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5 |
[내 인생의 멘토] 술(酒)시에 만나는 화가 박민평
관리자(2010-05-03 18:53:40)
술(酒)시에 만나는 화가 박민평
그곳에 가면 언제나 그가 있더라
- 김영란 서양화가
오늘도 선생님은 술(酒)시가 되면‘길목집’에 출근부 도장을 찍으신다. 그래서 술(酒)시에 술(酒)이 고프거나, 술(術)을 이야기하고 싶으면 나는 전화를 한다. “박민평 선생님!”하고…. 내가 그분을 정식으로 뵙게 된 것은 고등학교 3학년에 올라가서이니, 그분에게 직접 수업을 들었거나 미술지도를 받은 스승과 제자 사이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는‘나의 스승님’, ‘그분의 제자’, ‘나의 든든한 빽(?)’임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한다.
미술을 만나다
어려서부터 그리기며 꼬물꼬물 만들기를좋아하던 나는‘화가?, 디자이너?’하며나의 미래를 막연하게나마 꿈꾸게 되었고 중학교에 진학하였다. 그때는 지금처럼 화집과 미술월간지가 다양하거나 널리보급되지 않던 시절이라 미술 작품이나명화를 접할 기회란 그저 미술 교과서를 통해서일 뿐이었다. 그런데중학교 1학년 미술교과서에서‘예술은 아름다움을 추구 하는것이다’라는 나의 어린 소견을깨뜨리는 작품을 보게 된 것이다.표현파 화가 뭉크의 <사춘기>라는작품. 그 작품은‘아! 그림이 꼭 아름다운 것만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정서나 심리, 사회적인 배경까지도 담을 수 있는 정말 매력 있는 장르로구나’라는 생각이 들게 하였다. 그 이후 미술에 대한 나의 호기심은그림뿐만 아니라 고미술, 역사, 조각, 등의 분야로 넓어졌고,문명의 도시를 떠나 타이티에서 <황색의 그리스도>를 그린고집스런 고갱이란 작가에 대해서도 매력을 가지게 되었다.
21세기형 우렁각시
성심여고를 막 입학한 1978년. 1학년 새내기였던 나는 고등학교와 중학교 교사가 만날 수 있게 설계된 강당을 청소구역으로 맡게 되었다. 강당 정면의 벽면에는 작은 쪽문이 나있었는데 그곳으로 중학생 아이들이 드나드는 모습이 신기하기도 하고 미로와 같은 교사구조가 궁금했던터라 어느 날 모험심이 동하였는지 그 작은문을 열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재잘거리던 한 무리의 친구들이 몰려나간 텅빈 강당. 이때다 싶어 빠꼼히 쪽문을 열었다. 문 뒤로는 컴컴한 복도가 이어졌고, 교실3개가 좌우로 있었다. 그리고 중학교로통하는 복도와 눈부신 햇살이 역광으로 비치는 창문이 좁은 복도 끝에맞닿아 있었다.컴컴한 교실, 호기심에 까치발을 딛고 창문너머 교실 안을 들여다보는 순간 나는 숨이 멈춰지는 듯하였다. 큰 화판들(그때는 그것이 유화를 그리는 캔버스인줄 몰랐다)…. 겹겹이 세워놓은 캔버스가 2개의 교실 한가득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교실에는 지금 막 놓고 간 듯한 팔레트에 윤기 나는 물감들이 어지럽게 짜여 있었고, 한 뭉텅이의붓들, 나이프, 캔버스 위의 그리다 만 해바라기…. 고호의 이글거리는 해바라기하고는 또 다른 느낌의 정형화되지 않은분방한 터치의 해바라기가 화려하지도 그렇다고 소박하지도않은 도도한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질 않은가?그날 이후 난 청소시간은 물론 쉬는 시간에도 몰래몰래 그곳을 찾아 까치발을 딛게 되었다. 날마다 달라지는 그림이궁금하여, 그 교실의 주인이 궁금하여, 그러면서도 행여 그교실 주인과 맞닥뜨릴까봐 살-며-시….그리고 몇 달이 지난 후 그 교실의 주인이 중학교 미술선생님이시며, 유명한 화가라는 걸 알게 되었고 성심여중을나온 친구를 통해 먼발치에서나마 선생님의 얼굴을 보게 되었다.그 무렵 미술부 친구들은 입시를 위해 모두 미술학원을 다녔고, 친구들이 떠난 빈 미술실은 오롯이 내 차지가 되었다.나는 선생님을 흉내 내서 나의 화실을 만들기로 하고, 쉬는시간 틈틈이 미술실이 있는 4층을 단숨에 뛰어 올라 아그리파, 아리아도네, 비너스, 카라카라 등의 낯선 로마조각 석고상을 그려 나만의 공간에 채워 넣었다. 지금 생각하면 누가보았을까 아찔하고, 유치하기 그지없지만 그때는 나름대로진지하였으리라 생각하며 흰 웃음 한번 지어본다. 후 후. 게다가 몰래 만든 그 공간에 성악 공부하는 친구를 불러 새로그린 어설픈 그림들을 자랑스레 보여주고, 그 친구의 뜻 모를 이태리 가곡을 들으며 마치 우리가 문화의 미래요 중심인냥 우쭐대며 키득거리던 일들….언제나 변함없이 작품에 열중하시던 선생님을 흉내내며 나는 화가로의 꿈을 키우게 되었고, 유치하지만 혼자만의 작품에 몰입하면서 새로움을 창조하는 즐거움도 느끼고, 나만의공간에서 자아를 조금씩조금씩 키워나갔다. 나의 흐뭇한 고등학교 시절. 그 시절은 작업을 하는 지금의 나에게 큰 밑거름이 되었으며, 나의 든든한 자산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그자산이 박민평 선생님으로 하여금 비롯되었으니 선생님이 우리고등학교로 부임해오시기 이전부터 나는 이미 선생님의 우렁각시 제자였고, 선생님께 큰 덕을 입은 셈인 것이다.
술(酒)시엔 언제나 그 곳‘길목집’
이후 미술대학을 가고, 결혼을 하고, 아이들을 키우며 작품하기 버겁거나 벽에 부딪힐 때 문득문득 선생님이 생각나불현듯 전화한다. 그럴 때면 항상 반기시며“막걸리 한잔 어뗘?”하는 전화목소리에 막걸리처럼 허연 웃음이 묻어나는 선생님. 그리고 다시금 용기나게 든든한 빽이 되어 주시는 선생님.작년 칠순 전시회 때, 연세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젊은 작가들도 엄두내기 힘든 300호를 7점씩이나 턱턱 걸어 기 질리게 하시는 선생님…. 술시엔 여지없이 취한 듯 그 곳‘길목집’에 계시지만 기(氣) 등등하고 도도하게 예술(藝術)에 대하여 논하시는 선생님.지금도 술(術)이 고프면 술(酒)시에 선생님께 전화를 한다.“선생님 길목집이세요? 아님 주막?”
김영란 이화여대 미술대학 서양화과와 전북대 대학원 미술학과를 졸업했다. 현재 전북대 미술학과 강사로 활동 중이며 지금까지 네차례의 개인전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