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6 |
임안자의‘내가 만난 한국영화’ - 배우 안성기
관리자(2010-06-03 11:18:54)
임안자의‘내가 만난 한국영화’
배우 안성기
“나는 평생 배우로 남고 싶습니다”
- 임안자 영화평론가
이번의 글은 안성기 배우에 대해서다. 그런데 글이 쉽게 써지질 않는다. ‘그에 대해서라면 나보다 독자들이 더 잘 알고 있을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쓰려는 것은 내가유럽에서 만난 안 배우의 인간성과 유럽의 영화전문가들이 말하는 안성기의 연기력에 대한 평가에 관하여 한번쯤은 짚고 넘어갈 필요성을 느껴서다.
배우 안성기와의 인연
나는 1989년에 안 배우를 영화 <칠수와 만수>의 화면을 통해 처음으로 봤다. 그리고 1991년에 한국영화진흥공사에서 일하면서 페사로국제영화제의 집행위원장을 따라 정지영 감독의 영화 <화이트 배지>의촬영장에서 그를 직접 만났다. 약간수줍은 듯한 그의 얼굴에 잔잔히 퍼지는 얇은 미소 때문이었는지, 그의첫 인상은 부드럽고 따뜻해 보였다.솔직히 그때까지 나는 안 배우가 누구인지 전혀 몰랐었다.그러고 나서 페사로국제영화제에서 다시 만났을 때는 50여 편의 한국영화를 보고 난 뒤여서 화면의 안성기에 대해선 나름의 판단력이 생겼다. 여성관객들이 한국영화의 남자 주인공들이 대부분 난폭하고 잠자리에서마저 여성에게 부드럽지 못하다고 나쁘게 말했을 때 그들의 지적을 부인하지는 않았지만, 배창호감독의 영화 <기쁜 우리 젊은 날>의 주인공은 그렇지 않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안성기 배우가주인공으로 나온 이 영화를 보면,한때 자기를 버렸던 혜린(황신혜)과결혼하여 아기자기한 가정을 이루는 애처가 영민(안성기)이 집안청소를 하고 베란다에서 빨래를 너는 장면이 나오는데, 80년대만 해도 화면에서 자주 만나는 한국남성의 모습은 아니었다.페사로국제영화제 다음에 안 배우를 다시 만난 곳은 카를로비 바리국제영화제에서였다. 그는1992년에 영화 <베를린 리포트>의 주연배우로 박광수 감독과함께 카를로비 바리국제영화제에 초청되었던 건데, 그 해는 이들둘 말고도 뜻밖에 문화체육부 영화담당자와 한국영화진흥공사의해외담당자, <베를린 리포트>의 모가드 제작자 등 대여섯 명이영화제에 참가했었다. 그러나 나는 주로 박 감독이랑 안 배우와함께 일정을 맞췄고, 영화를 보다 저녁 늦게 호텔에 돌아갈라치면 안 배우가 먼저 너무 어두우니까 같이 가자면서 박 감독과 함께 나를 호텔까지 데려다 주곤 했다. 한번은 셋이서 폴란드 감독블라디슬로프 파시코프스키가 연출한 추리극인 영화 <크롤(Kroll)>을 보다가 거기서 우연히 주인공으로 나왔던 보구슬라브린다를 만났다. 린다는 바르샤바대학의 연극교수이고 노장 안제이 바이다 감독의 영화에서도 자주 주인공 역을 맡았던 폴란드의이름난 배우였다. 우리는 그 영화가 끝난 뒤 옆의 맥주집으로 가서 체코의 유명한 버드와이저를 마시며 밤늦도록 폴란드와 한국의 영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린다는 한국의 담배 맛이 아주좋다면서 박광수 감독의 담배를 계속 피웠고, 안 배우한테 한국과합작영화가 가능하다면 둘이서 한번 같이 출연하고 싶다고 했다.
