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5 |
[명인명장] 장구명인 강신하
관리자(2010-05-03 18:53:21)
장구명인 강신하
“이제는 물려줄 때가 됐는데, 아직도 손을 못 놓고 있으니…”
강신하 명장 걸어온 길
1923년 임실군 성수면 오류리에서 출생
1953년 백봉남, 서문필에게 장구제작 기능 전수
1977년 장구통 내면제작기 발명(실용신안 특허 제355호)
1991년 전북공예인협회 회원 등록
1992년 전북공예품경진대회 입상
1994년 전북공예품경진대회입상
1997년 전북도지정 무형문화재 제12-3호 지정
일찍이 호남지방은 농경문화가 발달하면서 농악이 성행해 왔습니다. 그 중에서도 전북지역, 특히 김제는 벽골제가 있어 전북 농경문화의 중심지역할을 해왔습니다. 덕분에 이 지역에는 우도농악가락과 함께 농악기 제작의 명인들이 많이 활약해 왔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해마다 악기 제작자들의 수가 줄고 있습니다. 전통악기 제작의 힘겨움과 불확실한 수입으로 기본 적인 생활조차 위협받기 때문입니다.김제시 신풍동. 이곳에는 여전히 전통악기 제작방법을 고집하는 이가 있습니다. 바로 60년이 넘도록 김제장구의 자부심을 지켜 온 강신하(87)명인입니다. 1950년대 초, 이 지방 장구제작의 명인인 백봉남, 서운필 씨를 만나 장구제작기술을 전수 받은 그는 이후 하루도 빠짐없이 장구제작에 매달려 왔습니다. 남들보다 늦게 입문한 만큼 더욱 피나는 노력을 통해 김제장구의 맥을 이어온 그의 삶은 치열합니다.때문일까요. 그의 소리는 다른 장구에 비해 깊고 독특한 음색이 난다고 합니다. 한평생 장구제작의 외길을 걸어온 명인의 치열한 예술혼이 소리를 통해 재탄생한 덕분이 아닌가 싶습니다.그는 장구에 자신을 혼을 불어넣지 않으면 신명난 소리가 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명인의 손에서 만들어진 김제장구가 좋은 소리를 낼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그는 이제 아무런 욕심이 없습니다. 단지 장구제작을 잘 전수해 김제장구의 맥이 끊이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아흔을 앞둔 명인의 작지만 간절한 소망입니다.
그때 생각하면 지금도 이가 악물려…
나는 본래 임실군 오류리에서 태어났어. 거기서 살다가 17살 때 이곳으로 이사왔지. 김제 신풍동. 그때만 해도 가난했던 시절이라 소학교 다니는 사람이 드물었어. 나도 소학교도 못 마쳤지.공부는 못 배웠는데 어릴 때부터 이것저것 만드는 것은 잘했어. 그래서 동네 사람들 자전차가 고장나면 그것도 내가 고쳐주고, 무슨 기계 고장이나면 내가 다 고쳐줬어. 그래서 14살 때엔가는경기도에 가서 자동차 정비기술도 배웠지. 미군부대에서 정비공으로도 일하고.그러다가 3년 뒤, 가만있어 보자…. 그때가 스무살이었고만. 일본으로 강제징용돼서 끌려갔어.처음에는 철공일이라고 해서 따라 갔는디 가서본게 탄광이여. 큐슈탄광…. 거기서 4년을 지냈는디, 그때 일을 아직도잊지 못혀. 일본에 있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보지도 못했어. 돌아가시는 것….거기서 6개월 동안 죽어라 일만했어. 맨날 도로꼬 타고 가서 곡괭이로 탄을 찍어냈응게. 하루도안 빼놓고 열심히 했지. 긍게 거기사감이 나를 믿더라고. 그러다가탈영해버렸어. 거기 있어야 밥도 제대로 안주고, 고생만 죽도록 하고.그래서 당시 반장이던 최동식이한테말해서 몇십원 모은 돈 치루고 야다라는 나룻배 타는 데까지 외출증 끊어서 탈출했지. 섬이니까 증명이 없으면배를 탈 수 없거든. 감옥이 따로 없었지 뭐….그래가지고 히로시마란 섬에 갔어. 근데 히로시마 갔다고 갈 곳있어? 그래서 할 수 없이 길거리에서 날을 샜지. 다음날 어디가 어딘지 분간도 못하고 막 돌아댕겼어. 