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5 |
임안자의‘내가 만난 한국영화’
관리자(2010-05-03 18:53:56)
임안자의‘내가 만난 한국영화’
카를로비 바리국제영화제의 추억
보헤미안의 요람에서 동유럽 영화를 만나다
- 임안자 영화평론가
카를로비 바리국제영화제에 가다
1992년 6월 중순에 이탈리아의페사로국제영화제를 마치고 스위스의 집에 돌아오자 프라하에서 보낸한 장의 팩스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카를로비 바리국제영화제의 집행위원장인 테레자 부르데코바가보낸 것이었는데, “박광수 감독의영화 <베를린 리포트>가 국제경쟁부문에 뽑혔으니 꼭 오라”는 사뭇반가운 소식이었다. 테레자는 1991년 11월 산세바스찬국제영화제에서사귄 새 친구로서 40대 초반의 아주 똑똑한 영화평론가이자 소설작가였다.한편, 박광수 감독은 1989년 로카르노국제영화제에서 영화 <칠수와 만수>의 통역을 맡으면서 처음만났고, 한국의 영화진흥공사에서 5주간 일하는 동안에 그와 인터뷰를한 바 있으며, 그런 뒤에 페사로국제영화제에서 또다시 만나 짧은 기간에 그를 알 기회가 많았다. 그래서인지 그의 영화가 처음으로 동유럽 국가의 영화제에 진출했다는 전갈을 받고는 어떤 식으로라도 그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 나는 생각다 못해 내가 박광수 감독과 인터뷰를 한 기사와 <베를린 리포트>에관련된 글들을 모아서 약 20여 장에 달하는 긴 팩스를 테레자에게 보냈다. 박 감독을 위해 미리 기자들에게 홍보를 해달라는 내 나름의 일종의 로비(?)였다.인터뷰 말이 나온 김에 지난 4월호에서 빠뜨린 글 한 토막을여기에 끼워 넣을까 한다. 즉, 1991년 한국의 영화진흥공사에서일할 때 나는 박광수 감독뿐 아니라 유현목, 임권택, 이두용, 이창호, 배창호, 정지영, 장선우 감독 등 여러 감독들과도 인터뷰를했다. 그리고 스위스 집에 돌아온 뒤 인터뷰 한 자료들을 모두 영어로 번역하여 페사로국제영화제의 집행위원장인 아프라에게 넘겼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그의 자동차 안에 놔뒀던 서류가방이도둑을 맞는 바람에 그 안에 들어있었던 인터뷰와 한국영화에 관한 여러 자료들이 한꺼번에 몽땅 없어지는 불운을 당했다. 원래인터뷰를 한 이유는 페사로국제영화제에서 출간할 책자인「한국의 영화」에 싣기 위해서였는데, 결국 모든 것은 헛일이 되고 말았다. 그런 가운데 박광수 감독의 인터뷰 글이 영화제 사무실에서발견된 건 그나마 다행이었고, 그래서「한국의 영화」에는 그의 인터뷰만 실리게 됐던 것이다.이제 카를로비 바리국제영화제로 말을 다시 돌리면, 나는 페사로에서 집으로 돌아온 지 3주 만에 다시 프라하로 떠났다. 말로만 듣던 자유와 방랑의 세계 보헤미안의 땅을 진짜 간다고 생각하니 저절로 마음이 들떴다. 그러면서도 동유럽 쪽은 처음 가는데다가 철저한 반공교육의 잔재였는지, 사회주의 국가에 대한 어떤 부정적인 선입견 때문에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그러나 비행기안에서 만난 한 체코 여인의 도움으로 나는 프라하의 시내에 있는 버스정거장에서 카를로비 바리로 가는 시외버스를 어렵지 않게 탈 수 있었다. 목적지까지는 2시간, 그러나 거리에 비해 차비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아주 쌌다. 그리고 걱정했던 언어문제도 의외로 독일어에 익숙한 사람들이 많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하기야 프라하의 출신인 프란츠 카프카 작가도 글은 항상 독일어로썼었는데,‘ 왜내가그걸기억하지못했었지?’싶었다.내가 탄 버스는 프라하를 벗어나자 차가 별로 없는 고속도로를빠르게 달렸다. 달리는 버스의 창밖으로 7월의 눈부신 햇빛을 받고 서있는 울창한 숲과 한두 마리의 사슴이 뛰어 노는 푸른 구릉지, 그리고 이따금씩 나타나는 고만고만한 시골마을들이 고즈넉한 모습으로 시야에 들어왔다. 