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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7 |
[내인생의멘토] 그 인연들이 다 스승이었던 것을…
관리자(2010-07-05 13:38:19)
그 인연들이 다 스승이었던 것을… 이제야써보는반성문 - 김저운 소설가 나는, 내게 스승이 없었다고 늘 생각했다. 내 인생의 지침을 확 돌려놓은 사람, 내가 글을 쓰는 데 크게 도움을주거나 이끌어 준 사람이 없었다고 여겼다. 외롭게, 서툴게, 나 혼자 일구어 왔다고 아쉬워했다.그런데, 이제 되돌아보면 전혀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나의 오만이었다. 나의 게으름이었다. 나의 이기였다. 터덕이며 혼자 가는 길이었지만, 그 사이사이의 어느 지점에 나를 바라본 눈빛이 있었다. 내 손을 잡아 준 손길이 있었다. 내 귓가에 들려온 노래가 있었다. 그럼에도 어디쯤에선가 인연이 멀어진 것은 단지 내 게으름 탓이었다. 어느 날 우연히 둘째 언니의 일기장을 보게 되었다. 그속에서 나는 또 하나의 세계를 만나게 된다. 매일“아빠!”로 시작된 언니의 일기는, 마치 그분-유복녀인 나에게 아버지의 존재는 막연한 그분이었다-과 대화하듯 엮어져 있었다. 막 일기를 쓰기시작했던나도언니흉내를내기로했다.“ 아빠! 오늘도안녕하세요? 오늘은 무지개가 떴는데요, 마치 예쁜 다리 같았어요. 그 다리를 타고 하늘로 가면 아빨 만날 수 있을까요?”.그러면서 막연했던 그리움이 점점 구체적으로 변해갔다. 어린것이 청승맞게 외로움을 앓기 시작했다.일찍부터 객지에 나가 있었던 큰언니는, 이곳저곳 거처를옮겨 다니던 터라 집에 다녀갈 적이면 당장 필요치 않은 물건들을 맡겨두곤 했다. 호기심이 발동했는지 그 상자 하나를열어보았더니 거기 편지가 가득했다. 당시 군대에 가 있던애인-지금은 형부가 된-으로부터 온 것과 언니가 연습한 답장들이었다.“시몬! 오늘은 무척 당신이 그리워요. 이 꽃들이 다 지기전에 보고 싶어요.”언니가 그러면, 언니의 애인은 또“정선씨가 보내 준 마른 꽃잎에 코를 대 보았어요. 정선 씨의 향기를 맡는 듯했어요.”그런 식이었다. 그 편지들 사이에서 발견한 구르몽의 <낙엽>이란 시를 보고서야‘시몬’이 호칭인 줄알았다.나도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비밀 노트를 만들어‘미지의 벗에게’로 시작하여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우정과 애정이 혼재된 내용이었던 것 같다. 특정한 대상이 있을 리 없는 어린 나이였다.일기를 쓰고 편지를 쓰면서 나의 문장은 냇물처럼 조잘대며 흐르기 시작했다.대학에 입학한 후, 당시 부안여고 교감이던 김형주 선생님이 편지를 보내셨다. 예비고사, 본고사를 거쳐야 대학에 진학할 수 있어 예비고사 합격률로 학교의 우열을 가리던 때였다. 작가가 되려면 대학에 가야하고, 경제적으로나 실력으로나 어려운 형편이어서 가까스로 야간대학에 가게 되었는데,선생님께서는 그런 내가 기특했던 모양이었다. “좋은 글을써서 훌륭한 작가가 되라”던 선생님의 말씀은 열등감에 빠져주춤거리던 내게 큰 힘이 되었다.선생님은 그 후 부안여고 교장으로 재직하시다가 퇴임 후에는 문화원장을 역임하시는 등 향토사학자로 부안의 문화발전을 위해 많은 일을 하셨다. 십여 년 전 부안에서 한 번뵙고는 그 후로 찾아뵙지를 못했다. 발간하신 책도 보내 주셨는데, 채 읽지도 못한 상태에서 누가 당장 참고할 게 있다며 빌려간 후 돌려받지 못했다. 책을 읽어야 뵐 수 있을 것같아 미루던 것이 어느 새 수년이 흘러 면목이 없게 되어 버렸다.대학신문사 기자였던 때 동문 탐방 기사를 쓰기 위해 황송문 시인을 찾아 서울까지 갔다. 그때만 해도 시인을 만난다는 건 풋내기 대학생에게 특별한 사건이었다. 황 선생님은내가 쓴 서툰 기사를 흡족해 하셨고, 시집을 발간하실 때마다 편지를 동봉하여 보내 주셨다. 지금 생각하면 아마도 괜찮은 작가가 될 것으로 믿어공부를 시키셨던 것 같다.나는 졸업하자마자 선생이되었는데, 부지런하지 못한천성으로 일상에 매달려 소설에 집중하지 못했다. 그렇게 한두 해 흘려보내면서 그저 써 본 수필 한 편을 어느 날 선생님께 보내드렸는데, 선생님은 그 글을 몹시 칭찬하셨다. 그렇게 써 본 수필로 나는 소설가 이전에 일단(?) 