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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4 |
임안자의‘내가 만난 한국영화’
관리자(2010-04-20 18:42:45)
임안자의‘내가 만난 한국영화’ 한국영화 해외진출, 그 길을 열다 - 임안자 영화평론가 1989년, 로카르노국제영화제의 가슴 뿌듯했던 경험이 서서히 일상생활 속에 묻혀가던 그 해 초겨울에 나는 또 다시 트리곤 필름(앞으로는 트리곤)의 프르노 야끼(앞으로는 부르노)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그는 11월 말경에 있을 낭트영화제에 일주일 참석할 수 있느냐, 여행비는 모두 트리곤에서 대준다는 등의 너무도 매력적인 계획을 나에게 제안했다. 페사로회고전을 위한 서울의 사전작업 나는 1991년 11월 초 한국으로 떠났다. 여행의 목적은 이탈리아 페사로국제영화제의 집행위원장 아드리아노 아프라와 함께 옛 영화진흥공사(영화진흥위원회 전신)에서 1992년에 페사로에서 열릴 한국영화회고전의 사전작업을 하기 위해서였고 체류기간은 5주였다.내가 아프라를 알게 된 건 1989년 낭트영화제에서였다. 그는로베르토 로셀리니 감독 작품의 전문가로 널리 알려진 영화학자로서 페사로영화제는 80년대에 이어받았다. 알다시피 로셀리니감독은 2차 대전 이후 비스콘티, 데시카, 더 산티스 등의 감독들과 함께 세계적으로 크나큰 영향을끼친 네오리얼리즘의 창시자이며 40대 후반에 나온 전쟁의 3부작 <열린도시 로마>, <파이사>, <독일의 원년>은 그의 유명한 대표작으로 꼽히고 있다.페사로영화제는 나에게 낯설지않았다. 1976년 스위스-이탈리아문화협회의 초청을 받고 남편과 함께 갔었는데, 그때 나는 첫 애의 임신 7개월이었으나 처음 가는 영화제인데다가 거기서 처음으로 아랍지역의 영화를 보게 돼 피곤한 줄도모르고 열심히 찾아봤던 기억이 남아있다.내 페사로영화제의 경험은 아프라와 쉽게 사귈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그래서 그런지 아프라는 나에게 그의 미래 기획에 대해 말거리를꺼냈다. 즉 1991년 페사로에서 한국영화 회고전이 크게 열린다는 것과그에다 북한영화도 같이 초청하려고 이미 북한과 연락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는데, 그건 유럽에서 처음으로 시도 되는 남·북 영화의 공동회고전을 뜻하는 거라서 나는 귀가 자연히 솔깃했고 기대가 컸다.그러나 그 뒤 일 년이 넘도록 그는 잠잠했고, 그 사이에 나는 뮌헨영화제서 만났던「영화예술」(90년대 중반에 폐간됨) 월간지의 이영일편집장으로부터 청탁을 받고는1990년 가을부터 상, 세바스챤, 토리노, 베를린, 로카르노 등의 크고작은 영화제를 돌아다니며 기사를 썼다. 그러면서 여기저기서 가뭄에 콩 나 듯 나타나는 한국 젊은 감독들의 영화를 볼 수 있었는데 워낙 드물게 보았는지라 좋고 나쁜 걸 따질 겨를도 없이 한국영화라는 것만으로도 반갑고 신이 났다. 그러면서도 한국영화를너무 몰라 갑갑했다. 솔직히 그때까지 내가 알고 있던 영화는 겨우 임권택 감독의 회고전 작품 정도뿐이어서 새 영화를 보면 볼수록 갈증이 났고 자각심만 커져갔다.그러던 어느 날 그 동안 까맣게 잊었던 아프라한테서 갑자기 전화가 왔다. 1992년의 한여름, 그는 마치 내 마음의 갈등을 알아차린 것처럼 대뜸“드디어 11월초 한국에 5주간 가게 됐는데 자기 조수로 같이 갈 수 있으면 좋겠다”면서 여행 동안의 대우문제에 대해 긴 설명을 덧붙였다.