일 구할라고…. 그러다 본게꼭 한국사람, 그때는 조선사람이라고 했어, 어쨌든 조선사람같이생긴 사람이 지나가더라고. 그래서 조선말로 일을 찾고 있다고했지. 그랬더니 그 사람이 이 길을 곧장 따라가라는 거여. 곧장가면 해변가가 나오는디 거기에 회사가 하나 있다고. 아 그래서 그 말만 믿고 갔지. 그때 한창 건축일이 많았거든.그 사람 말대로 가보니 미쓰비시라는 회사가 있더라고. 근디 거기서 반장 최동식이 아는 사람을 만난거여. 반장 최동식이도 탈영했었거든. 긍게 그 사람이 나보고 잽혀가기 전에 도망가라고 하더라고. 근디 갈 데가 있어야지. 내가 그동안 아무것도 못 먹었다고 한게 나를 어디로 데려 가.그래서 따라간게 밥을 한 되빡 얻어왔드라고. 아따 눈이번쩍 떠지드만. 그래서 밥 받아가지고 세 공기를 정신없이 먹었지. 밥을 세 공기 먹으니 어찌나 피곤해. 그랬더니 내일은 쉬고 모레부터 일 나가쇼 하더라고.얼마나 고마웠던지…. 거기서 인자 막일을 하기 시작했지. 그때 돈으로 8원씩 받고.그러다 보니깐 불 이용해서 배에 대는 철판을굽는 일이 있더만. 인자 내가 그걸 했지. 하나다구미라는 회사 들어가서. 막일은 많이 하나 조금하나 한가지잖어. 근데 이거는 구멍 하나 뚫을때마다 돈을 준게 많이 뚫으면 많이 벌었지. 그때가 대동아 전쟁 때여….그런데 어느 날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진 거여. 또 일본 천황도 항복을 했지. 거기서 한참을 일했는디 어느 날은 출장을 보내더라고. 배를 태워서. 근디 그 배로 가면 죽는 거였어. 배를 보낸 다음에 못 나오게 하려고 기름도 조금만 주드라고.그때 거기서 나왔어. 근데 우리 형님이 큐슈 오시마란 섬에 징용을 가 있었어. 그래서 형님을 데리고 나오려고 거기에 들어갔지. 거기는 경계가더 심했어. 내가 거기 가가지고 형님데리고 일본을 나왔지.
옛날 생각하면 참 아득해요
김제에 와서는 한동안 이것저것 일도하고 놀기도 했지. 그러다가 잠깐 철공일도 했어. 박문식이라는 사람이 있는디 예전경찰서 밑에 철공공장이 있었거든. 그 사람이 거기 소개시켜줘서 한동안 거기서 일했지.그러다 본게 어느새 결혼할 나이가 됐잖어.그러니깐 우리 이모가 나보고 결혼을 하라고하더라고. 어머니가 어렸을 적에 돌아가셨응게이모가 챙겨준거지. 그때만 해도 맞선을 봐, 연애를 해…. 그냥 이모가 소개시켜주는 대로 만나서결혼했지. 그게 지금 부인이여, 참 고생 많았지 나만나서. 그때가 스물다섯인가 일곱인가…. 이제 기억도 가물가물하네. 그때만 해도 자식을 대여섯씩 낳는 사람이 대부분이었어. 그래가지고 나도 아들 셋,딸 셋 낳아 지금까지 잘 살고 있지. 벌써 큰애 나이가쉰 일곱이니깐, 세월 참 빠르지.그러다 여기에서 일할 게 없응게 무작정 서울에 올라갔어. 취직하러…. 그런데 서울 갔다고 바로 취직이 되나.그런디 내가 수복 직후에 조선소를 댕기다가 운전을 배웠거든. 그때만 해도 면허증 따면 군인 데려가고 그래서 면허증은 안 따고 운전만 배웠어. 운전할 줄 알아도 못한다고 했던 시절이여…. 그래서 나는 경찰서에서 기술등록만 했지. 운전면허증 따면 기술병으로 끌려 가니깐.그러다가 당시 서울지구 특무대에 가서 자동차 운전수로 취직을 했어. 그때 돈으로 한 달에 만 육천원인가를 받았지. 참 그렇게 많이 벌었었어. 그래서 거기에 1년 반 정도 있다가 그만두고 6.25 지나서 돌아왔지.근디 어느 날 밤에 골목길에 서 있는데 어떤 놈이 라이트를 비추고 있는 거여. 그래서 본 게 순옥이라고 나 고향 아는 사람이여. 어쩐일이냐고 물었더니 의정부 대대장 모시러 집에 가는 길이라고 하더구만. 근디 가가 어디 좀 다녀올 데가 있다고 보름만 나보고 운전해달래. 그래서 운전 했더니 아 보름 갔다 온다는 사람이 한 달 반이나있다 왔어. 돌아와 가지고는 나보고 운전 좀 하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거기서 일년 정도 있다가 또 그만뒀지. 참 젊어서 재밌게 살았어요. 이제는그때 생각하면 아득하기만 하지요….