언제 그곳에 끔찍했던 냉전의 비극이 회오리 쳤느냐는 듯 지상의 평화가 가득히 깃들어 있는 보헤미안의 요람지를 한참 지나면서 나는 문득 1990년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아주 인상 깊게 봤던 이리 멘젤 감독의 영화 <줄 위의 종달새>를 생각했다. 60년대 반정부의부르주아로 몰려 어느 쓰레기장에서 강제노동을 하는 지성인들의 시대적 비운을 다룬 이 영화는 러시아의 무장침입으로 무자비하게 짓밟혔던‘프라하의 봄’사건이 일어난일 년 뒤인 1969년에 만들어졌다.그러나 멘젤 감독의 신랄한 풍자극은 나오자마자 바로 정부의 검열에걸려 1989년까지 20년 동안 지하에 묻혀 있다가 드디어 1990년 베를린국제영화제서 황금의 곰상을받으면서 밖으로 알려졌다. 보헤미안에 대해 한마디 덧붙이자면, 원래‘보헤미안’의 유래담은 13세기에오늘날의 체코와 슬로바키아, 그리고 독일의 동부지역에 보헤미안 왕국이 세워짐과 함께 시작됐고, 어원상 사회제도의 속박에서 벗어난 예술가들의 자유로운 삶의 형태, 또는자유롭게 떠도는 방랑자들의 낭만적 세계를 뜻한다.
새로 태어난 카를로비 바리국제영화제
카를로비 바리국제영화제(KarlovyVary International Film Festival)는 칸느나 베니스와 비슷한 시기에출발한, 적어도 시작에서는 국제적으로 크게 인정을 받았던 대영화제였다. 그러다가 1957년 소비에트체제의 요구에 따라 모스크바국제영화제와 바꿔가면서 격년제로 행사를 치르게 됐고, 이때부터모스크바국제영화제가 그랬듯이‘정치선전용의 영화제’라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아 80년대 말까지 국제적으로 따돌림을 당했었다.옛 소비에트 체제 밑에서는 정부 소속의 영화중앙기관에서 영화의 선정에서부터 행사진행에 이르기까지 영화제의 모든 것을관리했고, 물론 대부분 사회주의 국가의 영화들이 프로그램을 메웠었다. 나는 호기심으로 영화제의 역사를 뒤져봤는데 짐작한대로 북한영화들이 심심치 않게 영화제에 초대됐던 기록이 보였고,신상옥 감독이 북한에서 만든 영화 <이준열 열사>가 들어있었던프로그램도 확인할 수 있었다.그러나 시대는 바뀌어 90년대 초 국제적 명성의 문학가이자 민주화 운동의 상징이었던 바클라브 하벨의 민주주의 정부가 들어서면서 카를로비 바리국제영화제는 새로 태어난다. 그리고 세계국제영화제의 성격을 규명해주는 국제영화제작자협회의 중재에힘입어 33년에 걸친 모스크바의 간섭은 1991년으로 끝났고, 그와 동시에 영화제는 격년제에서 연간제로 바뀌었다.전환기가 가져온 변화 중에 가장 눈에 띄었던 건 민간제작회사와 배급사들이 영화제의 구조를 완전히 새로 조직한 점이고, 경제적 지원에서도 정부는 위탁제로 바꾸어 개인제작회사인 에탐프에게 전적으로 영화제의 경영을 맡기는 간접적인 지원방법을썼다. 다만, 소비에트 체제의 붕괴 이후 전 동유럽을 휩쓸었던 심한 경제난으로 영화제는 쉽게 뛰어넘을 수 없는 많은 난제를 만났으나 그래도 파산에 이를 지경이 된 모스크바국제영화제에 비하면 상황은 훨씬 나은 편이었다.집행위원장인 테레자의 경우는 70년대 프라하대학의 영화과에서 편집을 전공했으나 직장을 찾지 못해 15년 동안 여러 영화잡지에 영화평론을 쓰다가 새 정부가 생긴 뒤 문화부 영화담당자로부터 부름을 받고 영화제를 맡게 됐다. 개막식 전날 인사도 할 겸테레자의 사무실을 찾아갔다. 영화제가 잘 되어 가느냐고 내가묻자 테레자는“경비문제가 심각하다. 그러나 정부로부터 전혀간섭을 받지 않아 상당히 고무적이다. 그런데 과거 몇 십 년 동안동구권 밖의 영화계와 단절된 상태였기 때문에 서구영화에 대한관객의 기대가 아주 높다. 특히 할리우드 영화의 인기는 실로 엄청난데, 그와 반대로 유럽과 다른대륙의 영화를 찾는 관객은 실망스러울 정도로 아주 낮다. 이러다간우리의 모든 노력이 결국 할리우드의 시장만 넓혀주는 꼴이 될까봐 걱정이다”라고 말하며 씁쓸한 표정을지었다.
