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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5 |
전주MBC창사45주년특별기획전 남천 송수남 전주초대전
관리자(2010-05-03 18:54:15)
전주MBC창사45주년 특별기획전 남천 송수남 전주 초대전 묵향에 담긴 무념무상(無念無想)의 세계 - 이철량 전북대학교 교수 지난 1981년 가을이었다. 9월 중순쯤 어느 날 선생님으로부터 전화가 울렸다. 다음 달 말쯤 전시회를 해야 할 것 같으니 작품을 준비하라는말씀이었다. 가급적 대작이었으면 좋겠다는 말이 더 얹혀졌다. 그렇게 이루어진 전시가 <수묵화 4인전>이었다. 대학을 갓 졸업한 어린 제자3인과 함께한 전시였다. 이 전시는 당시 많은 사람의 관심을 받았다. 수묵이라는 용어가 전시 타이틀로 등장함으로서 신선한 감동을 주었던것으로 생각된다. 이전의 동양화나 혹은 산수화 등의 이름으로 해왔던 전시와 사뭇 다른 개념이었다. 그리고 교수와 20대 어린 제자들과의 전시가 또한 흥미를 더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한국수묵화운동의 선구자 이후 수묵이라는 이름의 전시가 자주 등장하게 되고,또한 많은 작가들이 참여했다. 당시 젊은 평론가였던 유홍준은 이를‘수묵화운동’이라고 불렀고 이후 언론은수묵화운동을 일반화했다. 한국미술에서 수묵화운동은그렇게 시작되었다. 수묵화운동은 한국미술 역사상 처음으로 등장한 미술운동이었다. 이후 민중미술운동이나페미니즘미술운동 등 미술에 운동이라는 단어가 덧붙여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수묵운동은 송수남과 동일개념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송수남은 왜 동양화나 한국화라는 이미 보편화된 개념의 용어들 대신에 수묵이라는 단어를 내세웠을까? 그때까지만 해도 수묵은 실상 동양회화에 있어서 중요한 매체였고, 또한 단순한 매체를 떠나 하나의 정신으로 이해되고 있었다. 그래서 사실 그리 중요한 의미를갖지 않을 수 있었지만 그는 먹이라는 질료의 본격적인탐색과 분석을 통해 현대미술로서의 새로운 가치를 발견해 내었기 때문이었다. 그를 통해 한국 수묵화는 역사적 가치로서가 아니라 현대라는 시대미술로서의 의미를갖게 된 것이었다. 남다른 도전정신과 실험정신 그가 먹만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7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이다. 1975년 스웨덴 동양박물관 전시를 끝내고 그는 작품의 변화를 가져왔다. 이 전시 이후1978년 뉴욕 개인전에서는 그의 이름과 항상 같이 붙어있는 수묵만으로 작품을 만들었다. 이때 그의 말은“내가 외국에 나가보니까 먹이 아니면 안 되겠더라”라는것이었다. 스웨덴 전시를 통해 유럽 등 여러 곳을 여행하고 서구미술의 정체성을 색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 색에 대응할 수 있는 것은‘동양의 먹’뿐이라는생각이었다. 그렇다고 그가 이전의 작품들 속에서 먹을많이 쓰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초기 그의 수묵은 발묵(發墨) 즉 번지기에 의한 추상작업이었다. 선을 풀고 먹을 살려내는 이러한 작업은 그 무렵 대체적인 동양화의현대적 표현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점점 색을 들여오기시작했다. 오히려 색이 먹을 주도하는 경향이 보이기도했었다. 특히 스웨덴 전시 작품은 색채가 화려했던 발색산수였었다. 분방하고 광활하게 색을 펼쳐냈던 산수는한국에서만 보면 매우 새로운 경향의 산수화로 보였다.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순수한 먹만의 로의 변화에 주목하기시작한 것은 당연했다. 그의 수묵은 그렇게 해서 지난 2005년경까지 다양한 실험으로 이어졌다.그런데 그의 수묵 행보는 2005년 개인전 이후 색채 속으로 다시 들어왔다. 그의 화려하게 펼쳐지는 꽃들의 색채가아직은 낯설게 느껴지는 것은 그가 오랫동안 한국 현대미술에서 수묵인으로 인식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노년의 회귀에 대해서는 세간의 관심이 남다르다. 어떻든 그는 오랜 시간 수묵의 길을 걸었고, 그 길은 한국미술의 한 시대를 걸어갔던 것이었다. 선의 경계를 넘어 무념의 세계를 보다 남천이 수묵의 세계에 살았고 그 수묵이 다시 색채로 변화해 가는 모습은 어쩌면 한 인생의 삶의 여정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는 전주 흑석골에서 태어났다.당시의 흑석골은 남고산 자락의 외진 곳이었다. 