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4 |
[내 인생의 멘토] 박배엽, 그 이름의 진정성
관리자(2010-04-01 18:57:13)
박배엽, 그 이름의 진정성
그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내 스승이었다
- 이병천 소설가
나와 내 친구들의 명실상부한 공동의 스승이자 친구였던 박배엽이 세상을 떠난 지 5년 세월이 흘렀다. 올해도 우리는 부안의지장암, 그의 위패가 모셔진 정든 사찰에 모여 추모제를 지냈다. 양지바른 산허리에는 노란 복수초가 피어나고 있었고, 바다에서는 주꾸미가 올라오기 시작한다고 했다.
불러도불러도 그리운 그 이름
나는 그가 몹시도 그리웠다. 세상에 이름 붙여진것들치고 그의 음성이 실리지 않은 것, 그의 애정이스미지 않은 것, 그와의 추억이 관련되지 않은 것이라고는 없었다. 문득 이 하루, 사랑을 잃어버린 사내처럼, 세상의 만물이 눈에 아프게 들어와 박히곤했다. 봄이 다가오고 있는 때라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리움은 더욱 속절없이 증폭됐는지도 모른다.얼마 전 입적한 법정스님에 대한 생전의 모습을담은 TV 다큐를 보면서 나는 다시 박배엽을 떠올렸다. 큰 키에 길고 갸름한 얼굴, 형형한 눈빛, 그리고그 눈빛에 실어 대화 상대에게 전하는 진지한 언어며 말투, 꼿꼿한 허리, 힘들이지 않고 휘적휘적 발을 옮기는 걸음새…. 두 사람의 생전 모습이 너무도흡사해서 깜짝 놀랄 정도였다.우리가 자잘한 세상 공부를 하기 위해 사찰을 뻔질나게 드나들곤 했던 젊은 어느 날, 그가 만약 저스님처럼 아예 입산을 했더라면 어땠을까?나는 오랫동안 그런저런 상념에 사로잡혔다. 스님은 폐암을 앓으셨다고 했고 그도 폐암을 끝내 이기지 못하고 갔다. 부질없는 상상이지만 만약 그가입산을 했더라면 담배를 끊었을 테고, 적어도 50세이전에 가는 일 없이 스님만큼은 살았을 것이다. 아직도 어느 산자락 한 귀퉁이에 살고 있을 것이라는얘기다. 살아서 우리에게 변함없는 전범이 되고, 살아서 우리를 채워주고 있을 것이라는 얘기다. 이를테면, 이제 와서야 다시 새겨보는 스님의 질타처럼,우리 인간의 삶은 풍족한 삶 따위가 결코 아니라 충만한 삶이 돼야만 합니다…. 아, 문학적 수사가 참으로 아름다웠던 박배엽이라면 그 진리를 우리에게어떻게 전했을까?
나눔과 베풂의 가르침 되새겨
불경(佛經)에 자주 보이는 표현처럼 여시아문(如是我聞), TV에서 스님이 말씀하신 바를, 나는 이렇게 들었다. 물건은 살아있을 때 주어야 한다. 사람이 죽으면 그가 지녔던 물건도 함께 죽는 법이다.그래서 아무리 고승대덕이라고 하더라도 입적한 다음에 그가 가지고 있던 물건을 받아쓰려면 찜찜해지는 것이다. 그러니 살아 있을 때 줘버려라…. 나는 그런 뜻의 말을 이미 오래 전에 그에게서 들었다. 아직 실천하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내가 알기로 그는 돈이, 물건이 아까워 손을 오그리는 인간이 아니었다. 그의 윤리와 도덕, 그가 세상에 보내는 애정의 진정성은 거기에 토대를 세우고 있었기 때문에 언제나 견고했으며 또한 변함이없었다. 물론 그에게도 집착하던 것들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그게 없는 사람에게 어찌 인간적인 매력이 있을까? 낡은 지포 라이터 하나, 필기감이 좋은만년필 하나, 질 좋은 음반, 책, 바둑알이며 바둑판과 같은 것들….이를테면 그는 책 내기 바둑을 두기 위해 등산길에도 언제나 바둑판을 챙기곤 했다. 내가, 혹은 친구들이 그에게 잃어야 했던 수많은 책은 우리에게아직도 전설처럼 회자되고 있다. 