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6 |
[테마기획] 그리운 갯벌_문학 속 갯벌
관리자(2010-06-03 11:15:13)
그리운 갯벌_문학 속 갯벌
이 땅에 내린 축복의 뻘밭
- 장창영 전북대학교 겸임교수
개펄, 갯벌, 개뻘
서둘러 바다로 향한다. 시선이 바다에 닿기 이전, 내 코가갯벌 내음에 먼저 점령당하고 나서야 비로소 여정은 끝이 난다. 창을 내리는 순간, 치열하게 몸부림치며 웅얼거리던 바다의 상처들이 와락 안긴다. 드디어 갯벌이다.그 곁에만 가도 가쁜 숨결을 토해내는 바다에 비해 갯벌은너무 잔잔하다 못해 소소하다. 그렇기에 갯벌은 최종 목적지라기보다는 바다로 가는 길목이거나 잠시 들른 정거장같은느낌을 준다. 그래서인지 우리 문학에서 갯벌 자체가 주목의대상이 되었던 경우는 흔치 않다. 계절마다 푸르름을 지천으로 날리는 육지나 바라보기만 해도 눈이 시린 바다만으로도쓰고픈 말이 넘쳐나는 작가들 입장에서는 갯벌에까지 시선을 두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다행스럽게도 갯벌은 간혹 제가치를 인정해 주는 눈 밝은 이들에게 주목 받는 행운을 누리기도 했다.
沈香을 만들려는 이들은, 산골 물이 바다를 만나러 흘러내려가
다가 바로 따악 그 바닷물과 만나는 언저리에 굵직굵직한 참나무
토막들을 잠궈 넣어둡니다. 침향은, 물론 꽤 오랜 세월이 지난 뒤
에, 이 잠근 참나무 토막들을 다시 건져 말려서 빠개어 쓰는 겁니
다만, 아무리 짧아도 2~3백년은 水低에 가라앉아 있는 것이라야
향내가 제대로 나기 비롯한다 합니다. 천 년쯤씩 잠긴 것은 냄새
가 더 좋굽시요. 그러니, 질마재 사람들이 침향을 만들려고 참나무
토막들을 하나씩 하나씩 들어내다가 육수와 조류가 合水치는 속에
집어넣고 있는 것은 자기들이나 자기들 아들딸이나 손자손녀들이
건져서 쓰려는 게 아니고, 훨씬 더 먼 미래의 누군지 눈에 보이지
도 않는 후대들을 위해섭니다.
- 서정주, 「沈香」부분
‘침향’은 굴곡 많은 시간이 켜켜이 쌓여 만들어낸 기적이다. 앞다투어 분초를 재가며 조급함에 내달리는 현대인들로서는“아무리 짧아도 2~3백년”뒤에 올 후대를 생각하며 참나무 토막을 갯벌에 담그는 자체가 호사롭기 짝이 없다. 하지만 우리 선조들은 당장 눈앞의 자기 이익이 없을지라도 언젠가 그 혜택을 볼 후손을 가늠하며 그 일을 기꺼이 감내했다. 서정주가 고향 언저리에서 발견해 낸‘침향’은 그런 애틋한 마음을 담은 선조들과 이를 올곧게 이해하는 후대의 교감이 빚어낸 선물이다. 그 교감의 출발은 누군가의 속내를 알아가는 일부터 시작한다.
얼음 서걱이는 갯벌에 한사코 고개를 처박아대는 물새의/ 저 고
갯짓이 실상은 먹이에 대한 경배라는 것을,/ 가슴까지 닿는 노란
물장화를 신고 겨울 뻘밭에서 바지락 캐는 여인네들의/ 저 몸짓이
실은 먹이를 위한 오체투지라는 것을,
- 복효근, 「먹이에 대하여」부분
시인 복효근은 물새의 몸짓에서 먹이에 대한 경배를 떠올린다. 그의 시선에 잡힌 물새는 어느새 생존의 세계를 넘어서 우리가 도달할 수 없는 저편에 놓여 있다. 그것은 바지락을 캐는 여인네들의 몸짓이 그려내는 오체투지, 즉 온몸을다 던져야만 얻어지는 외경의 세계와 치열하게 닿아 있다.그것은 우리가 그동안 삶의 현장에서 망각하고자 했던, 그러나 결코 외면할 수 없는 냉혹한 현실 속 우리 삶의 얼굴과 닮아 있다. 스쳐 지나가는 이방인들에게는 그저 밋밋해 보이기까지 하는 이 거무튀튀한 공간은 생명의 보고이자 바다를 배경으로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튼실한 밑천이다. 이 경계의 공간은 섬이나 해변가에 속한 이들에게 어린 자식을 키우는 든든한 텃밭으로, 한 가정의 생계를 책임지는 몫을 톡톡히 해냈다. 그리고 그 한 켠에는 바다 근처에서“갯물에 쩔어 버린삭신이 조생이 한 자루로 뻘밭을 밀고 가던/ 홀몸 조개미 아짐”(박영근, 「해창에서」)도 함께 살을 부비며 살아내게 만든고독한 현장이기도 했다
뻘, 수평과 수직의 진원지
시인 함민복은 한국 현대시사에서 갯벌의 무궁한 가능성에 주목한 몇 안 되는 시인이다. 그는 뻘에서 부드러운 힘이갖는 위대함과 도발적인 역설의 미학을 발견해 낸다. 그가뻘에서 발견한 것은 뻘의 원시적인 생명력, 그 생명력의 이면에 존재하는 부드러움이 빚어내는 강인함과 살아 있음에대한 동경이다. 푸근한 느낌을 주는‘벌’의 편안함과 달리‘뻘’은 좀 더 원색적이고 강렬한 인상을 던져 준다. 그래서인지 갯벌은‘뻘’이라고 내심 힘을 주어 발음을 해야 제 맛이난다. 함민복은 원색적이고 생경한 냄새가 풀풀 풍기는‘뻘’의 한 켠을 점령하고 있는 무수한 구멍들과 그 구멍을 속속들이 채우고 있는 생명체에 주목한다.