구 체코슬로바키아 영화계의 위기
테레자가 우려했던 것처럼 구 체코슬로바키아 영화계의 위기현상은이미 현실화돼 가고 있었다. 80년대 말까지만 해도 프라하에 55개의영화관이 있었으나 2년 사이에 25개로 줄었고, 그런 추세는 아주 빠른 속도로 전국에 퍼졌다. 영화수입자유화정책이 나온 뒤부터 할리우드 영화의 홍수로 말미암아 국내영화의 상영 숫자는 1/3로 급속히 떨어진 반면에, 할리우드 영화의 극장점유율은 80%에 달했다. 그런데다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정부소속이었던 바란도프 촬영소가 영화제를 앞두고 외국투자회사인 시네펀드에팔려 체코슬로바키아뿐 아니라 동유럽 영화계 모두가 절망상태에 빠져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바로 그전에 옛 소비에트 시대에 으뜸가던모스필름이 해체된 뒤 한때 이름을떨치던 감독들마저 한 편의 영화도못 만들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다.그래서 정부의 결정에 대해 이리 멘젤, 베라 치틸로바 등의 저항세대감독들이 앞장서 항의를 하고 서명운동을 벌였지만, 시세는 이미 민영화의 추진 쪽으로 기울고 있어 아무런 효과도 거두지 못했다.바란도프 촬영소의 민영화를 눈앞에 두고 1992년의 카를로비바리국제영화제에 참석했던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폴란드의영화계 대표들은 영화제 동안 긴급회의를 열고는“동유럽의 영화가 공통으로 처해있는 심각한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국가 사이의 빠른 정보교환과 공동의 영화전문지 발간, 그리고‘유럽이메지’, ‘유럽영화아카데미’, ‘메디아 95’등에 적극 협조해야한다”는 내용의 공동성명을 서둘러 발표했다.앞에서 말한 세 조직체는 1995년 영화 탄생 100주년을 계기로21세기‘유럽영화의 보존과 번영’을 위해 유럽연합이 단합해 만들고, 21세기의 할리우드를 겨냥하여 착안한 커다란 프로젝트의산물이다. 세 조직체를 바탕으로 유럽연합 회원국의 영화는 시나리오의 단계에서부터 영화제작과 배급, 그리고 유럽영화의 상영을 위한 아트하우스의 조직망에 이르기까지 여러 형태의 지원을받게 됐고, 위의 공동성명에서 암시됐듯이 90년대 이후 유럽연합에 가입한 동유럽 국가들도 같은 지원제도의 도움을 받을 수있게 되었다.1992년 7월 9일부터 그 달 18일까지 사이에 열린 제28회 카를로비 바리국제영화제는 체코슬로바키아 국명으로 치러진 마지막 행사였다. 아시다시피 체코슬로바키아는 1918년에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남과 함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부터 독립되어 중앙유럽의 한 독립국가로 74년간 공존해왔다. 그러다 1992년 슬로바키아쪽에서 먼저 독립을 원했고 체코가그에 합의를 함으로써 1993년 1월1일자로 체코공화국과 슬로바키아는‘근대사에서 가장 평화로운 방법으로’사이좋게 헤어졌다.물론 두 나라의 갈라짐은 카를로비 바리국제영화제의 장래와도 직결되는 문제였기 때문에 영화제가열리는 동안 양쪽의 문화부장관들사이에 여러 번 회의가 있다고 했는데, 듣기로는 양쪽 다 영화제의 지속을 바라는 것 같았다. 이유는 28년간 공동으로 키운 영화제이기도하지만 카를로비 바리국제영화제는세계의 A 레벨에 속하는 아홉 개 대영화제의 하나로서, 모스크바국제영화제와 떨어진 뒤부터는 전 동유럽 영화의 중심점으로 자리를 굳혀갈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999년 슬로바키아의 수도 브라티슬라바에 조그만 영화제가 하나 생기면서 두 나라의 영화제도 결국 갈라졌다.