당연히 등산은 낮의 일이 아니라 밤에 이루어지곤했다. 우리가 잠든 사이…. 그가 생전에 달빛 등산을 즐긴 연유가 그것이었다.그렇게 해서 우리에게 딴 책들을 그는 단한 권도 예외 없이 모두 훤하게 기억하곤 했다. 이 책은 이병천이 아홉 점을 깔고 바둑에 져서 사준 책, 이 책은 박두규가넉 점을 깔고 둬서 바친 책 등등…. 그 고소함이야 아주 없지는 않았겠지만 그건, 그가 소유하는 것들을 아낌없이 베풀기잘하던 그의 성품을 다른 면에서 증거하는 것에 다름이 아니기도 하다.그는 그렇게 남의 것들을 받았다. 술을 따르고, 술을 받는자세가 그랬다. 아랫사람에게 술을 따를 때도 그랬지만 그는 심지어 내 아들에게 술을 받을 때에도 두 손으로 애써 받았다. 내 몸에 피와 살이 될 음식을 받는데 어찌 공손하지않겠는가 하는 게 그의 신념이었다. 예의 없기로는 하늘 아래 두 번째 가라면 섭섭할 내가, 지금도 남들과 술잔을 주고받을 때면 유난히 공손해지는 연유가 그의 가르침 때문임은두말할 나위도 없다.어찌 그게 돈이나 물건에만 국한했을 것인가? 그는 그 자신의 노동력도 남에게 아끼지 않고 베풀었다. 어느 날인가는 내가 공부하던 절에 찾아와 혼자 나무를 하고, 그것들을일정한 길이로 자른 다음 쉬지 않고 도끼로 팼다. 그가 쌓아놓은 장작들은 절 방 앞마당이며 마루 밑에도 가득 쌓여 볼때마다 엉덩이가 따뜻해지며 보기에도 참 좋았었다. 그가나에게 베푼 게 어디 그뿐이랴!어느 하루는 우리 집에 찾아와 자기 손으로 책장을 짜준다고 나섰다. 한때는 목수가 꿈이었던 그였다. 그는 아파트빈터에서 줄자로 꼼꼼하게 치수를 재고 톱질하고 대패질하고 판을 짜 맞추기를거듭했다. 그리고는 완성된 책장들을 등에 지고 계단을 오르는데,그의 호흡이 거칠었다.무슨 일이냐, 너답지않게…? 나는 놀라 물었었다. 요즘 호흡이가빠질 때가 더러 있어. 괜찮아지겠지 뭐.
나의 스승, 나의 친구
회복할 수 없을 만큼 온몸 전체로 암세포가 파고들었다는진단 결과를 얻어들은 날, 나는 한 시간 이상을 홀로 통곡했다. 그에게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그가 내게, 내 가족들에게, 내 친구들에게 베푼 애정 총량의 1퍼센트만이라도 내가되돌려주기만 했더라도 그를 이 지경에 이르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후회가 앞섰던 것이다.그는 그 뒤로도 3년을 꼬박 투병했다. ‘부작무병신음(不作無病呻吟)’, 일부러 병을 만들어 신음하지는 않겠다는,그렇듯 엄살 부리지 않고 죽음을 무릅쓰며 문학을 하겠다는중국 호적(胡適)의 말을 좋아했던 그였기에 그는 고통을 호소하지도 않았고, 비명을 지르지도 않았다. 그 사이 그의 병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깊어져갔다. 그리고 그의 착한 아내와 나와 내 아들, 그리고 다른 한 친구가 그를 일반 병실로 옮긴 날 새벽에 그는 갔다.그가 이 봄밤에 사무치게 그리워진다. 그가 가고난 뒤, 내남은 생이란 그저 유예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그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내 스승이었다.
이병천 소설가이자 시인이다. 198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우리의 숲에 놓인 몇 개의 덫에 대한 확인」이 당선돼 문단에 등단했다. 저서로는『모래내 모래톱』,『 마지막 조선검은명기』,『 신시의꿈』외다수의작품을발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