전화가 끝난 뒤 나는 생각했다. 아프라의 초대는 한국영화를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는 더없이 좋은 기회를 뜻했으며, 만일 그의곁에서 다섯 주간 수십 편의 영화를 본다면 그것으로 한국영화의입문은 충분하지 싶었다. 다만 한 달이 넘게 집을 비운 적이 없어마음에 걸렸지만 오히려 남편은 나를 설득시키기에 바빴다. 그는나더러“정말 전문적으로 일을 할 생각이면 한국영화에 대한 기본지식을 쌓아두는 게 중요하지 않느냐”면서 한국여행을 부추겼다. 영진의 상영실과 명동의 국수집 한국에 도착한 우리는 11월 초부터 12월 중순까지 영화진흥공사(다음부터는 영진)에서 날마다 아침 9시부터 오후 5~6시까지,하루 평균 3~4편, 때로는 5편의 영화를 월요일에서 토요일까지쉴새없이 봤다. 날씨가 아주 쌀쌀했는데도 난방장치가 돼있지 않아 상영실 안은 추웠고, 아프라는 눈앞에‘금연’푯말이 표시돼있어도 담배를 계속 피웠다. 그만 피우라고 하면 계면쩍게 웃을뿐, 그의 입에는 담배가 계속 물려있었다.그러나 가장 참기 힘들었던 것은 자막 없는 영화를 보는 일이었다. 우리가 5주 동안에 본 영화는 50여 편, 그 중 반절 이상은 자막이 없었다. 할 수 없이 나는 영화를 보는 자리에서 동시통역을해야 했고, 주인공들의 대사를 통역하는 것만으로는 한국에 처음온 아프라에게 충분치 않다고 생각해 즉흥적으로 배경설명을 덧붙이는 방법을 썼다. 예를 들어 고무신을 신던 시대는 언제고,녀를 꽂은 여인은 결혼한 여자, 사랑방과 안채를 따로 둔 전통한국가옥의 건축양식, 동네어귀에 세워진열녀문의 뜻, 시집간 여인의 제재된삶, 남아선호의 가족체제, 한국전쟁과 분단의 후유증, 무속 전통과 굿거리, 옛날의 뽕짝 유행가 등등. 나는 생각이 미치는 대로 설명을 덧붙여나갔다.담배연기가 자욱한 좁은 공간에서 그렇게 하루 종일 통역(영어)을하고 나면 저녁에는 목이 쉬어 거의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때 나는 영등포의 친척집에 머물면서 지하철을 타고 통근을 했었는데 일이 끝나면 파김치가 된 채찻길에 오르곤 했다. 물론 아프라도 고생이 많았다.그는 영진의 불충분 한 여건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하나라도 더 보려고애를 썼고, 시간을 아끼기 위해 가까운 거리의 명동에 내려가 매일 국수로 매일 점심을 때웠다. 스파게티보다 국수 맛이 훨씬 낫고 값도 싸다며 날마다 국수집을 바꿀 정도로그는 정말 국수요리를 좋아했다. 그리고 그게 우리가 즐길 수 있었던하루의 유일한 휴식 시간이었다. 아프라와 나를 울린 영화 아프라는 애초 80년대의 대표작20편 영화를 뽑으려고 했으나 한국영상자료원에서 고전을 본 뒤“예상외로 볼만한 작품이 많아”라며 30편으로 더 늘렸다. 그는 유현목의<오발탄>, 신상옥의 <사랑방의 손님과 어머니> 등 그때까지 외국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60년대의 영화를 보고는 감독들의개성이 넘치는 연출력에 놀라워했고, 특이 한국의 네오리얼리즘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유현목 감독의 <오발탄>과 리얼리즘의 수작인 이만희의 <삼포로 가는 길>을 아주 높이 평가했다. 그리고내전으로 한 동네에서 원수가 된 두 친구의 관계를 통하여 냉전의 비극을 보여준 임권택의 <짝코>을 보고는“이처럼 리얼리즘의 뛰어난 작품이 왜 낭트와 뮌헨의 회고전에서 빠졌는지 모르겠다”고 한탄을 하면서 뒤늦게 발견된 것을 무척 안타까워했다.