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5 |
장미영·전흥남의‘꿈꾸는 노년’
관리자(2010-05-03 18:53:50)
장미영·전흥남의‘꿈꾸는 노년’
앞글에서 살펴본 문순태의 경우처럼, 최일남 역시 진즉부터 노년소설에 관심을 보이며 지금도 왕성하게 창작 활동에 전념하는 원로작가다. 최일남 노년소설의 다양한 울림과 반응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소설집『아주 느린 시간』과『석류』를 분석해 보면 그 윤곽이 어느 정도 드러난다(거슬러 올라가면 1986년도의 작품『흐르는 북』도 노년소설의 전범에 해당하는 경우다). 특히 소설집『아주 느린시간』에 실린 소설들은 노년소설 위주로 수록되어 있는 만큼 최일남 노년소설의 면모와 특징을 온전하게 파악하는데 유익하다.소설집『아주 느린 시간』에 수록된「아주 느린 시간」을 비롯하여「풍경」, 「힘」, 「사진」, 「그들은 말했네」, 「고도는 못 오신다네」등은 각기 다른 울림과 목소리로 노년소설로서의 성격과 조건을 두루갖추고 있는 수작들이다. 열거한 작품 모두를 구체적으로 분석할 자리는 아니고, 여기서는「아주 느린 시간」과「풍경」, 그리고「석류」위주로 몇 작품을 언급하게 될 것이다.
최일남 노년소설의 해찰과 역리(逆理)에 대하여
- 전흥남 한려대학교 교수
최일남 소설 속 다양하게 드러난 ‘죽음’의빛깔
『아주 느린 시간』에 수록된 소설들은 서문에서 작가 스스로 밝힌 바 있듯이, “직행 질주의반대편에 자리 잡은 퇴행 해찰의 한 산물”로 여기는 만큼 작품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작가로서 시대적· 지배적 가치의‘반대편’에 놓인‘퇴행 해찰’에의 유혹을 뿌리칠 수 없었음이작품 곳곳에서 표출되고 있다. 직행과 질주, 속도의 효율을 우리 시대의지배적 가치로 본다면, 작가는 시대의 결을 의식적으로 거슬러 보았다는뜻이다.「아주 느린 시간」은 소설집『아주 느린 시간』의 표제작으로 최일남 노년소설 성향을 일정 정도 대변한다. 위에서 열거한 작품마다 각기 다른 특성과 울림이 있지만,「아주 느린 시간」은 최일남 노년소설의 특성과경향을 가늠해 보는데 시사해 주는 바가 크다는점만은 부인할 수 없을 것 같다. 다섯 노인의 이야기를 통해 삶과 죽음을 바라보는 시각이 어떻게 서사의 초점이 되고 있는지 살펴보자.
“기왕 태워 없앨 것 나무면 어떻고 종이면 어때.
기다리는 지루함을 덜기 위해서도 빠를수록 좋지.
안 그래?”
“거기까지 갈 것 뭐 있수. 병원에 누웠다가 해부
학 교실로 직행하는 사람도 더러 있습니다. 빠르기
로 따지면야 그게 제일이겠네.”
“암. 맘먹기에 따라서는.”
“화장 다음엔 납골당인가요.”
“그렇지. 값의 고하에 따라 재질이 다른 단지에
가루를 담아 가까운 납골당으로 향하는데, 개중에는
장례장 안에 붙은 작은 동산에 올라 그 자리에서
뿌리는 사람도 있더라구.”
“산에다 곧장?”
“아냐. 바로 뿌리면 산을 오염시킬 염려가 있기
때문에 산림법 제 몇조에 걸린대나.”
“비료 구실을 해서 토양이나 나무에 이로울 텐
데.”-(중략)-
“얼라. 흐르는 강물에 뿌리면? 물고기는 좋아한
대요?”
“그건 나도 몰라. 물고기한테 물어보지 않은 담에
야 난들 어찌아누. 산은 늘 거기 있고 내는 쉬지 않
고 흐르는 차이가 있을까.”