장구와 인연을 맺다
서울서 있다가 김제에 내려와서 본게 서운필 씨하고 백봉남 씨가 장구를 만들고 있었어. 요촌동에서…. 둘이 한 조가 돼서 끌하고 망치고 장구통을 팠지. 그 당시만 해도 두 분이 만드는 장구는 참 인기 많았어. 그래서 그 옆에서 보면서 장구 만드는 법을 배웠지. 그러니깐 서운필, 백봉남씨는 내 스승이라고 할 수 있어.내가 장구를 좀 늦게 배웠잖어. 그래서 죽기살기로 열심히 배웠지, 하루도 안 빼놓고. 서운필, 백봉남 씨 옆에서 장구 깎고, 다듬고 하는 것들. 매일 작업장에 나가서 장구를 깎았어, 왜냐면 장구는 기술이라 하면할수록 느는 것이거든. 그래서 많은 노력이 필요해.장구는 오동나무가 제일 좋아. 오동나무가 가볍거든. 또 광택이 있고재질이 균일해 이뻐. 긍게 오동나무 속을 파내고 겉모양새를 다듬어야돼. 그래서 처음엔 오동나무를 가지고 길이대로 잘라. 자른 다음에 끌이나 망치로 쳐서 둥그렇게 나무 모양을 만들지. 그것을 인제 기계로 가져가서 껍데기를 싹 깎은 다음 양쪽으로 돌려서 파내면 속이 나오는 거여.그걸 한 다음에는 쇠가죽이나 개가죽을 대는데, 노루가죽하고 염소가죽을 사용하기도 해. 이 소리를 조절하는 것은 궁채쪽에는 두꺼운 가죽을대로 열채쪽에는 얇은 가죽을 쓰면 되거든.근디 이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건 목이여. 장구에선 목이 제일 중요혀.장구 한 가운데 잘록한 부분 있지? 거기가 목이여, 목. 이 목 부분이 길고 장구통 구멍이 가늘면 소리도 좋고 멀리까지 나가. 근디 목이 짧고 구멍이 크면 소리는 잘 나는 대신 소리가 멀리 못가.긍게 좋은 장구는 목이 좁고 통 둘레가 크고 길어야 혀. 그래야 좋은소리가 나고 멀리 나가는 거여. 그런디 요새 사람들은 대부분 짧은 것만찾어. 갖고 댕기기 편하고, 치기 편할라고. 지금은 일곱치도 길다고 하니깐….그래서 장구를 한 7~8가지 종류로 만들곤 해. 주문하는 사람이 맘에드는 것 갖다 쓰라고. 아무리 말해봤자 사는 사람 마음인게….
