있을까'를 염려하기 보다는 '무엇을 먹을까' '어떤 것을 입을까'를 고민하고 있다. 이른바 절대 빈곤의 시대에서 상대 빈곤의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인데 이로써 우리는 이제 무엇이 보다 인간다운 삶인가를 보다 진지하게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문화가 반드시 경제적 토대 위에 세워지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사회의 경제 성장은 시민의 문화생활에 대한 관심을 증대시키고, 이 관심을 충족시켜줄 다양한 조건들을 갖추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와 함께 개개인의 정체성이 무엇을 얼마나 생산할 수 있는가 하는 물질적인 생산의 측면에서 확인되기 보다는 무엇을 어떻게 소비할 수 있는가 하는 소비할 수 있는 능력의 측면에서 확인되면서 이른바 문화적인 생활은 우리 모두의 중요한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지금 우리 사회의 두드러진 변화 중 하나는 인간의 생활양식이 노동 및 생산 중심에서 문화생활, 여가 및 소비 중심의 생활양식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사람들은 여가 시간뿐만 아니라 일상생활, 특히 노동시간에 있어서도 '즐김', '소비', '문화'를 결부시켜 이해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문화나 여가, 소비에 대한 생각은 물론 무엇이 즐거운 것이며 어떻게 즐길 것인가에 대한 생각도 크게 변하고 있다.
그저 여가를 남는 시간 또는 게으름을 부릴 수 있는 시간 정도로 이해하는 차원에서 이제 여가를 문화적인 생활로 적극 활용하려는 태도로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위해 대학에서는 어떻게 놀아야 '잘' 놀 수 있는 것인지를 가르쳐주는 과목들이 교양과목으로 설강되고 있고, 멋진 여가란 어떤 것인지를 상품으로 제공하는 상품화된 여가가 제공되기 시작하였으며 여가시간이라도 헛되이 보내서는 안된다는 '오락도덕'(충분히 즐기지 못하는 것은 창피한 것이며 죄악이다)마저 생겨났다. 따라서 이제는 '즐기기 위해서 돈을 번다'라는 말이 하나도 이상하게 들리지 않는 시점에 와있다. 이처럼 여가나 문화적 소비는 그동안 의식주와 같이 인간의 생존을 위한 필수 영역이 아닌 것으로 생각되어 왔지만 지금은 여가나 문화적 소비도 인간의 생존을 위한 필수 영역으로 간주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여가시간의 활용이나 문화적인 소비에 대한 욕구가 강하게 일고 있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다양한 문화활동이 나타나고 있으며, 이것이 때로는 다양한 문화적 관심을 공통된 관심으로 단일화하는 상품화의 길을, 때로는 지역 공동체내의 다양한 자발적인 문화활동 동아리 활동으로 본격화되고 있다.
호기심을 넘어 적극적 마니아로
문화활동에 대한 시민들의 욕구는 실로 대단하다. 이는 여가나 문화의 상품화 속도가 다른 어떤 산업보다도 빠른 성장속도를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도 확인할 수 있으며 인터넷 상에서 폭넓게 분화되고 있는 다양한 문화활동 동아리들의 성장속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아울러 지역의 자치단체나 문화단체에서 펼치고 있는 다양한 문화 동아리 활동에도 시민들의 참여가 넘쳐나고 있다는 점에서 확인된다.
시민들의 문화활동에 대한 참여는 단순히 양적 팽창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들의 문화활동에 대한 욕구와 실천활동은 질적인 측면에서도 크게 달라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시민들의 문화활동 참여수준이 과거에는 단순 관람객이나 호기심 수준에서의 소극적 참여 수준이었다면 이제는 관람객을 넘어 체험자로서, 호기심을 넘어 마니아 수준의 적극적인 참여자로 참여의 수준이 높아졌으며, 활동의 영역에 있어서도 과거에는 한 두가지의 문화적 영역(예를 들면 기행이나 노래교실 등)에 집중되던 차원에서 이제는 관심 영역이 보다 세밀하게 분화되어 다양한 부문으로의 참여로 나타나고 있다.
또 시민들이 참여하는 프로그램들도 과거에는 주로 주부들을 대상으로 하는 교양문화교실, 주부교실, 여성문화반 등으로 한정된 참여자들을 타깃으로 하는 프로그램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지금은 남녀노소, 세대를 구분하지 않는 문화활동 프로그램이나 동아리들이 대거 등장하고 있다. 이러한 동아리의 등장에 크게 기여한 것은 인터넷의 발달을 통해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정보사회화의 특성이다. 사이버 상에서 결성된 인터넷 동우회는 세대간의 차별이 없으며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아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자유롭게 참여하며 비록 비대면적인 관계이지만 자유로운 의사소통을 통해 관심을 공유하고 정보를 공유함으로써 보다 폭넓은 네트워크를 형성할 수 있다는 점에서 다양한 문화 동아리의 등장을 가능하게 하고 있다.