“세상에나. 말짱 헛거네.”
“공수래공수거의 절정이지. 땅으로 스며들든 물
로 흐르든 사라지는 건 마찬가지인데, 그런 이들에겐 적어도 납골당의 답답함에
서 해방된 기쁨이 여간 아닐 거야.”1)
사람이 죽은 후 매장으로 할 것인지 화장을 해서 납골당에 안치할 것인지 아니면 그 밖의 장례방법에 대해 노인들끼리 서로 의견을 교환하는 장면이다. 결국 죽은 후 장례는 타인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들에게 닥친 문제이기도 하다. 노인들에게 있어 죽음의 문제는 단연 관심사항이다. 아니 노인들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닐 게다. 인간에게 엄습하는 가장 큰 공포는 시간의 불가역성으로부터 비롯된다. 그것은 곧 죽음에 대한 공포이기도 하다. 종교나 철학이나 문학이 궁극적으로 다루는 것은 이러한 시간의 공포,즉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는 문제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음도 이러한 저간의 사정을 반영해 준다.경험을 통해 형성된 죽음에 대한 표상은 이제 역으로 우리의 삶에 깊은영향을 끼친다. 죽음을 삶의 거울이라고 말한다. 죽음, 그리고 그것에 대한 표상이 삶을 되비추어준다는 말이다. 파란 거울에 비친 삶은 파랗게 보이며 검은 거울에 비친 삶은 검게 보인다. 마찬가지로 죽음을 밝게 보는사람은 삶을 밝게 보게 되며 어둡게 보는 사람은 삶을 어둡게 보는 경향마저 있다. 이것은 죽음은 하나인데, 그것에 대한 심적인 관계에 따라 그것이 아주 다양하게 받아들여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죽음에 대한 표상이 전적으로 개인적인 것은 아니다. 개인에 앞서 그 개인이 속해 있는 문화적 환경이 있고, 역사적 배경이 있으며 종교적 신념이 있다. 오히려 개인적 경험은 이런 환경이나 배경 그리고 신념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어서, 그런 것들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개인적 표상에 관해 말할 수가 없을것이다.이런 맥락에서 혹자는“죽음에 대한 생각은 필연적으로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고민케 한다. 죽음이 피할 수 없는 삶의 단계라고 한다면 우리는그것에 대해 아는 만큼 자유로워질 수 있다”(천선영)라고 말한 바도 있다.하지만 한편으로는 죽음은 알면 알수록 거머쥘 수 없는 미래이자 미지이다. 그래서 개인에게 죽음은 언제나 처음이자 마지막 실험인 셈이다. 우리가 죽음에“떠밀릴밖에 없”는 것처럼, 죽음에 대해 우리는 수동적인 피실험자임을 뜻한다. 말하자면 우리는 죽음의 주인이 아니라는 것, 우리가 죽음을 향해 나아간다기보다 죽음이 우리에게 느닷없이 닥쳐온다는 것, 그것이 죽음과의 진짜 관계라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죽음은 최일남의 소설「사진」에서 작중인물의 시각에 의존하여 죽음의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과도 상통한다.