아프라는 한국정부의 영화검열 문제에 대해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영상자료원의 일이 끝날 쯤 일정에 들어있지 않았던 지하영화를 보고 싶다고 하여 마침 불법영화에 대해 잘 알고 있던 이효인 영화평론가의 도움으로 장산곶매의 <파업전야>, <5월의 꿈>,<어머니> 등을 비밀리에 봤다. 불법 영화라고 해서 우리는 조마조마하면서 지하철을 타고 멀리까지 가서봤지만 기대에 못 미쳐실망스러웠다. 그럼에도 아프라는“지하영화의 역사가 아주 짧기때문에 큰 기대는 없었지만, 한국의 정치적 상황에서 그런 영화가 나왔다는 건 한국영화의 다양한 발전을 위해 중요하다”면서오길 잘했다고 했다.그 밖에도 한국 영화전문인들의 의견을 들어보기 위해 그는 안병섭 교수, 변인식 영화평론협회장과 젊은 세대의 이충직, 주진숙 교수 그리고 이효인, 전양준, 김지석 평론가 등 3세대에 걸친영화이론가들을 만나 한국영화에 대한 전반적인 의견을 들었고또 임권택, 이장호, 배창호, 정지영, 박광수, 장선우, 이명세 감독들을 따로따로 만나 인터뷰했다. 그리고 서대문구의 개발지역에서 촬영 중이던 정지영 감독의 <하얀 전쟁>의 촬영현장을 방문하여 안성기, 이경영 배우들의 연기를 지켜본 뒤 을지로의 한 영화관에서 상영 중인 장길수 감독의 <은마는 돌아오지 않는다>를일반좌석에서 통역 없이 보는 등 그는 떠나기 전날까지 한국영화와 관련된 여러 곳을 둘러봤다.50대 후반에 들어선 아프라는 평소 말수가 적고‘일벌레’에 가까운 외톨이 지식인이었다. 그런데 좀처럼 감정을 나타내 보이지않았던 그가 어느 날 영상자료원에서 이두용 감독의 <장남>을보며 눈물을 흘렸다. 그날도 자막 없이 영화를 보았는데 장남(신성일)이 어머니(황혜순)의 부음을받고 나서야 오래 전에 약속한 틀니를 손에 들고 허둥지둥 집에 돌아와어머니의 관 앞에서 오열하는 장면에서 나는 눈물이 쏟아져 통역을 멈추고 말았다. 그리고 아프라를 바라보니까 그도 옆에서 조용히 울고 있었다. 영화가 끝난 뒤에 아프라는나에게 처음으로 너무도 슬픈 가족사를 들려줬다. 오래 사귀던 일본여자친구와 헤어진 뒤 혼자 살고 있는 그는 어느 날 집을 나간 뒤 되돌아오지 않아 마음의 큰 상처를 받았고 스위스의 국경지대에서 사는 부모들과는 사이가 좋지 않아 서로 연락을 끊고 산지가 오래다. “한국영화를 많이 보면서 가족의 의미를 깊게 깨닫게 됐다”던 그는 귀국하고얼마 있다가 결혼을 했고 그 나이에아들도 하나 얻었다. 나 역시 영진의 5주간은 너무도 힘들었었지만그때의 경험은 두고두고 내 영화작업의 귀중한 바탕이 됐다. 페사로영화제에 나타난 한국영화들 페사로는 베니스 남쪽의 아드리아 해협을 끼고 있는 중세기풍의 조그만 도시다. 이곳에 영화제가 열린건 1965년, 이탈리아 영화평론협회장이었던 리노 미치케가 창설했으며 그때부터 줄곧 평론가들이 영화제의 집행위원장을 맡아왔다. 시작부터 비경쟁으로 치러지는 페사로영화제(Ente Mostra Internationale del Nuovo Cinema)는 해마다 원탁토론(Tavola Rotonda)으로 불리는 이곳 특유의 프로그램을 중심으로 움직여왔다. 이탈리아 평론계의 높은 수준을 상징하는 원탁토론의 특징은 해마다세계 영화전문인들이 이곳에서 모여 이틀 동안 그 해에 초청된나라의 영화에 대한 집중적인 토론대회를 갖고 이때 공개되는 토론의 내용은 한 권의 책으로 묶어 출간된다.1992년 28회를 맞는 페사로국제영화제(6월 10~18일)는 예상했던 대로 한국영화의 회고전에 초점을 두고 진행됐다. 