최초로 장구 제작 기계를 만들다
근디 장구만드는 일이 보통이 아니여. 끌하고 망치로 장구통 만들려면…. 손이 많이 갈 뿐만 아니라 힘도 부치지. 서운필, 백봉남 씨가 하는 것을 계속 보다보니깐 좀답답하더라고…. 그때‘기계로 만들면 더 쉽게 만들 수 있을텐데’라고 생각했지.근데 백봉남 씨 하는 말이“니가 장구 기계를만들면 내 손가락에 장을 지진다”고 장담을 하더라고.아까 말했듯이 내가 기술솜씨가 좀 있잖어. 나는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어. 그래서 자동차에 쓰는 기어랑 벨트, 모터 등을 가지고 와서 한 일년동안 씨름했어. 장구 만드는 기계 만들려고. 이렇게 연결했다, 저렇게 연결했다 하면서…. 그렇게 해서 만든게 밖에 있는 장구통 깎는 기계여. 반자동식이긴 하지만…. 그전에는 전기도 안 들어와서 스몰엔진인가 하는 것을 가져가지고 만들었지. 그래도 만들어 놓고 본게 얼마나 편해. 그걸 가지고 사용하다가 다시 한 번 기계를 만들었어. 그게 지금도 여기 작업장에서 사용하고 있는 기계여. 그걸 가지고 이태까지 작업하고 있어요.예전에는 백봉남, 선운필 두 양반이 앉아서 장구통 한 개 만드는데 하루가 꼬박 걸렸는데, 나는기계 사용한 뒤로 하루에 대여섯 개도 만들었어.기계를 만드니깐 손으로 파는 것보다 정확하고소리도 잘 나거든. 그 덕에 수입도 훨씬 좋아졌지. 그러니깐 백봉남, 선운필 씨는 얼마나 속이상해. 그래도 선운필 씨는 덜했는데 백봉남 씨는많이 서운해 했지. 이제는 모두 돌아가셨지만 참그때 생각이 많이 나.이거 만들고 본게 그동안 손으로만 어렵게 작업해오던 시절이 생각나더라고. 한 번은 무주에일을 갔는디 겨울에 어찌나 추워. 난장에서 일했는디 얼마나 춥던지 지금도 잊혀지지가 않아. 그때는 나무 나르기도 힘들었고. 지금처럼 차도 없어가지고…. 우마차 알어? 다 그걸로 나르곤 했어. 세월이 많이 좋아졌지. 내가벌써 57년 차니깐. 요새는 장구만드는 법도 많이 좋아져서 나무도다 날라주고, 가죽도 만들어 주고…. 세상 참 많이 편해졌지.아무튼 인자 이것을 만들고 보니깐특허를 내야겠더라고. 그래서 서울에있는 동생보고 특허를 내자고 했지. 아그랬던 동생이 처음에는“이게 특허가나와요 성님?”하더라고. 그래도“아 한번 실용신안특허나 내보자”고 해서 특허신청을 했어. 결국 77년도에‘내면 제작기’라고 실용신안 특허를 받았어. 그래가지고 돈을 벌은게 동생이 제일 부러워했지.그때만 해도 벌이가 시원찮은게 참 귀한 돈이었어.
김제농악의 산증인 박판열 명인과의 인연
저 기계 만들고 정말 바쁘게 지냈어. 정읍, 고산, 칠보 등 내가 안 간디가 없어. 그렇게 하다보니깐 사람들이 소리 잘난다고 하더라고. 어느 순간 내가 장구 잘 만든다는 소문이 나서 쉴 새 없이장구 산다고 연락이 왔어. 그때만 해도 내 장구가안 나가는디가 없었어. 매일 신문에 나갔으니깐….취재하러 정말 많이 왔어.그러니깐 그것 보고들 대구서도 주문전화가 오고,강원도서도 오고. 그 개그맨 있잖어. 백봉남이도 내 작업장에 장구 구경하러 왔었어. 생각해보면 그때 내가판 것만 해도 서울 한집에 하나씩을 팔았을 것이여. 하루에 대여섯개 씩 만들어서 다 팔았응게.근디 어느 날은 작업장에서 장구를 만들고 있는디 누가찾아왔어. 그러더니 한참을 옆에서 구경하더라고. 그 양반이 박판열 선생이여. 그전에는 정읍으로 사러 다녔는디 김제에서도 장구 판다는 소문 듣고 왔더라고.나보고“어이 동생, 악기 좀 줘봐”그래. 그래갖고 장구를줬더니 한 번 쳐보고서는“여기는 이렇게 파보면 어쪄”그러더라고. 그래서 선생 말대로 장구를 팠더니 소리가 참 좋아져. 그 양반 말이 장구통 지름이 커야 소리가 난다는 거야. 