배우 안성기의 첫 해외 헌정시사
내 생각에 안성기 배우의 연기력에 주목하고 그걸 유럽에 알린첫 인물은 페사로국제영화제의 전 집행위원장인 아드리아노 아푸라였다. 그리고 1년 반쯤 지나 페사로국제영화제에 참석했던 아미엥국제영화제의 집행위원장인 장-피에르 가르시아 역시 안 배우의 믿음직스러운 연기력에 이끌려 그를 위한 헌정시사회의 프로그램을 짜기에 이르렀다.장-피에르 가르시아는 1992년의영화제 카탈로그에 안성기 배우에대해 <조용한 아침의나라의 아들>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쓰기를“안성기는 프랑스의 배우들에 비교하자면 알랑 드롱의 몸체에다 연기는 제라드 드파르디외에 가깝다고 말할수 있다. … 그는 연기의 영역을 넓히기 위해 끊임없이 연구하는, 자질이 뛰어난 배우로서, ‘어둠의 호남아’, ‘익살스러운 광대’, ‘코안경의겁쟁이’, ‘승려’, ‘긴 수염의 군인’등 한국사회의 이질적인 여러 층의 인물들을 연기한다. 그러나그의 관심의 대상은 사회적·경제적으로 밑바닥의 사람들이고,그들에 대한 심리적·사회적 묘사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준다. 그런 면에서 안성기는 미국 배우 로버트 드 니로에 가깝다”라고 극구 칭찬을 했다. 실제로 안 배우가 가장 좋아하는 외국 배우는 로버트 드 니로와 더스틴 호프만이었기에 그의 지적은 적절했다.나는 페사로국제영화제에서 가르시아 집행위원장을 처음 만났다. 안성기 배우의 인터뷰를 도와주면서 그를 알게 됐고, 그게인연이 되어 안성기 헌정시사에 참가하여 영화제 기자들과의 불어 인터뷰를 맡았었다. 1992년 11월 11일에 나는 그때까지는 전혀 가본 적이 없었던 아미엥으로 떠났다. 바젤에서 파리의 동역까지 기차로 5시간, 그리고 파리의 북역으로부터 아미엥까지 다시 한 시간 반 정도의 긴 여행이었다.불란서의 서북쪽에 있는 아미엥은『80일의 세계일주』의 작가쥘 베른의 고향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한때 고풍스러웠던 도시는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심한 폭격으로 완전히 파괴됐고, 그 자리에 50년대 새로운 건물들이 들어섰으나 몇 십 년이 지난 뒤에도도시의 곳곳에 전쟁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그런데다 날씨마저 싸늘해 도시의 분위기는 을씨년스러웠다. 아미엥은 아마도 내가 가본 영화제의 개최지들 중에서 가장 초라한 곳이었다. 다만, 시의중심지에 우뚝 서있는 성당은 지금까지 투덜댔던 불평을 다 잊게해줄 정도로 아주 아름다웠다. 13세기에 지어진 이 고딕양식의노틀담은 프랑스에서 가장 큰 성당이자 오늘날‘세계의 문화유산’에 속한다. 듣자니, 이 성당의 건축미를 보려고 해마다 수십만명의 관광객들이 몰려든다고 한다.성당 다음으로 아미엥을 국제도시로 만든 것은 1980년에 설립된 아미엥국제영화제(Festival International du Film d’Amiens)이다. 유럽의 여러 영화제를 다니다 보면 대개 그 나라의 수도, 아니면 관광도시로 이름난 곳에서 영화제가 열리기 마련인데 그런 면에서 아미엥국제영화제는 이것도 저것도 아니어서 오로지 프로그램으로만 승부를 걸어야 할 처지이었다. 게다가아미엥국제영화제는 여느 영화제에 비해 가난한 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는 영화제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역시 프로그램의 독자적인 구상과 무관하지 않다.