부드러움 속엔 집들이 참 많기도 하지/ 집들이 다 구멍이네/ 구
멍에서 태어난 물들/ 모여 만든 집들도 다 구멍이네/ 딱딱한 모시
조개 구멍 옆 게 구멍 낙지 구멍/ 갯지렁이 구멍 그 옆에도 또 구
멍구멍구멍/ 딱딱한 놈들도 부드러운 놈들도/ 제 몸보다 높은 곳
에 집을 지은 놈 하나 없네
- 함민복, 「뻘밭」
그가 주목하고 있는 것은“딱딱한 놈들도 부드러운 놈들도/ 제 몸보다 높은 곳에 집을 지은 놈”이 없다는 사실이다. 고층빌딩을 위시하여‘수직’을 앞세운 고도 논리에 익숙한 우리들에게 낮은 곳을 향하는 수평의 미학은 그래서 더 신선하게다가온다.‘ 더높이’를외치는인간들에비해자신보다낮은 곳에 머무는 겸허와 온유 앞에서 시인은 갯벌을 지탱해온 또 다른 원동력을 깨닫는다.구멍을 집으로 삼는 갯벌의 생명체와 달리 인간들은 갯벌에 뿌리 내리지 못한 채 영원한 이방인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인간에게 갯벌은 모시조개나 낙지 등 속을 건네주는 역할 이상의 의미를 갖기 어려웠다. 심지어 갯벌은개간사업이라 하여 바위나 암석을 온 몸으로 받으면서 땅으로 변하는 수모를 감내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갯벌은 그 무게를 외면하거나 타박하지 않고 자신을 도륙하는이나 찾아드는 이들에게 자신의 일부를, 때로는 운신할 수있는 터전을 기꺼이 내어 주었다. 이처럼 포용과 인내, 관용과 베풂이야말로 갯벌 내면에 자리한 부드러움의 위력이자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갯벌의 위대함이 아닐 수 없다.갯벌이 되어간다는 것바닷가에 머물면서 가만가만 귀를 기울이면 바람소리만큼이나 갯벌 내음이 방문을 더듬거리며 따라오는 소리가 들린다. 때로 그것은 아주 오래 전에 기억 저편에서 웅크리고 있다가 누군가를 닮은 목소리로 들려오기도 하고, 그걸 바라보는 내 눈을 멀게 만들기도 하곤 했다. 그래서인지 갯벌은 사람들의 시선을 오래 담지 못하고 이내 바다로 흘려보내곤 했다. 시인 정양은 갯벌에 도달하지 않고도 갯벌이 전해주는이야기를 온몸으로 감지해내고 있다.