또 달라진 점은 과거에는 주로 지역의 자치단체나 문화단체들이 무상으로 제공하는 프로그램에 참여자가 집중되었던 반면, 이제는 만만치 않은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프로그램에도 참여자들이 몰리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문화생활에 대한 시민들의 욕구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를 확실하게 보여주는 변화이다. 시민들은 더 이상 문화 생활에 소요되는 비용을 아까워하거나 걱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들의 욕구나 관심을 충족시켜 줄 문화 프로그램들의 부족을 안타까워하고 있는 것이다.
자치단체, 변화하는 시민 문화욕구에 부응
이러한 변화에 가장 발빠르게 대응하고 있는 것은 확실히 문화산업자본이다. 문화산업자본은 이미 문화의 상품화 전략을 통해 다양한 문화적 경험들을 여가 상품, 문화상품이라는 이름으로 개발하여 문화의 경제적 소비를 통해 자기실현을 맛보도록 길들이고 있다. 문화산업자본은 여가나 문화적 소비에 있어서 최대의 즐거움은 돈과 시간의 투자를 통해서만 만들어지는 것으로 이해하도록 강요하며 각종 놀이동산, 콘도, 관광상품 등을 개발하여 시민들의 문화적 욕구를 화폐와 교환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1990년대부터 큰 폭으로 늘고 있는 문화생활 관련 소비지출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1980년대 말 88올림픽 이후 자가용 보급이 대중화되면서 국내여행이 보편화되었고, 외식사업이 크게 증가하였으며, 1989년 해외여행 자유화 조치 이후 해외여행이 대중화되면서 여가문화의 상품화 현상이 더욱 가속화되었고 그에 따른 각종 문화관련 소비지출 또한 크게 증가하였다.
이는 시민들의 일상생활에 있어서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특히 우리 사회의 중산층의 경우 적극적인 여가의 향유나 문화생활에 대한 소비지출이 같은 중산층으로서의 계층적 소속감을 더욱 강화하고 내재해 있는 계급 상승에 대한 욕망을 만족시켜 주는 효과를 가져다 줌으로써 문화활동이 때로는 과시적인, 때로는 과잉 표현으로 변질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러한 부정적인 결과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의 문화적 욕구의 성장은 사회 전반에 문화에 관한 관심을 크게 성장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지방자치제 실시 이후 각 지역은 시민들의 문화활동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다양한 문화정책들을 쏟아내고 있으며, 시민들의 욕구를 직접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문화시설과 문화 프로그램들을 운영하고 있다. 지역 자치단체에 의해 운영되고 있는 문화시설이나 문화프로그램들이 아직은 그 내용에 있어 관습을 답습한 구태의연한 것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지만 자치단체가 시민의 문화적 욕구에 적극적으로 반응하고 있다는 사실은 높이 살만 하다.
특히 각 자치단체에서 추진하고 문화시설 중 일부를 민간 전문 문화단체에게 운영을 맡김으로써 오랜 시간 동안 현장에서 활동해 온 민간 전문가들의 현장경험을 그대로 살려 참신하고 실험적인 프로그램들을 운영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해 주고 있으며, 변화하는 시민의 문화적 욕구에 적절하게 대처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할 수 있다는 점 등은 더욱 반가운 일이다.
현재 전주의 다양한 민간 위탁 문화시설들이 주민의 일상생활 속에서 문화사회로의 발전 가능성을 모색하고 실험하며 이를 실천하기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개발해 시민들과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은 문화의 상품화 현상을, 또 문화의 소비나 실천에 있어서 나타나는 계층간 차별화 현상의 심화를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모으게 한다.
문화 욕구, 계층간의 차이 표시인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문화는 이제 인간이 어떻게 생존할 수 있으며, 어떤 삶을 살 수 있는가와 관련되는 중요한 문제 중 하나로 이해되고 있다. 문화, 그리고 문화생활에 대한 관심이 뜨거운 지금, 우리가 어떻게 자아 실현을 위한 문화적 실천을 할 수 있을 것인가는 아직도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많은 사람들이 과거에 비해 보다 적극적인 문화활동 및 실천에 나서고 있으며, 그것이 과거 사회에서보다는 훨씬 더 바람직한 삶을 구성하고 있는 인간행위로 이해될 수도 있지만 여전히 우리에게 의문은 남는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사회학자들의 경고 때문이다.
현대사회에서 확실히 문화 또는 문화적 생활(취향)은 개인의 사회적 정체성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사회학자들은 현대사회에서 문화적 소비행위는 계층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그들간의 유대감을 강화함으로써 계층간의 차이표시 기호로서 기능한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아울러 문화적인 생활양식이나 소비행위가 단순한 선호도나 취향의 차이가 아니고 오랜 시간동안 주입되고 동화되어 각 개인에게 내면화되고 체화된 자본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 자본은 자녀에게로 세습되며 이것이 우리 사회에서 계층을 유지하는 또 하나의 전략이 되고 있다.
지금 우리사회에서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고 있는 시민들의 문화생활에 대한 욕구와 구체적인 실천행위들이 위에서 설명한 사회학자들의 견해처럼 계층간의 차이를 드러내기 위한 차별의 한 과정인지, 그렇지 않으면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자아 정체성과 자기실현을 위한 행위이며 우리의 건강한 일상문화, 또는 문화사회로 나아가는 과정으로서 해석될 수 있는 것인지에 관해서는 보다 세밀한 관찰이 필요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