실은 회고전 이전에도 이두용의 <피막>, 이장호의 <바보선언>, 이만희의 <삼포로 가는 길>이 80년대 초반 페사로영화제에 초청된 바있었으나 그 뒤 10여 년 공백기를 가지다가 아프라를 통해 다시연결고리를 맺게 된 것이다.아프라가 5주에 걸려 뽑은 30편의 회고전 프로그램은 영화선정의폭과 주제의 다양성에 있어 그때까지 유럽에서 가졌던 한국영화 회고전 가운데 가장 규모가 컸었던 것으로 한국영화의 해외 진출에 길잡이가 됐다. 그러나 처음에 기대를 많이 모았던 남북한 영화의 공동회고전 기획은 북한 쪽의 지지부진한 태도에 부딪혀 이뤄지지 못했고 그 때문에 현지 매체들의 실망이 아주 컸다는 것 같았다.페사로영화제에 초청된 한국영화계의 대표는 영진의 윤탁 사장을 비롯하여 이장호, 배창호, 박광수 감독 그리고 평론계의 소장파에 속하는 김지석, 전양준, 이효인, 이용관 등이었다. 그리고 원래 배우를 초청치 않는 전통에도 불구하고 아프라는 안성기 배우를 특별초대하였다. 회고전의 30편 가운데 8편에 출연한 그를 두고 아프라는“안성기는 자신의 원래 모습을 버리지 않으면서도 다양한역을 소화하는, 서구의 영화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실력의연기자”라며 안 배우의 폭넓은 연기력에 칭찬을 쏟았다.더불어 앞에서 말한 한국의 감독과 평론가들은 원탁토론에 발제자로 참가하여 90년 초 한국영화가 처해있던 문제점을 말했고, 발제의 내용에 대해서는 200장에 달하는 책자「Il CinemaSudcoreano」로 출간됐다. 지면상 토론 내용을 간추려 말하자면,감독들 쪽에서는 한국영화의 제한적인 시장성과 일본에 비해1/10 정도도 되지 않는 부족한 제작비, UIP로 총칭되는 미국의대형배급사들의 직배문제, 상업성만 따지는 극장주들의 횡포, 촬영장의 낡은 기자재, 정부의 검열문제, 8mm, 16mm 등의 소형영화의 현상과 상영이 불가능한 기술의 후진성 등을 지적했다.그리고 평론가들 쪽에서는 저널리즘과 평론에 대한 흐린 개념의문제, 상영되는 영화 수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평론가의 숫자, 자국영화를 보지 않은 관객의 무관심, 자국영화의 연구에 게으른영화교수들 등의 문제점을 밝혔다. 그럼에도 끝에 가서 양쪽 다“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90년에 들면서 실력 있는 젊은 감독들이많이 나타나 한국영화의 미래는 밝을 것”이라는 낙관론을 폈다.여기에 회고전의 30편 영화를 소개하자면 유현목<오발탄>, 신상옥<사랑방의 손님과 어머니>, 김기영<하녀>, 임권택<개벽, 족보, 짝코, 만다라, 아다다, 안개마을, 불의 딸, 길소뜸, 아제 아제바라아제>, 이두용<장남, 내시, 청송으로 가는 길>, 이장호<나그네는 길에서 쉬지 않는다, 바람불어 좋은 날>, 배창호<꼬방동네사람들, 기쁜 우리 젊은 날, 황진이>, 하명종<태>, 박광수<칠수와 만수, 그들도 우리처럼>, 정지영<남부군>, 장선우<우묵배미의 사랑>, 이명세<개그맨>, 항규덕<꼴지부터 일등까지 우리 반을 찾는다>, 박종원<구로아리랑>, 이원세<난장이가 쏘아 올린공>, 장산곶매<파업전야>이다. 큰 국제 잔칫상에 재 뿌리는 검열문제 원탁토론에 대해 이탈리아에서 가장 알려진 시네포름과 시네테카의 평론가들은“30편 영화의 대부분이 멜로에 속한 사회, 가족 위주의 드라마였고 과거의 회상장면으로의 전환(플래쉬백)의 남용이 많았다. 그러나 페사로에서 본 영화들을 통해 우리는 한국의 비극적인 근대사를 이해하게 됐고 몇몇 영화는과감한 주제의 선택과 뛰어난 연출력을 보여준 정상급의 뛰어난 작품들이었다. 젊은 감독들의 작품에 기대가 간다”고 했다. 