“아무리 나이를 많이 먹은 사람도, 아무리 이 세상 인간사에 도통한 현인도, 이거다 하고 답을 내리지 못하는 게 죽음이 아닌가. 관념적으로야 무슨 말을 못 해. 너무 넘쳐 걱정일 지경이지. 그러나 정작죽음과 맞닥뜨리면 까짓 자식이 무슨 소용인가. 눈꼽만큼도 도움이 안 돼. 자신이 직접 당해보지 않고는 나락처럼 캄캄한 것이 죽음이라고 했을 때, 천만년 전이나 오늘이나 저마다 최초이자 최후의 실험자로 떠밀릴밖에 없다고 했을 때, 어느 누가 본능적인 공포에 휘말리지 않겠나. 과정이 아니라 죽음 자체에대해서”「( 사진」121쪽)
인용문에 나온 작중인물의 시각에 의존해볼 때, 최일남은 죽음에 우주적 근원으로의 귀환이나 자연으로의 회귀와 같은 의미를 두지않는다. 위의 작품에서 보듯, 당자의 생전 삶을 알려주지도 않고 죽음 자체에 관심을 두지도 않는 장례는 결국 살아남은 자의‘분탕질’에 불과하다는 것, 그래서 죽음은 익명화된다고 말할 뿐이다.이처럼 최일남의 노년소설에서는 작품마다조금씩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죽음에 대해 여러 형태의 수사와 빛깔을 드러낸다. 「아주 느린 시간」에서처럼 다소‘어깃장 놓기’를 통한가벼움과눙치는수사로기존의관념에비켜서보기도한다.「 아주느린시간」역시 노인들이 죽음을 둘러싼 문제를 비롯해 노년에 겪는 여러 관심 사항을 자유롭게 교환하면서 서사의 기본 줄거리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 다섯 사람의 이야기가 주마간산 식으로나마 끝났다. 어느 하늘 아래, 어느땅 위엔들 이와 비슷한 사연이 없을까. 많고 많을 터이다. 죽음이라는 편행된 시각을 거두고 전향적인 보고서를 시도할 수도 있을 것이다. 도처에 이렇게 노인들이몰려오는 장관을 아무튼 눈 크게 뜨고 보라.해가 진 당산에 쟁반 같은 달이 서서히 떠오르고 있다. 그러나 해는 내일도 어김없이 뜬다. 그러므로 내일 아침이면 또 어디론가 길을 나설 그들의 행각을 기대해도 좋다. (고딕표시-인용자,「 아주느린시간」, 73쪽)
인용문은「아주 느린 시간」의 말미다.인용문의 고딕표시에 주의해서 살펴보면, 이 작품에서 서술자는 객관적인 어조로 다섯 노인의 삶과 죽음에관련된 생각을 스포츠 중계방송 하듯이 담담하게 술회하고 있다. 특히 이작품에서 서술자는 작중인물과의 객관적 거리를 유지하면서 서사를 진행시킨다. 화자가 작중인물의 감정에 이입되는 경우를 차단하거나 자제하고있다. 이러한 서술 양상은 죽음을 포함하여 노년의 삶 역시 인생의 큰 틀안에서 호들갑을 떨거나 유난스러워하지 않은 채 수용함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진한 감동과 여운으로 이끄는 서술적 효과를 지닌다.이러한 서술 양상은『아주 느린 시간』에 실려 있는「풍경」을 통해서도확인된다. 이 작품은 퇴임한 장관 출신의 노인의 삶을 통해 노년기에 겪는시간보내기의 난처함과 외로움을 짙게 반영하고 있다. 정총재를 초점인물로 해서 그의 하루 일과를 동영상으로 보여주듯 노년의 삶에서 닥쳐오는존재감의 상실, 역할 상실에서 오는 소외감 등을 잘 묘사해 놓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최일남의「아주느린시간」,「 풍경」등은노년소설로서의요건을 두루 갖추고 있으면서 서술자가 비교적 작중인물과 객관적 거리를유지하면서 카메라 앵글에 의해 피사체를 찍듯이 담담한 어조로 노년의삶과 애환을 다루고 있다.
노년소설로서의 건강성과 지향성을 담보하다
그런데, 소설집『석류』에 수록된「석류」는좀 다르다. 화자인‘나’를 통해서 노모의 삶과일상이 드러나고 있다. 노모가 초점인물로 등장하고 있는 셈이다. ‘나’의 어머니인 노모가주요 인물로 등장하고 작은아버지와 어머니사이에 얽힌 삶과 회상이 이 작품의 서사를 추동해 나간다. 특히 격동의 현대사를 살아오는동안 노인들이 겪었던 배고픔과 가난의 정서들이 파노라마처럼 그려져 있다.
“보면 모르냐. 석류 먹는다.”