가르시아 집행위원장은 아미엥국제영화제의 설립자들 가운데 한 명이다. 그의 영화제 철학은 영화문화의 다양성이고, 그런 소신으로 그는오대륙의 소수민족 영화들을 꾸준히 소개해왔다. 1992년의 테마는미국 흑인감독들의 독립영화들이었고, 그것을 계기로 여덟 명의 젊은미국 흑인감독들이 영화제에 참석하여 10편의 영화를 소개하면서 관객과의 토론과 영화평론가들과의워크숍 등에도 참여했다. 흑인영화하면 존 싱글턴, 스파이크 리 정도를 생각하다가 이들보다 더 중요한,그러나 할리우드의 유명세를 타지못한 감독들이 상당히 많다는 사실을 나는 아미엥국제영화제에서 이들과 직접 부딪히면서 알게 됐다.아미엥국제영화제는 전통적으로경쟁부분보다 헌정시사에 더 무게를 두어왔다. 1992년 역시 고작 장편 및 중편영화 20편 그리고 14편의 단편영화가 경쟁부문에 올랐던반면에 헌정시사(Hommage)는 세개나 됐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배우안성기의 몫으로, 이를 통해 안성기주연의 일곱 편 영화가 프랑스에서는 처음으로 소개됐다. 일곱 편 영화는 <꼬방동네 사람들>, <칠수와만수>, <기쁜 우리 젊은 날>, <개그맨>, <꿈>, <안녕하세요, 하느님>,<하얀 전쟁>이었고, 이 영화들의제작연대기는 1982년부터 1992년까지다. 한마디로 10년간 안 배우가출연했던 숫한 영화들 가운데서 연기력이 돋보이는 일부가 보인셈이었지만, 안 배우 본인이 가장 중요시 하는 <만다라>, <바람불어 좋은 날>, <고래사냥> 세 편 영화는 안타깝게도 그 속에 들어있지 않았다.프랑스는 뛰어난 배우들을 수없이 낳은 나라인데도 관객은 안배우의 연기력에 매우 매혹된 듯 시사 때마다 긴 박수를 보냈다.한번은 관객의 박수에 감동한 안 배우가 고맙다는 표시로 객석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그 순간에 관객 측에서“오!”하는 소리가 터졌다. 안 배우가 잠이 든 둘째 아들을 안고 서있었던 것이다. 그 다음날 그곳 일간지에는“훌륭한 배우에 좋은 아버지이다. 그는 한국의 제일가는 배우인데도 아주 겸손하다. 일부건방진 프랑스 배우들이 그로부터 배울 점이 많다”라고 쓰여 있었다.프로그램 이야기를 끝내기 전에 영화전공 독자를 위해 한마디덧붙인다. 아미엥국제영화제는 영화서적의 긴 출판경력을 가지고 있다. 대개 이 방면의 전문서적 작가들과의 공동집필을 통해책들을 출간하는데, 내가 알고 있는 두 권의 책자를 여기서 소개해 본다. 하나는 50년대 미국에서 극우파를 중심으로 일어났던반공정책의 상징인 매카시즘이 할리우드 영화에 끼친 영향을 분석한『큰 위협, 1990(La Grande Menace)』인데, 이 책은 프랑스평론가협회로부터 출판상을 받았다. 그리고 둘째는 미국인디언의 정체성 파괴에 앞장을 섰던 할리우드의 인종주의를 신랄하게 파헤친 역작『인디언과 영화, 1989(lesIndiens et le Cine’ma)』이다.
국민배우 안성기
안 배우는 영화계에 일하시던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다섯 살 때 김기영 감독의 영화 <황혼열차>에서아역을 맡은 뒤부터 16살 때까지 팔십 여 편의 영화에 출현하였다. 그후 대학에서의 전공은‘베트남어’였고, 베트남 전쟁이 끝날 무렵에 군복무를 끝마쳤다. 베트남의 통일은베트남어 전공자들에게 일자리의전망을 어둡게 했다. 안성기는 제대이후 한동안 직장문제로 방황을 하다가 결국 충무로로 다시 돌아와 영화 <병사와 아가씨들>에 청년배우로 등장했다. 그러나 이 영화의 상업적 실패로 빛을 보지 못했고, 그뒤 한두 편에서 조연배우로 출현했으나 그것마저도 성공하지 못했다.패배감에 빠져있던 그에게 재도약의 기회를 준 사람은 바로 이장호 감독이었다. 그의 영화 <바람불어 좋은 날(1980)>에서 안성기는 중국음식점의 배달원으로 나오는데 시골에서 서울로 올라온어수룩한 총각인‘독배’의 밑바닥 삶을 아주 실감나게 연기했다.이 영화는 그 해 대종상영화제 각 부문의 상들을 휩쓸었을 뿐만아니라 흥행에도 성공하여, 배우 안성기의 인기는 이때부터 높이치솟기 시작했다. 물론 80년대에 들어서면서 유난히도 주연급 중년배우가 모자랐던 충무로의 내부사정도 그의 빠른 인기 상승에한 몫을 했다. 한편, 80년대 중년배우가 드물었던 것과 같이 90년대에 가서는 영화계의 구조적 재조정과 젊은 감독들의 등장으로 갑자기 중년감독들의 작품이 눈에 띄게 줄어드는 현상이 나타났다. 특히, 안 배우의 초기 연출에 대부의 역할을 했던 이장호,배창호 감독들의 경우는 심각할 정도로 사정이 나빠져갔다.“안 배우는 어떤 감독과 어떤 시나리오를 가지고 일하느냐는물음에 아주 신중하다. 