한편, 일반 관객의 반응은“배용균 감독의「달마가동쪽으로 간 까닭은」말고는 한국영화를 처음으로 본다”며 대부분 반겨하는 모습이었다.그런데 생각지 못한 데서 갑자기문제가 터졌다. ‘불법영화’딱지를받은「파업전야」가 프로그램에 들어있다는 걸 알게 된 한국정부는 아프라에게 전화를 걸어 일방적으로「파업전야」의 상영금지령을 내린 것이다. 그러나 국제문제에 경험이 많은아프라는 흔들림 없이“영화의 프린트는 한국에서 몰래 빼온 게 아니고일본에서 자기가 직접 갖고 왔기 때문에 한국정부에서 이러쿵저러쿵할 권리가 없다”면서 국제영화제의자율권을 들고 나왔다.사실 국제영화제를 다니다 보면가끔씩 이런 문제가 나타나지만 그건 하늘에 침 뱉는 꼴이다. 한국정부도 상식에 맞는 외교적 절차가 있을 텐데 상영금지라는 최악의 방법을 선택하여 스스로 검열 국가임을선포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거기에다 한국영화를 대표해야 할 영진의 윤탁 사장은 정부에 말 한마디 못하고 눈치만 보고 있었다.그러나 그의 무책임한 행위는 한국의 정치적 구조와 무관하지 않았다. 원래 영화진흥공사는 1973년 유신체제의 선포와 함께 설립된 문화공보부의 산하단체로서 정부의 영화정책을 영화계에 전달하는 중간 기구였지만 영화계를 대표할 자율권이 없었다. 그런데다 영진의 사장 자리는 정부에서 관료나 군부 출신들에게 내줬기때문에 영화계와 소통이 잘 안 돼 마찰이 많았다.아무튼 정부쪽에서는 반나절이 지났는데도 타협을 하지 않자참다못해 배창호, 이장호 감독들이 중재자로 나서서 정부쪽에다자기들이 모든 걸 책임질 테니 영화제의 결정권에 따르자고 사정을 하여 파업전야는 예정대로 상영됐다. 그런데 막상 문젯거리의영화를 보고 나온 기자들은“그 정도 영화를 불법으로 취급 한다니 한국정부의 검열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알겠다”면서 신랄한 비평을 했다. 그런가 하면 일부 여성관객 쪽에서는 한국영화에 폭력장면이 필요 이상 많고 심지어 정사장면에서도 한국남자들은난폭하게 서둔다고 불만을 토했다. 그들의 불만은 듣기에 무척거북스러웠으나 그렇다고 이들의 비평이 아주 엉뚱하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이제 우울한 소리는 그만하고 아름다운 파티 장면으로 눈을 돌려보자. 페사로는 19세기의 이름난 오페라 작곡가 로시니의 고향이다. 영화제가 끝날 무렵 영진이 주최한 파티에자키노 로시니음대에서 성악을 전공하는 한국학생들이 많이 참석하였고 그들의 아름다운 목소리로 부르는 노래는 200여 명의 청중을 열광시켰다. 이들이 <아리랑>을 부르는 순간 한국대표들이 모두 감격했고 <오! 솔레미오>를 부를 때는 이탈리아 사람들이‘브라보’를연발하면서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그 자리에는 아프라와 그의부인 그리고 남편도 함께했는데 우리는 명동의 국수 이야기를 다시 추억하면서 파티장에 풍성하게 준비된 이탈리아의 맛좋은 술과 음식을 밤늦도록 즐겼다. 임안자 전북 진안 출생으로 스위스 프리부룩 대학 신문학과 영화사를 전공했다. 스위스 로크르노 영화제 국제평론협회 심사위원과, 이탈리아 몬테카티니 국제 단편영화제 본선 심사위원을 맡기도 했다.또한 부산국제영화제의 고문과 전주국제영화제 부집행위원장으로활동했다. 현재 프리랜서 영화평론가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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