고전문화의 도시 카를로비 바리
체코의 서부지방에 있는 카를로비 바리는 인구 4만의 조그만 도시다. 독일의 동부에 맞닿아 있고 ,그런 지리적 조건 때문에 오랫동안 독일문화의 영향을 받아왔기에독일인들은 지금도 카를로비 바리를‘카르스 바드(카르 황제의온천장이라는 뜻)’로 부른다. 14세기 중반 게르만족의 황제이며보헤미아의 왕이었던 카르 4세가 사냥을 하던 중 이곳의 풍부한온천을 발견하고는 그의 휴양지로 삼으면서 카르스 바드로 불려왔다. 카를로비 바리는 온천뿐 아니라 소화기 질환에 좋다는 40여 종의 광물질이 들어있는 생수의 원천지로 유명하며, 바로크,로코코, 유겐트 스틸의 건축미가 뛰어난 건물들이 도시의 중심지를 채우고 있어 국제영화제가 열리는 도시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곳으로 영화제 참가자들 사이에 인기가 매우 높다.그러나 1992년 7월 9일의 개막식은 소비에트 체제의 시대물인커다란 테르말 호텔에서 검소하게 열렸다. 멋은 없지만 영화제에필요한 모든 시설을 갖추고 있어 행사를 치르기엔 간편한 곳이었다. 나는 개막식장에서 내가 평소 존경해온 바클라브 하벨 대통령이 부인과 함께 경호원 없이 자유롭게 관객들과 섞여 대화를 나누고 있는 걸 봤다. 그가 감옥에 갇혀있으면서 부인 올가에게 보낸편지를 한데 묶은 책자「올가에 보내는 편지」를 80년대 말에 읽었던 기억이 떠올랐는데, 자신을 죄인으로 취급하던 그 나라의 대통령이 됐으니 정말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다사다난했던 1992년의 영화제 행사는 어느 부문을 따질 것없이 정치적, 경제적 격변기의 어려움을 고스란히 나타내 보였다. 프로그램에 들어있는 영화는 다 해도 고작 160편 정도였다.경쟁부문만 보더라도 겨우 15개국의 18편 영화가 경쟁에 올라있었고, 그것도 이미 여러 영화제에서 선보인 바 있는 유럽과 미국의 영화들이 대부분이었으며, 나아가 두 대륙의 세계적으로 유명한 감독이나 배우들이 무대를 독차지했다. 그런 가운데‘기울어지는 동쪽과 권태에 빠져있는 서쪽’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시사된 체코, 헝가리, 폴란드, 루마니아, 러시아에서 온 젊은 세대의10여 영화는 나름대로 장래의 잠재력이 엿보이는 신선한 기획이었다.이제 한국의 경우를 보면, 1991년 장선우 감독의 영화 <우묵배미의 사랑>이 체코와의 수교 이후 최초로 소개됐었다. 그리고 1년 뒤 박광수 감독의 세 번째 영화 <베를린 리포트>가 초청된 것인데, 동양에서 온 유일한 영화였다. <베를린 리포트>는 베를린장벽의 붕괴를 시대배경으로 하고,3살 때 파리의 프랑스 부모에 입양된 마리-엘렌(강수연)과 동시에 독일가족에 입양된 5살 위의 오빠 성민(문성근), 그리고 양아버지를 죽인 마리-엘렌의 범죄에 접근하는파리특파원(안성기)의 삼각관계를남북분단문제와 연결시켜 만든 상징성이 짙은 난해한 영화였다. 거기다 해외촬영이 전혀 없던 시절에 전적으로 파리와 베를린을 극적 무대로 하여 찍었다는 점이 독특하였다.사실 <베를린 리포트>는 1992년1월에 스위스 프리부르크국제영화제에서 먼저 시사된 뒤 카를로비 바리국제영화제에 초청된 건데, 프리부르크에서는 관객의 반응이 상당히 좋았던 반면에 프리부르크국제영화제에서는 좀 냉랭했다. 