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7 |
[서평] 『술꾼의 품격』
관리자(2010-07-05 13:35:27)
『술꾼의 품격』
책의 품격과 수명
- 정윤천 시인
은유(隱惟)의 재 너머에 있는 환유(幻惟)의 나라를 꿈꾸며 사는 세외(世外)의 사람인 시인들에겐, 문학적(여기에선 시적이라고 해야 하나) 언사로쓰이지 않은 책이거나 문건 등속들에겐 어딘지 낯설어 하거나 심드렁해 지는 게 사실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밑구멍 빠진 현학이거나 정치성 발언의 팸프릿, 연설문 쪼까리들 앞에선 정말로 심각하게 죽음을 고려하기도 한다(물론 뻥이겠지만). 그런 의미에서 우리 시대‘보국안민’의 모든문장은 월요일 새벽 거리에 맵찬 찬바람이 지난밤의 풍속을 쓸며 지나가고 나자마자 앞을 다투어 출몰하는 가판대 위의 스포츠 신문들 속에 들어 있는지 모른다. 수명 30분 정도의 글짓기들이 머리에 피를 흘리며 각축하는 것이다. 야구장에 불이 났는지? 무슨‘특급 소방수’가 현신했다는 식이다.
술과 영화를 만나다
아마 모든 물상에는 수명과 역사가 배어 있다. 500년이 넘는 명고(明顧)가 전해 오는 반면‘여대생 대기’같은 하루살이의 저작물들이 홍수를 이루는 속에서 스스로‘품격’에 관한 논의가 재생산 되는 것을 지켜보기도 한다. 누군가의 시집이 나왔다는 소식이 도착하는 즉시“어디서 나왔지”부터묻게 되는 것이다. 시집이 출간되는 출판사부터 따지는 것이다. 아마도 시집은‘어디서’나와야 하는지를‘즈그’들이 먼저 알고 있다는 눈치다. ‘' 어디서 나온’시집만 시집 취급을해주는‘올바른 세상’에서….오늘은 퍽이나 흥미롭고도 요망스럽기(?)까지 한 저술인『술꾼의 품격』을 자의반 타의반으로 손에 들게 되었다. 장정의 첫 인상이 우후청의 골목길만큼이나 싱그럽다. 책의 상단. 소주잔을 입 안에‘완샷’으로 처박아 넣고서 다른 손에벌써 맥주잔이 들린 채로 허공을 응시하는, 대낮부터 맛이간 듯한 사내의 모습이 거꾸로 박혀져 있다.빨간색 제자로 된 책명이 배열된 중앙을 지나 하단에 이르면, 이국풍의 젊은 신사가 테이블 안에서 칵테일을 제조하고있는 중이다. 바야흐로 신사는 술이 담긴 용기를 이제 막 허공으로 던져 올렸다. 잠시만 기다려 주면 그 안에서‘별이 떨어’질 것 같았다. 25가지의 술과 영화에 관한 이야기란다.
현대판 주집 혹은 주보
저자는 신문사에서 오랫동안 기자를 했고, 그동안 남보다열심히 죽지 않을 만큼 술을 마셨고, 나중에는 영화기사를쓰기 위해 영화를 쭈욱 살피게도 되었는데(되게 부러운 인생으로 읽힌다) 신문사를 그만 둔 뒤에는 영화 쪽의 일을 맡다가 어느 날 취몽사몽 중에, 앗싸 가오리, 자신과 제일 가까이서 놀아준 글과 술과 영화를 불러다가 이 책의 근간을 장만하게 되었다는 발설이다(어쩌면 자랑 같기도 하고). 아무튼저자의 저술은 자신의‘술과 영화의 귀환’으로부터 비롯되었다.“술은 크게 둘로 나누어 발효주와 증류주인데, 유럽에선 포도주를 증류하여 브랜디를 만들었고, 중국은 청주를 증류해 백주를 마셨으며, 아일랜드에선 맥주로 위스키를…. 사탕수수를 발효시킨중남미에선 럼이 나왔고, 용설란을 담가 마셨던 멕시코의 풀케가나중에 데킬라가 되었다.”(서문에서 발췌)여기까지만 오는 동안에도 나는 벌써 이 문장이 이백 년전에 쓰인 누군가의 저작과 닮았음을 한 눈에 간파할 수 있었다. 주집(酒集)이거나 주보(酒譜)였던 것이다. 그것도 전대미문의, 그렇게 그는 자신의 영화 속에서 술을 검색하고 탐미한다.18세기 초입에, 조선이라는 왕조에서 일어난 천주학의 박해 뒤끝은 당대의 실팍한 실학자였던 정약전을 멀리 흑산도에 유배시킨다. 재밌는 것은 이 왕조의 적지 않은 명서(明書)들이 신하들의 귀양처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그 역시 움쩍달싹 못하는 처지에서, 임범과 같았을‘술’대신에 바다를 들이킨다. 마셨다기 보다는 숫제 들쑤시고 다닌다. 그러다가결국‘괴기의 품격’일지도 모를『자산어보』를 만대에 길이남겼다.거기에서도 이런 식이다. 오징어는 까마귀를 잡는 고기라는 의미의 오적어(烏敵魚)에서 유래하였다. 물 위에 죽은 척누워 있다가 까마귀가 쪼으려 오면 순식간에 열 개의 발로감아서 물속으로 끌고 들어간다. 등등의 언술이 바로 그것이다.책의 맨 뒷 장에는 4개의 표4 글이 매달려 있다. 유독 그중 하나가 마음을 끈다. “느긋한 일요일 아침 배달되어 오던신문에 실린 임범의 글에선 술 냄새 대신 아릿하고 알싸한‘시대’의 냄새가 났다. 읽노라면, 영화 속 술이 등장하는 장면과 그 술의 유래, 그 술을 마시던 기억과 지금이 어우러져저마다의 시대가 눈앞에 다가든다.”모 방송인이 보인 이 책에 바친 헌사다. 나는‘시대’라는 낱말이 개인적으로 깊게 여겨진다. 아마 이백 년의 시대가 흐른 뒤에도 이 책은 제 나이를 늘리며 살아가지 않을까. 임범 표 주보(酒譜)로서의 가치와 수명으로.
정윤천 90년도에 <실천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생각만 들어도 따숩던 마을의 이름』,『 흰 길이 떠올랐다』,『 탱자꽃에 비기어 대답하리』,『 구석』등이 있다. 작가회의 회원, 시전문 계간지『시와 사람』부 주간 등을 역임하며 작품활동을 하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