작으면 소리가 약하다고.그러더니 큰 것 하나, 작은 것 하나 깎아달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내가 깎아주고 2만원만 달라고 했더니 큰 것은 3만원, 작은 것은 2만원해서 5만원을 주는 거여. 또 언젠가는 와가지고 계약금으로 10만원을맡기네. 그래서 내가 믿고 일하는 것이니깐 계약금 안 받고 된다고 했지. 그래도 그냥 계약금을 주고 가.나는 돈에 욕심이 없응게 돈을 적게 받았거든. 그랬더니 그 양반은 다른 사람하고 다르게 잘 챙겨줬어. 고마웠지.그 양반 생각하면 참 신기해. 평소에는 걸어가다가 바람만 불어도 자빠질 정도로 몸이 그렇게 약한디 장구만 메면 신들린 듯이 치니 신기할따름이지. 열여섯 살 때부터인가 장구 쳤다고 하는디 하여튼 잘 쳤어.그 양반도 이제는 나이를 많이 잡쉈지, 90이나 먹었으니깐. 뭐 나부터도 늙었는디… 지금도 가끔‘김제지평선축제’같은 것 하면 나오긴 하는데, 예전처럼 장구를 치지는 못하고 살살 가르치는 정도지.나보고도 장구를 배우라고 했는디, 그때만 해도 이리 바뻐 가지고…. 이런 기계를 파는 디가없었거든 그때는. 긍게 주문 들어오는 걸 나 혼자나무를 썰어서 기계로 깎는디 얼마나 바뻐. 배울엄두도 못냈지.
날개만 있었어도 날아갔을 것이여
인자 계속 장구를 만들다 보니깐 주위에서 자꾸 대회에 나가보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할 수 없이 92년인가…. 공예품 대회에 나갔어. 나는 그냥 내가 만들어오던 것 가지고 나갔는디 상을 탔어. 그러고도 세 번인가 상 탔을거여. 아주 고맙지. 그런데 옛날부터 이런 얘기하면 참 쑥스럽더라고.그러다가 97년엔가 동생한테 서울에 올라오라고 전화가 왔어.아 그래서 올라갔더니 인천으로 가자고 하는 거야. 그래서 내가인천은 왜 가냐고 물었지. 나 혼자는 안간다고, 하도 고생을 많이해서 그런데 혼자 가기가 무서워. 그래서 동생하고 같이 갔지. 갔더니 전주서 이기동 씨하고, 조석진 씨, 그리고 이름이 생각 안나는데 아무튼 셋이 왔더라고. 알고 본게 무형문화재로 지정받은거여.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그냥 장구만 만들었는디 그렇게 좋은 걸 주더라고…. 너무 고마웠지.언젠가는 대학에서 명예교수도 시켜줘서 명예교수 자격증도받았어. 소학교도 못 마쳤는데 장구 하나 만든다고 이런 걸 시켜주니 놀라울 따름이지.그러니깐 나는 평생 못 배웠어도 무형문화재도 되고, 명예교수도 됐어. 이제는 소원이 없지. 그때 기분이 어떤지는 아무도 몰라. 날개만 있었어도 날아갔을 거여. 아마….그래서 돈도 꽤 많이 벌었지. 젊었을 때 벌은 돈으로뒷집도 사고, 이 땅도 사고, 앞에 집도 짓고…. 지금은 빚없으니깐 그냥저냥 사는 거지. 머가 필요 있겠어.이제는 욕심 없어. 죽어서 돈 가져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옷도 계절 따라 한 벌만 있으면 돼…. 장구 만드는일도 손을 놓아야 할 때가 됐지. 지금은 힘들어서 하루에장구 하나 정도밖에 못 만들어. 내 나이가 벌써 여든 일곱인게…. 물려줄 때가 되었지. 원래는 큰 아들한테 물려주려고 했는데, 잘 안 하려고 해. 장구 만드는 일이 원체힘이 드니깐. 요새 젊은 사람들은 힘든 일은 안 하려고하자너.요새는 후계자가 한 명 있어, 이름이 강기선이라고.왔다갔다하면서 장구 배우는 사람이…. 앞으로는 그사람한테 내가 가진 기술 잘 물려주기만 하면 돼, 그러면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