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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5 |
안중근 순국 100년 특별전 침략신사, 야스쿠니
관리자(2010-05-03 18:54:48)
안중근 순국 100년 특별전 침략신사, 야스쿠니 (3월 25일~6월 12일)전주역사박물관 경술국치 100년, 과거사 반추(反芻)와 미래비전 찾기 - 김민영 군산대학교 교수 올해는 경술국치와 안중근 의사 순국 100년을 비롯하여 4.19혁명 50주년, 한국전쟁 60주년 등 격동기의 굵직한 사건들을 통해 과거를 반추(反芻)하며 미래비전을 찾아야 하는 해인 것 같다. 물론 이들 사건들은 한국사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 하지만 이제 지역 차원에서 의미를 재발견하며그 외연을 확장시켜야 하는 시기라 생각된다. 그러한 의미에서도 지난 3월 하순에 시작하여 6월 중순까지 계속될 전주역사박물관의 특별전은뜻 깊다.2002년‘전주학’을 표방하며 개관하여 늘 세심한 기획과 충실한 운영을 자랑하더니, 이번에도 지방에서 접하기 어려운 무게감 있고 시의적인전시회를 준비했다. 안중근 의사 순국 100년과 경술국치 100년을 맞아 <침략신사, 야스쿠니>전을 마련한 것이다. 안중근 의사 순국 100년을 기리며 안중근 의사의 독립정신 재조명과 야스쿠니 신사 바로알기를 통해 동아시아의 평화적 미래를 위한 새로운 방향모색이라는 문제의식과 함께 전통도시 전주에서 개최하는 지역적 의미를 가미한 기획이 돋보인다.전시는 전체 4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에서는 일본의 근대국가 형성과정에서 천왕이 대중들에게 숭배의 대상으로각인되어 가는 천왕제 구축과정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2부에서는 전주에 세워진 신사를 비롯하여 식민지 체제의형성과정에서 신사의 건립과 참배 및 그 거부운동 등을 소개하고 있다. 특히 3, 4부에서는 야스쿠니 신사의 탄생에서 그확장과 패전 이후의 상황을 비롯하여 야스쿠니 반대운동의의미와 투쟁과정을 제시하고 있다.2009년 11월 국회도서관에서 1주일 정도 전시했던 내용인데, 이를 2010년 경술국치 및 안중근 순국 100년을 기리며 2개월 이상 전시하는 전주박물관의 역사적 안목과 기획력에 깊은 경의를 표하고 싶다. 식민지조선을 짓누른 침략신사(神社)와 야스쿠니의 모순성 1910년 조선을 강제병합한 일제는 무력탄압과 경제침탈은물론 민족말살을 그 주요한 특징으로 한다. 특히 조선어 사용금지, 일본어 교육, 창씨개명, 신사참배 강요 등 일련의 민족말살정책은 제국주의 유형 가운데 가장 악명 높은 것이었다.특히 신사(神社)는 1910년 이전 전국에 이미 12곳이 건립되어 있었고, 초기 개항지인 부산에 만들어진 것이 최초였다. 1899년 5월 1일에 개항한 군산에도 이미 1902년에 건립되었다. 이는 일본인과 어부들이 해로수호신(海路守護神)인 금도비라신(金刀比羅神)을 주신으로 만든 것이었다. 이후1915년에는 다이쇼(大正) 천황의 즉위를 기념하기위해 새롭게 군산신사 창립을 결의하기도 한다.여기에서 신사는 문자 그대로 신을 제사지내는 조직체와그 건조물을 말하는데, 사궁(社宮), 신궁(神宮), 씨신사(氏神社), 사(祠) 등이 있었다. 신을 제사지내는 신전을 본전(本殿)이라 불렀다. 특히 우리와 관련해서는 천황제와 연계되어 패전 전까지 일제의 특별한 보호를 받았고, 민족말살의 일환으로 그 참배가 강요되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 연장선상에서징용과 징병 등이 강제되고 있었던 것이다.한편 식민지시대 전북지역의 일본인 숫자에 대해 알아보면, 해방 1년 전인 1944년 5월 현재 전라북도에 재주한 일본인은 3만 3천명을 넘고 있었다. 당시 전라북도의 총 인구수가 167만명을 넘고 있었으므로 대체로 2% 정도에 이르고있었던 셈이다. 이를 각 부군별로 나누어 보면 군산 옥구지역의 경우 1만 1천명을 넘고 있었으며, 전주 6,909명, 익산5,794명 순이었다. 특히 군산 옥구지역은 전체 인구 가운데일본인이 25%를 넘고 있어 당시 한반도 전체에서도 그 비중이 높은 곳으로 손꼽힌다.이 시기 국내에서도 유명했던 전통도시인 전주 다가산 부근에도 신사가 만들어지는데, 완공되었던 해가 1914년이다.