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4 |
[서평] 『난 빨강』
관리자(2010-04-01 18:59:52)
『난 빨강』
박제가 되어버린 시, 아이들 곁으로 돌아가다
- 김주환 서울도봉고등학교 국어교사
기성 시인이 쓴 청소년 시라고 해서 난 사실 별로 크게 기대를 하지 않았다. 어른들이 청소년 흉내내는 것이 얼마나 흥미로울까 싶어서였다. 그러나 작품집을 받아서 읽어보면서 나는 이 시집을 청소년들이 쓴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을 일으켰다.여기에는 공부기계로 전락한 현실에 대한 답답함에서부터 성적인 고민이나 미래에 대한 꿈과 불안 등, 청소년들이 일상생활에서 느끼는 다양한목소리들이 담겨 있었다. 내용뿐만이 아니라 그 형식도 매우 다양했기 때문에 한 사람이 썼다고 믿기 어려웠다.
실제로 내 딸아이가 고1이기 때문에 가장 적당한 독자라고 생각하고 읽혀보았다. 그리고 가장 공감이 가는 작품을 세 편 골라보라고 했다. 그랬더니 여섯 편이나 골라서 접어 놓았다. 「대체 왜그러세요」, 「아직은 연두」, 「사춘기인가?」, 「서울대」, 「몽정」,「꼭 그런다」등이 우리 딸아이가 가장 공감가는 작품으로 뽑은것이다. 대체로 청소년들이 많이 겪게 되는 일상적인 고민이나갈등을 잘 표현한 것들이다.
<꼭 그런다>
두 시간 공부하고
잠깐 허리 좀 피려고 침대에 누우면
엄마가 방문 열고 들어온다
-- 또 자냐?
영어 단어 외우고
수학 문제 낑낑 풀고 나서
잠깐 머리 식히려고 컴퓨터 켜면
엄마가 방문 열고 들어온다
-- 또 게임하냐?
일요일에 도서관 갔다 와서는
씻고 밥 챙겨 먹고 나서
감깐 쉬려고 텔레비전을 켜면
밖에 나갔던 엄마가 들어온다
-- 또 티브이 보냐?
- 『난 빨강』중에서
이 시가 공감이 가는 이유는 자신의 상황과 꼭 닮아 있기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면「몽정」은 왜 공감이 가느냐고 하니까 웃기고 재미있다는 답이다. 남학생들이 겪는 성적인 고민이 신기하기도 하고 나름 공감이 가는 것이리라.이처럼 이 시집에는 청소년들이 일상생활에서 겪게 되는다양한 상황이 묘사되어 있고 그들의 내면이 솔직하게 표현되어 있다. 그래서 청소년들이라면 자신이 직접 경험을 했든 그렇지 않든 간에 누구나 함께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공감할 수 있다는 것이 이 시집의 가장 큰 장점이다. 그렇다면 청소년 자신이 쓴 시와 기성 시인이 쓴 시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4B연필> - 장재경 (도봉고1)
실수해서 자꾸 떨어뜨린
4B연필
그 실수 덕에 깎아 쓸 때마다
쓰지도 못하고 심이 부러진다.
겉은 멀쩡한데…
나도 지금은 멀쩡해 보이지만
나중에 날 쓰려고 하면
자꾸 부러지지 않을까.
-『청소년을 위한 자유로운 글쓰기』중에서
이 시는 실제로 학생이 쓴 시이다. 시적 발상이나 목소리가 매우 솔직하고 청소년들의 일상적인 고민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그러나 박성우의 청소년 시들은 이학생의 시보다는 훨씬 더 잘 다듬어져 있으며 세련되어 있다. 그래서 때때로는 거칠고 투박한 아이들의 날 것 같은 맛이 덜한 것도 사실이다. 아이들의 시를 지도하면서 늘 읽어온 나같은 교사에게 세련된 전문가의 시가 낯선 것도 사실이다.그러나 청소년 시가 청소년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반영해야 할 필요는 없다. 이 시집에는 청소년 자신들이 쉽게 표현할 수 없었던 다양한 표현 방식뿐만 아니라 청소년 자신들이쉽게 표현할 수 없었던 은밀한 내용까지 보여주고 있다. 청소년들의 자기 표현 영역을 넓혀주었다는 것이 이 시집의 미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교과서에서 박제가 되어버린 시를 아이들의 삶 곁으로 가져다주었다는 점이야말로 첫 청소년 시집『난 빨강』의 큰 공적이 아닐까 생각한다.
김주환 서울대 국어교육과를 졸업했다. 전국국어교사모임회장, 국어과교육과정 심의위원 등을 지냈고 지금은 서울 도봉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저서로는『청소년을 위한자유로운글쓰기33』『, 우리말우리글』등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