어느 기자의 말을 인용하자면, “소비에트체제에서 막 벗어난 우리에게 냉전테마의 영화는 테마 자체부터가 관심도를 떨어뜨렸다. 그리고 한국영화를 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줄거리도 좀 낯설었다”고 한다.한편, <베를린 리포트>의 상영날 체코 주재의 한국대사관 쪽에서박 감독과 상의도 없이 경쟁부문의심사위원들을 점심식사에 공식 초대하여 영화제 쪽에서 매우 놀라워했었다. 물론 박 감독에 대한 대사관측의 친절은 이해가 가지만 일반적으로 영화제의 심사위원을 개별적으로 식사에 초대하는 것을 금지돼 있다는 걸 미리 알았더라면 그런 외교적 실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 문제는 한국영화의 해외진출이 드물었던 시절에 생긴 조그만 에피소드에 지나지 않지만, 한국영화의 발전과정에서 그런일도 있었다는 걸 기록에 남기기 위해 쓰는 것이다.영화제가 끝날 무렵에 나는 박광수 감독, 안성기 배우와 함께영화제의 조직위원장인 이리 멘젤 감독의 사무실을 찾았다. 멘젤감독은 1968년 스위스 바젤의 시립극장에서 연극감독으로 몇 달동안 활동하면서 내 시뉘의 집에서 살았었는데, 시뉘의 안부를전하고 박 감독과 안 배우를 소개하기 위해 대담시간을 미리 약속해 놓았었다.그 무렵 멘젤 감독은 영화를 만들 돈이 없어서 코스타 카브라스의 <작은 묵시록>의 주인공을 연기하는 배우로 로마에서 촬영을하다가 영화제 때문에 잠깐 카를로비 바리에 머물고 있었다. 나는 박 감독과 안 배우를 소개한 뒤 체코영화의 장래에 대해 그의의견을 물어봤다. “현재 재질있는 젊은 감독들이 맹활약을 하고있어 장래는 밝다고 본다. 거기다 한동안 서구영화에 빠져들던관객들이 차츰 자국영화에 관심을 돌리고 있다. 그렇지만 관객의수입만으로 영화 제작비를 충당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체코영화는 시장을 국제적으로 넓혀야 하는데, 물론 국제적 관객을 위해영화를 만들자는 게 아니고 진정 체코영화를 만들면서 인간관계라든가 삶의 가치관에 있어 세계적 보편성을 가진 영화를 만들어야한다”라고 그는 대답했다. 그러면서“내 영화(<거지의 오페라>,1990년 작)가 한국에 팔렸다고 들었는데, 나도 한국에 갈 수 있기를 바란다”며 일어섰다. 우리를 만나 뒤 그는 로마로 떠났다.참고로, <거지의 오페라>는 작가 바클라프 하벨의 소설을 영화에 옮긴 것으로 백두대간 영화사의 대표 이광모 감독이 한국에수입하였다. 그리고 멘젤 감독과 대화를 나눈 5년 뒤 멘젤 감독은 전주국제영화제의 2007년 인디비전 경쟁부문의 심사위원으로 초대되어 전주를 방문했다. 그와 더불어 그의 세 편의 명작 <줄위의 종달새>, <가까이서 본 기차>, <거지의 오페라>는 전주국제영화제의 시네마스케이프 부문을 통해 감독이 참석한 가운데상영됐다. 그뿐 아니라 멘젤 감독은 이광모 대표의 초청으로 서울에 있는 백두대간 영화사의 상영관에서 서울의 관객들과 만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