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6 |
[내인생의멘토] 내 가치관의 뿌리_아버지 필봉 양순용
관리자(2010-06-03 11:19:16)
내 가치관의 뿌리_아버지 필봉 양순용
푸진 굿, 푸진 삶 속에 울려 나오는 그의 소리
- 양진성 임실필봉농악보존회장
‘…당신은 저 가난한 마을의 꽃이었습니다. 당신의 가심으로 이제 저 들은 비고 저 하늘 끝은 서럽고 설움 많은 농부들의 가슴은 텅 텅 비었습니다. 들리십니까. 저 필봉 마을 당산굿 치고 샘굿치고 집집마다 마당 밟고 모닥불 돌며 펑펑 울려라, 펑펑 울려라. 고깔은 펑펑 퍼지고, 꽃띠는 훨훨 날리고, 상모는 빙빙 돌던 신명나는 굿 소리가 들리십니까. 아, 당신은 타오르는 불길을 필봉산너머로 훨훨 불 지르던 바람이셨습니다. …’
- 김용택 시인의 인간문화재 양순용 영전에 바치는 글 中에서 -
나의 스승, 나의 아버지
흔히 인간을 망각의 동물이라고 한다. 보편타당해 보이는이 명제 때문인지 우리는 자신의 인생에서 너무도 많은 것을잊고 살아가는 것만 같다. 당연히 잊어야 사는 것이 진리이기도 하지만 소중한 가치마저 습관처럼 잊어 왔던 것은 아닌지 반성하게 된다. 무엇보다 가까운 곳에서 일방적인 사랑을베풀었다는 이유로 쉽게 아버지의 존재를 잊고 지내오지는않았는지 되돌아보게 된다. ‘잔소리’의 원천으로 치부되기쉬웠던 어린 시절의‘아버지’에 대한 추억이 스멀스멀 가슴을 때려오는 것은 이유 있는 울림이 있기 때문인 것만 같다.어쩌면 지금 이 울림은 변화에 대한 요구이자 세월의 흐름을 알고 계셨던 아버지의 조언인지도 모르겠다. ‘종합적인신명으로서의 전통 풍물굿의 계승’을 바라셨던 아버지의 조언처럼 풍물굿의 본래 모습을 찾아내어 삶의 주체자로서 민중들이 갖고 있었던 잠재력의 모습을 찾아내는 일이 필자에게는 사명과도 같은 과제로 남게 되었다.
아버지로부터 이어진 꿈
일찍이 서쪽으로 붓끝이 모아지듯 산자락이 정상을 향해반듯하게 모인 필봉산 자락의 산간 농촌마을을 세인들은 필봉리라 하였다. 이곳에는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평범한 촌부가 있었으며, 작은 변화가 큰 변화를 이끌어 낸다는 것을믿고 있었던 한 사람의 신념이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바로내 가치관의 뿌리인 아버지가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필봉으로부터 우리의 소리, 풍물굿을 꿈꾸고 있었다.가난한 농민으로 오로지 풍물만을 생명으로 여긴 아버지께서는 일찍이 필봉마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풍물굿에 유달리 관심이 많아 풍물굿 소리가 나면 집에 가는 것도잊고 풍물패 뒤를 따라 다녔다고 한다. 바로 이때부터 아버지의 풍물 인생은 시작되었던 것이다.나 또한 아버지를 닮아 나면서부터 보고 자란 것이 풍물이라 초등학교 4학년 때야 전기가 들어온 마을에서 어른 풍물을 흉내 내느라 양철통을 두드리고 무동(舞童) 역할을 도맡아 했었다. 그래서 지난 2008년 겨울은 필자에게 잊지 못할의미 있는 해가 되었다. 바로 아버지의 뒤를 이어 보유자로선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때의 감회는 말 그대로의 만감의교차였다. 아버지의 어려웠던 삶을 딛고 선 느낌을 지울 수없었기 때문이다.소용돌이 속에서도 지켜낸 풍물굿돌아보면 어려울 때일수록 아버지께서는 더욱더 손에서풍물을 떼지 않았다. 오히려 시골 면소재지에 5일마다 열리던 갈담장에서는 밤이 늦도록 풍물을 치시던 때가 많았다.그럴 때마다 육남매 장남이었던 나는 장날이면 한사코 걸어가 아버지를 매번 모시고 와야 했다. 생각이 어리던 시절이라 당시에는 아버지를 많이 원망도 하였고, 그 원망만큼이나장날을 없애는 것이 소원이기도 했다.훗날 아버지는 세인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게 됐지만 겉으로 드러난 예능보유자로서의 화려한 수식어구와 다양한수상경력에 비해 아버지의 현실은 끊이질 않는 가난과 안환(眼患), 그리고 미신타파의 미명 아래 풍물굿을 배격했던 70년대와 80년대 군부독재 시절의 조사와 탄압, 아울러 일부주민들의 질시와 협소한 전수 공간 등에 맞물린 곡절로 소용돌이친 삶을 살다 가셨다.그러나 필봉농악의 상쇠로서 아버지의 삶은 실로 불꽃이요, 상모 끝에 휘날리는 바람과 같았다. 그리고 아버지는 아버지로서, 선생으로서, 인생 선배로서, 그리고 친구로서 나에게는 조건 없는 후원자이자 아낌없이 나누어 주는 사람이었다.가난했던 시절, 지독하게 가난했기에 아버지는 풍물만큼은 푸지게 치시길 원했고 진정으로 푸진굿을 통하여 푸진 삶에 대한 희망의 메시지를 남겨줬다. 그리하여 나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위대한 유산, 풍물굿의 미학을 오늘날 온 세상 사람들과 함께 하고자 한다. 분단 조국을 넘어 세계를 향하여 필봉굿의 정신을 널리 알리는데 앞장설 것이다.풍물굿의 미학은‘푸진 것, 나누는 것’이라 생각한다. 돈이푸진 것이 아니라, 쌀이 푸진 것이 아니라, 사람이 푸지게 모여야 되고, 말(言)도 푸져야 하고, 악(樂)도 푸져야 하고, 술(酒)도 푸져야 한다. 무엇보다 열심히 사는 사람들의 삶과 마음이 제일로 푸져야 하는 것이다. 그 푸진 것들이 모인 사람들 모두의 것으로 나눠지는 곳이 판이고, 나눠지게 하는 것,그것이 바로 풍물굿이다. 그 어떤 물질보다도 소중한 웃음을, 눈물을, 마음을 나눠 갖는 것이다. 내가 꿈꾸는 필봉굿의앞날은 한결같다. 바로 푸진 것을 만들고, 푸진 것을 나누는사람이 더 많아지기만을 바랄 뿐이다.돌이켜보면 이 세상 그 어떤 어록보다도 진실되고, 그 어떤 서적보다도 실용적인 삶의 모습을 보여주셨던 아버지였기에 진정으로 가치관에도 뿌리가 있다면 내 가치관의 뿌리는 아버지에 기인한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신명의 자리, 아버지의 빈자리가 선명할수록 눈앞에 그려지는 아버지의 형상에 나직이‘아버지’라 불러보게 된다. 칠흑 같은 어둠의 적막을 가르던 아버지의 풍물소리가 유년시절 어머니 무릎을 통해 귓가로 전해지는 듯 아직도 선명하기만 하다.
양진성 우석대 국악과를 졸업, 단국대 대학원과 전북대 대학원에서 각각 석·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77년 전주대사습놀이 장원, 1978년에는 전국민속경연대회 농악부문 장원을 차지했다.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11-마호 예능보유자로 현재 임실필봉농악보존회 상쇠이자 보존회장으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