고개를 돌려 정면으로 나를 바라보는 어머니의
얼굴이 섬뜩하다. 형광등빛에 반사된 창백하고 쪼
글쪼글 바스러진 모습에 스친 데스마스크의 전율
못지않게, 떼낸 석류 조각의 시뻘건 더미와 씹어 뱉
은 알맹이 찌꺼기가 깊은 밤의 적요를 마구 흩뜨려
가슴이 오싹했다.
“세상 참 좋아졌더구나. 이 겨울에 석류가 어디
냐. 크기는 또 얼마나 크다고. 칠렌가 찔렌가 하는
나라에서 하는 나라에서 수입한 거라는데 맛도 괜
찮다. 너도 와서 먹어.”
“그렇다고 한밤중에 자실 건 없잖아요.”
“아무 때 먹으면 어때. 잠도 안 오고……. 나라도
대신 먹고 가야 숙진이 고것한테 할 말이 있지.”
기어이 저승의 소리 같은 말씀을 뇌신다. 그게
그토록 절절했던가. 석류 한 알의 회한이. 2) (고딕
표시-인용자)
춥고 배고픈 시절 먹을 것이 없어서 운명을 재촉할 수밖에 없던 가난의처절함이 절절하게 연상되는 장면이다. 장티푸스를 앓던 화자의 누이가탕약대접은 본체만체 하면서‘석류가 먹고 싶네’했건만 제대로 소원을 풀어주지 못한 한을 삭이며 한밤중에 석류를 먹는 노모를 묘사한 경우다. 이런 점에서「석류」는 음력 설 어름에 죽은 딸이 그렇게 먹고 싶었던 석류를한 밤중에 먹으며 춥고 배고픈 시절의 회한을 달래는 노모의 삶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작품이다.작품 분석을 통해 드러난 바와 같이, 최일남의 노년소설은 노년의 삶과회한, 그리고 추억을 매개로 삶의 의미를 되새김질할 뿐 아니라 건강성을회복하는 노년을 등장시킨다. 이러한 점들은 앞글에서 살펴본 문순태의노년소설과도 상통되는 대목이다. 최일남의 노년소설에서는 이렇듯 노년의 삶에 대해 다양한 울림과 반응을 보인다. 「아주 느린 시간」에서처럼 죽음에 대해 김윤식은‘어깃장놓기’라고 지적(김윤식, 2004)한 바와 있듯이, 노년은 죽음을 공포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고 따라서 주눅들 필요도 없이 죽음의 가능성을 직시한 경우도 있다.또,「 힘」에서는 젊은 노인이라는 상품화된 이미지에 매혹되기보다 노년의 특성, 그 느림과 수동성도 힘이 된다는‘역리(逆理)’에 자족하는 경우도있다. 최일남의 소설 중에는 말년성 혹은 비시의성의 특성으로 보아야 하는 경우도 이런 맥락에서다. 예컨대, 「멀리 가버렸네」의 경우“쇠락과 퇴행을 허물마냥 둘러쓰고 다닐망정 그 중에는 싱싱한 젊음이 못 따를 대범무쌍한 노년도 있다”는 것을 은연중 내세운다. 달리 말하면, 노인은 모두똑 같다는 고정관념, 「아주 느린 시간」의 홍선생 표현으로 노인은“무엇무엇다워야 한다”는“사회적 합의 내지 강요”를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다.이러한‘역리’혹은‘역설’은 최일남 소설의 말년의식을 뚜렷이 드러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이러한 말년의식이 최일남의 노년소설에 모두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노년의 삶에서 오는 이해와 관용, 그리고 지혜를 발휘하는 노인의 삶을 통해 노년의 건강성을 견인해 간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의 작품속에 나타난 노인상은 노년의 삶을 과장하거나 미화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 노년의 삶이 안고 있는 회한과 무력감을 드러내는 경우도 당연히 있다. 이처럼 최일남의 노년소설은 노년의 삶이 안고 있는 다양성과 다층적인 측면을 제대로 헤집어 조명하고 있다는 점을 우리는 주목해야 할 것이다. 이는 최일남의 소설이 노년소설로서의 건강성과 지향성을 담보하고있는 점과도 무관할 수 없다고 본다.
chn0075@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