어금니 갈아 끼우는 동안/ 한 달 가까이 조개 속살을 먹고 살았
다/ 이 세상에는 무슨 조개들이 그리 많은지/ 노랑조개나 모시조
개, 꼬막이나 생합이나 바지락말고도/ 이름 모를 벼라별 조개들을
먹는 김에 다 먹어 보았다/ 초장에 찍어 날것으로도 먹고 구워도
먹고/ 쌀과 녹두를 섞어 죽을 쑤어 먹기도 했다
그 중 제일로 많이 먹은 게/ 흔하고 값싸고 맛있는 바지락이다/
먹을 때는 전혀 몰랐는데 삼시세끼 조갯살만 먹고/ 한 일주일 지
나면서부터는 트림을 하거나/ 방구가 나올 때마다 희한하게도 그
속에서/ 매콤시큼한 갯벌냄새가 나곤 했다
- 정양, 「갯벌냄새」부분
시인 정양은“잡아도 잡아도 흔전만전 잡히는 갯벌의 그바지락이/ 아닌게아니라 오장을 윤택하게 하고 눈도 밝아지고/ 정력에도 좋고 술독 푸는 데도 그만이라고”읊조린다. 하기는 한달동안 바지락에 흥건히 몸을 적셨으니 그런 말이 나올 법도 하다. 하지만 그가 정작 그리워하는 건 그가 조개와함께 보낸 한 달이 아니라 바다에 근원을 둔 갯벌의 생명력이다. 그 생명력에 의존해 살아온 한 달이라는 시간은 평생을 육지의 삶에 길들여진 시인이 생명력의 또 다른 원천인바다로 변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의 시간이다.시인은 한 달 가까이 바지락을 먹으며 자신이 갯벌을 닮아가다가 마침내 갯벌이 되는 꿈을 꾼다. 단군신화의 웅녀가그랬듯이, 어쩌면 고문일 수도 있는 그 반복 행위 속에서 시인은 자신이 갯벌의 일부가 되었음을 감지한다. 그리하여 자신의 방구에서‘매콤시큼한 갯벌냄새’를 동일시하는 독특한체험을 맛보기도 한다. 시인은 추억을 안고“변산반도 그 옆구리에 있는/ 사람들 바글바글 모여드는 바지락집을/ 시도때도 없이 자주 찾아가곤 하지만/ 그 정도로는 트림을 해도똥을 누어도/ 정다운 갯벌냄새가 나지 않는다”고 토로한다.그가 바다의 일부가 됨으로써 맛본 그 농밀한 내적경험은 갯벌의 부산물을 통해 얻은 선물이자 이미 그의 몸 속 구석구석에 스며든 대자연의 수혜이다.
다시 갯벌에서
갯벌은 젊다. 너무 젊기에 매일 새 피를 수혈받지 못하면며칠 사이에 몸 한 켠부터 송두리째 썩어 들어가기 시작한다. 우리는 갯벌이 숨소리도 제대로 못 내고, 제게 날아오는새들이며 고기들에게 인사도 건네지 못하던 순간을 기억한다. 서해안 시프린스호의 기름 유출 때의 일어난 한 장면이다. 우리는 불과 몇 시간 전까지도 꼬물꼬물 사방으로 숨구멍을 밀어대던 것들이 기름띠가 덮이자마자 거대한 침묵으로변해가는 모습을 손 놓고 봐야만 했다.이 대목에서 부안 새만금 방조제 건설현장을 둘러싸고 터져 나왔던 갯벌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한반도 전체를 격렬한 논쟁에 휩싸이게 만들었던 이 사건에 대해 시인 박남준은 피 토하는 심정으로 다음과 같이 부르짖었다.
싱싱한 것들로 온통 번쩍이는 생명으로 꿈틀거리는/ 저 소중한
선물의 뻘밭/ 살아서 아름답게 흘러 온 것들 흐르는 대로 두어야
하듯/ 밀물과 썰물로 들고 나는 뻘밭의 바닷길을 막아서는 아니
되네/ 이 땅에 내린 축복의 뻘밭 우리 아이들에게 돌려주어야 하
네/ 그 뻘밭의 바다에 무릎꿇고 입맞추며/ 엎어지고 자빠지며 내
달리게 해야 하네
- 박남준, 「저주가 있으리라」부분
그의 말대로 갯벌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전용물이 아니다. 이 지상의 모든 것들이 그러하듯이 갯벌은 앞으로 이땅에 뿌리 내리고 살 아이들이 그러안고 가야할 또 다른 세계이자 터전이다. 그가 또 다른 시에서“무릎꿇지 않으면 귀기울이지 않으면”「( 누가 저 바다에 금을 긋는 것이냐」) 보이지 않는다고 했듯이, 우리들은 개발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폭력 앞에 생생하게 눈 부릅뜨고 지켜보아야만 한다. 그런 점에서 그가“이 땅에 내린 축복의 뻘밭 우리 아이들에게 돌려주어야 하네”라는 고해성사는‘자본’이라는 신 앞에 무릎을조아리는 우리에게 던지는 이 시대의 화두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화두는 멈추지 않고 4대강 개발이라는 또 다른 얼굴로 우리 곁을 서성이고 있다. 아직 다하지 못한 우리들의 이야기를 머금은 채.
장창영 1967년 전주에서 태어났다. 전북대학교 국어교육과를졸업하고 국어국문학과에서 박사, 서울대학교 국어교육과에서박사후 과정을 이수했다. 중국 산동대학교 초빙교수를 거쳐 현재전북대학교국어국문학과겸임교수로있다『. 전북일보』『, 불교신문』,『 서울신문』에시와시조가당선되어작품활동을시작하였으며 시집으로는『동백, 몸이 열릴 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