당시 전라북도 장관을 비롯하여 지역 유지들이 기금을 거출하고 땅까지 기부하여 공사에 착수되었다고 알려지고 있다.이후 일제는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키면서 아예 1도 1신사(神社), 1면 1신사(神祠)의 설치를 강요한다. 1945년 6월현재 전라북도 내에 있던 신사를 보면, 그 중심체로서 국폐소사인 전주신사가 있었고, 10개의 일반신사, 24개의 신사(神祠)로 모두 34개나 있었다 하니 그 숫자에 놀라지 않을 수없다.한편 1945년 패전을 맞이한 일제는 그 며칠 후인 8월 18일 총독부의 지시로 전북지역의 주요 신사에서 승신식(昇神式)을 행하고, 본전(本殿)과 신체(神體)를 소각한다. 하지만전주신사의 경우 의식을 행한 이후 본전은 가소각하고 신체는 신사 바로 뒤에 있는 산중에 옮겨 신관(神官)이 봉사(奉祀)를 계속하며 지켰다 한다. 이후 미군정하인 11월 8일 허가를받아 일본으로 가져갔다 하는데, 이는 한반도내에서도 유일한 경우였다 한다. 기타 많은 신사들은 학도대나 한국인들에의해 소각을 당한다(태인, 남원 등).당시 미군정하에서 신관의 귀국을 확인까지 했던 정책이었음을 볼 때, 전후 미군정이 천황제와 연계된 황국사관을 일정하게 비판한 것으로 이해된다. 전후 일본의 신도는 정교(政敎)가 분리되지만 신사에 대한 전통적 신앙은 고스란히 남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군국주의의 상징, 야스쿠니 신사 이러한 침략신사는 야스쿠니에서 절정에 달한다. 야스쿠니는 천황이나 황족은 물론 천황을 위해 전사한 일반인들을 모시는 신사이다. 즉 신사이긴 하지만 일반신사와 달리 천황을위해 희생된 자를 모시기 위해 육해군성의 요청에 따라 설립된 일종의 군사시설의 성격을 띠고 있다.야스쿠니에 묻힌다는 미명하에 많은 식민지 청년들이 전쟁터에서 죽임을 당해 이곳에 합사되어 있는 것이다. 더욱이문제는 A급 전범 14명도 합사되어 있으며, 여기에는 태평양전쟁 때 군인과 군속으로 강제동원된 한국인들이 2만명 넘게 영문도 모른 채 합사되어 있다는 모순적인 현실이다. 잔재된 과거사에 조금 더 관심을 기울여야 경술국치 100년을 앞두고 일본의 이시하라 신따로 도쿄지사는 최근‘한일강제병합은 한국이 선택한 것’이라며 또 다시 망언을 했다. 그는 얼마 전에도 일본의 식민통치가‘부드럽고 공평’했다는 망언을 서슴지 않았다. 문제는 이러한 발언이 의도적이며 세력권을 형성하고 있고, 젊은 세대들에게적잖은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해방 65년을 맞고 있지만 전후처리에서 과거사문제에 이르기까지 그 상처는 아직도 아물지 않은 채 남아있어, 어쩌면 우리는 지금 2차 세계대전의 마지막 전쟁을 치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바로 그러한 시기에 이번 전시회에서 우리는무엇을 교훈으로 얻을 수 있을까?그간 활발하게 움직였던 과거사 관련 위원회의 활동도 요즈음은 위축된 느낌이다. 하지만 과거가 중요한 것은 그것이언제나 새로운 시작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번 특별전시회를통해 과거를 정확히 알고 미래를 가늠하는 지혜를 찾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전주역사박물관의 특별전시회 관람을 마치고 문을 나서면서 온몸에 흐르는 전율과 함께‘과거에서 역사적 반성과 비전을 찾지 못하면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갈 수 없다’는 생각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김민영 군산대학교 환황해연구원장과 한일민족문제학회장을지냈다. 현재는 군산대 교수로 재임 중이다. 식민지시대를 전후로 하는 시기의 동아시아 경제사를 전공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일제의 조선인 노동력수탈 연구』를 비롯해 군산-장항선 철도 연구, 금강 하구의 나루터 포구 등 사회경제사 관련 30여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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