그러나 한번 감독과 약속한 영화는 비록이익이 없다 하더라도 촬영작업이 끝날 때까지 자리를 지키고,절대 한꺼번에 두 영화에 출연을 하지 않는‘철저한 자기관리의철학을 가진 배우’이다. 그의 강한 공동작업 정신은 영화계에서다 알려진 사실로, 특히 후배배우들에게 그는 따뜻한 형이자 풍부한 경험의 선배이다.”이건 내가 만난 여러 영화감독들 또는 영화제작자들한테서 직접 들은 소리며 영화전문잡지의 기자들 평을 옮긴 것이다.앞에서 아미엥국제영화제의 가르시아 집행위원장이 지적했듯이 안배우는 한국사회에서 살아가는 동시대인들의 삶을 고루고루 반영해왔다. 그는 남·북한의 분단문제와30여 년의 군정권, 그리고 숨 가쁜경제성장의 그늘 밑에서 성장한 현대인의 일그러진 모습을 영상을 통해 사실적으로 나타냈고, 대부분 승자보다는 패자의 역에 더 관심을 보여 왔다.안 배우는“배우라서 행복하다”고했다. 그래서 평생토록 배우로 남고싶어 한다. 5~6년 전 부산국제영화제의 김동호 집행위원장님의 후계자 문제가 수면 위로 또 떠올랐을때다. 김 집행위원장님은 어느 날외국의 영화제 친구들과 함께하는술자리에서 자랑스럽게“내 후계자중의 하나는 안성기 배우”라면서 그옆에 앉았던 안 배우를 외국 친구들에게 소개했다. 그런데 안 배우는“아닙니다. 저는 배우가 좋습니다.평생 배우로 남고 싶습니다. 다른일은 제 직업에 방해가 되지 않을때 생각해볼 문제입니다”라고 겸손하게, 그러나 다부지게 대답했다.마침 같은 자리에 앉아있던 나는 안배우의 말을 들었을 때, “그러면 그렇지, 안 배우다운 대답이다”라고생각했다.아미엥국제영화제의 가르시아 집행위원장이 페사로에서 안 배우와가졌던 인터뷰에는 이런 질문이 들어있다. “당신은 한국에서 제일 잘생긴 배우라고 생각하는가?”그에 안 배우는“나는 미스터코레아가 아니다. 특별이 잘났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가끔씩 거울을 들여다보면 뭐 저 정도면 되지, 하는 정도다. 그러나 당신의질문은 한국의 영화사와 연관시켜 볼 때 아주 중요하다. 전통적으로 한국영화에서 주역은 미남에게 주어졌었다. 즉 이들은 스타였다. 그건 자동적으로 과연 나도 주역을 맡을 수 있느냐는 질문으로 이어지는데, 나는 잘생긴 스타가 아니라 성격 배우라고 스스로 평가하며 나를 통해 주역이 미남에게만 돌아가던 전통은 깨졌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영화의 분위기는 나 때문에 차츰 달라지기 시작했다.”오늘날 안성기는 한국의‘국민배우’로 불리고 있다. 90년대 중반『씨네21』에서 안 배우에 대한 특집기사를 내면서 처음으로‘국민배우’라는 호칭을 붙여줬다고 하는데, 안 배우는 이 영광스러운 호칭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불편해 한다.2000년대 초『맥스무비』와의 인터뷰에서 그는“나는 그냥‘안성기’하면 제일 편안할 것 같다. 괜히‘국민’자가 붙으니까 겸연쩍은 것도 있다”라고 하면서 평범하게 살기를 원했다.유럽에서 국민배우의 대우를 받는 배우는 거의 없다. 만약 있다면 이탈리아의 세기적 명배우인 아르베토 솔디(1919~2003)가 그에 가장 가까운듯하다. 솔디는 펠리니를 포함한 이탈리아의 이름난 영화감독들과 함께 일하면서 150편의 영화에 출현했다. 어느평론가의 글을 인용하자면, “그는 이탈리아 국민의 미덕과 결점,또는 사랑스러운 점을, 칼의 약한 부분에서 칼끝까지 희극 형식을 빌려 나타내 보인 이탈리아 민중의 배우이다.”솔디는“내 얼굴에는 이탈리아 국민의 온갖 표정이 다 새겨져 있다”라고 말할정도로 동시대인들의 정서를 시시각각 나타내 보인 배우였고, 이탈리아 영화인들은 그를 존경한 나머지‘국민의 우상(Nationalicon)’으로 대우했다. 이제 솔디의 이야기를 안성기의 이야기와연결시켜 보면, ‘국민’이라는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안 배우 본인이 꺼려하는‘국민배우’보다는 솔디의 호칭에 가까운‘민중의 우상’이 안성기 배우에게 더 잘 어울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비록 그가 아직 150개의 얼굴을 그리지는 않았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