작은 시내가흐르고 그 시냇가에는 한지를 만드는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초등학교를 다니기 시작하면서 전주 시내로 나왔고, 이후 교동의 터 넓은 한옥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공업고등학교를 다니면서 그림을 그려 홍익대 서양학과에 입학했다. 이때는 수채화나 유화를 했었다. 그가 흑석골에서 나는 화선지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대학 재학 중군대를 다녀와 동양화과로 전과를 하면서 이다. 그렇게 보면그의 동양화 학습은 사실 다소 늦게 시작된 것이라고 할 수있다.이번에 전시된 50년대 경기전을 그린 수채화 작품과최근의 꽃을 그린 색채화가 연결 고리를 갖고 있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가 왜 동양화과로 전과를 결심했는지는 초기 그의 작품들 속에서 읽혀진다. 초기 그의 작품은 선염(渲染)이 농후(濃厚)한 발묵을 이용한 추상이거나 혹은 이 발묵속에서 색채로 혹은 먹으로 한옥이나 한국적 내용들이 메시지처럼 담겨있다. 그가 수묵이라는 것과 한국적인 것의 만남을 위해 얼마나 고심하고 있었던 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어쩌면 서양에서 들어온 유화로는 우리 것을 드러내는데 적절하지 않다고 보았을지도 모른다. 그가 한국과 한국인의 그림에 대해 얼마나 고민하고 노력했는지는 이후 수묵작품 속에서 충분히 읽혀진다.그의 수묵이 줄곧 산수의 표현에 초점을 두고 있는 것이그렇다고 생각된다. 초기 추상에서 산수로 돌아온 배경에서도 그의 고뇌가 엿보이는 부분이다. 가장 전통적 소재의 산수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내야한다는 목표는 뚜렷해 보였다. 수세기 동안 우리미술의 중심에 있었던 산수를 어떻게이 시대에 새롭게 구현해 낼 수 있는가 하는 생각, 그리고 한국미술의 정체는 수묵에 있다고 보는 확고한 믿음은 많은 고뇌 속에서 얻어진 것이다.남천 송수남이 이 시대의 대표적인 수묵화가로 확고하게인식된 계기는 아마도 1981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렸던한국현대수묵화전에서 보여준 <산> 그림이었다고 생각한다. 이 작품은 진한 농묵과 담묵의 대비로 처리된 아주 단순한 형태의 산 모습이었다. 산수화 표현의 획기적 변화와 현대적 조형을 보여준 작품으로 많은 주묵을 받았다. 무엇보다도 먹이라는 질료의 독특한 발언이었다. 이렇게 현대수묵의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던 그는 이후 80년대 중반 <나무>라는 작품으로 독자적 세계를 확고하게 열어놓았다. 나무라는 작품은 우리 들녘혹은 가로수로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포퓰러가 서 있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나무의이미지와 수묵이라는 매체의 놀라운 조화,그리고 현대조형과의 만남은 수묵화의 새로운 경지를 열었다는 평가였다.이후 그는 화면의 조형적 한계를 건너 순수 표현의 세계로 들어간다. <붓의 놀림>이라는 작품에서 보여주듯 그의 회화는 이제 그린다는 개념을 털어 버렸다. 오로지붓질의 행위만 남게 된다. 마치 한자락 회오리가 언제 지나간 듯 그의 붓은 시작도멈춤도 끝도 없이 흔적만 남아있는 그런 모습이었다. 무념의 세계를 보여준 것이었다. 사실 그의 이 작품들은 매우 정교하고분명한 계획이 있다. 그러나 이런 내밀한계획은 아무도 들여다 볼 수 없도록 꾸며져있다. 툭툭 치고 가는 점들이나 일정하게그어져가는 선들의 반복은 무념의 세계 그것처럼 보인다. 어쩌면 조용히 혹은 큰 바람이 한창 일고난 후 다시 화려한 꽃의 세계가 펼쳐진 듯하다. 선(禪)의 경계를 넘어새로운 인식을 보게 되는 것인가? 남쪽하늘을 닮은 남천(南天) 송수남 그는 남쪽하늘과 남쪽바다를 좋아했다.그가 호를 남천(南天)이라 하고 고향을 바라보았던 삶은 매우 격정적이었다. 스스로남쪽바다 다도해를 좋아한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남도의 다도해를 즐겨 그렸다. 남쪽하늘의 태양처럼 그의 성격은 불같았다.한곳에 머무르지 못하고 항상 정점만을 추구했다. 그의 불같은 성격은 때때로 이웃을불편하게 한 경우도 있었지만, 예술가로서의 진정성은 누구도 그를 부정하지 못한다.그는 때때로 외로워했던 듯하며, 그럴 때면남쪽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가끔 전주를 들려 주변의 산천을 둘러보곤 했다.그는 전주가 낳은 한 시대의 진정한 예술가였고, 이 시대가 요구하는 작품을 만들려최선을 다한 작가였다. 이철량 1952년 전북 순창에서 나고, 홍익대 미대에서 동양화를 공부했다. 송수남과 수묵화4인전, 그리고 수묵화운동을 함께했다. 현재는 전북대교수로 재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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