수필가가 되었다. 실은 당장 소설가가되기 어려우니 먼저 수필가가 되어 보자는 유치한 생각에서출발한 것인데, 한번은 선생님께서 그런 나를 은근히 질책하셨다. 좋은 수필을 쓰려면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데,그런 내가 좀 건방져 보였는지도 모른다. 소설로 등단한 후에는 어쩐지 선생님께 송구스러워서 미루고, 삶의 우여곡절로 또 시간이 흐르고…. 그러면서 오래 선생님을 뵙지 못했다. 지금은 선문대에 계시고, 선생님의 수필창작론에 그때의내 글이 실려 있는 것도 알고는 있다. 그러면서도 나는 선뜻선생님께 달려가 못한 채 시간을 보내고 있다.본격적으로 소설만 써야겠다고 마음먹은 때가 있었다.삼십 때 초반, <현대문학>에소설을 응모했는데 초회 추천을 받았다. 이청준 선생님이 심사를 하셨다는 것을 뒤늦게 알고 용기를 내어 찾아뵙기로 했다. 한참 선생님의 소설에 빠져있던 때였다.선생님은 그때, 작가의 동네 이름으로는 어울리지 않는 서울의‘아시아선수촌 아파트’에 살고 계셨다. 나는 우미자 시인과 동행했는데, 학생기자 시절 황송문 시인을 만났을 때의설렘과는 또 다른 비장한 각오 같은 것으로 무장하고 있었다.선생님이 사시던 집은 정갈하고 고요했다. 선생님의 모습도 목소리도 그만큼이나 정갈하고 고요했다. 선생님은 내 글에 대해 몇 가지 간추려 말씀하셨다.“문장도 매끄럽고, 구성도 탄탄하고, 크게 흠 잡을 데는 없어요. 그런데요…. 뭔가가 부족해요. 탁, 끌어당기는 힘이랄까, 매력이랄까…. 한 마디로 너무 얌전하다는 것이지요. 신춘문예에 응모하면, 특별한 작품이 없을 때 무난히 뽑힐 수는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탁월한 글이 있으면 제켜지겠지요?.”어쩌면 더 지적을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를너무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그렇게 말씀하셨는지도…. 숨죽이며 듣고 있는데, 위층에선가 종이비행기 하나가 떨어져 베란다에 걸렸다. 그러자 선생님은 거기 시선을 두고 말씀을이으셨다.“소설을 쓰려면 탁월한 상상력이 필요해요. 가령 저 종이비행기를 가지고 생각해 봐요. 흔히 아이가 던졌다고 하겠지요? 헌데, 그러면 소설이 안 되지요. 이러면 어떨까요? 자주위층에서 종이비행기가 날아든다. 어떤 아이가 심심해서 그런가보다 여겼다. 그런데 어느 날 알고 보니, 위층엔 노인 혼자 살고 있다. 그 노인이 그렇게 이따금 종이비행기를 접어날린다…. 그러면서 전개시켜 나가야 이야기가 만들어지는것이죠. 이게 바로 소설적 상상력이지요.”선생님께서는 두어 시간 가량 그렇게 나직나직 일러주셨다. 그리고 그 즈음 펴내신 소설집 <남도南道사람>을 한 권건네주셨다.돌아올 때 선생님은 1층 현관까지 내려와 배웅해 주셨다.몇 걸음 걸어오다 뒤돌아보았더니 선생님은 그대로 서서 바라보며 손을 흔들어 주셨다.그 후에, <현대문학>에 다시 글을 보냈지만, 본심 심사위원은 다른 분들로 바뀌었고 글이 변변치 못했던지 소식이 없었다. 그러다가 다른 문예지로 등단한 바람에, 정말 제대로된 글을 쓰면 선생님께 들고 가야지 벼르다가, 또 세월이 흘렀다.선생님의 부음을 뉴스로 전해 들으면서, 나는 그날의 선생님 모습을 조용히 새겼다. 지극한 배려와 정성이 정갈하고고요하게 배어 있던 선생님의 모습은 나의 뇌리 속에 각인되어 있다. 거장은, 역시 요란스럽지도 오만하지도 않았다.그다지 크지도 넓지도 않은 인생이라는 밭에서, 이랑하나하나를 일구며 앞으로나가는 게 왜 이리 더딘 것일까? 이만큼만 해 놓고 고마운 사람들 안부도 묻고 눈빛이라도 주고받고 그래야지,하면서도 이곳저곳 돋우고 풀을 매다 보면 하루해가 짧고,저녁에는 고단해서 쓰러지는 격이랄까?지금, 막, 그분들이 그립다. 두 언니들. 김형주 선생님. 황송문 시인. 이청준 선생님. 이제야 뉘우치며 어른이 된 후 처음으로 반성문을 쓴다. 위대한 성인군자가 아니어도, 촌철살인(寸鐵殺人) 같은 말씀이 아니어도, 생애의 나날을 늘 함께하지 않았어도, 내가 살아온 순간순간 나를 지탱해 준 누군가가 있었음을 이제 알겠다. 그 인연들에 감사하고, 그 마음을 그때그때 전해야 한다는 것도 이제는 알겠다. 김저운 전주대학교 국어교육과를 졸업한 뒤 1985년『한국 수필』에 수필이, 1990년『우리문학』에 소설이 당선돼 등단했다. 저서로는『그대에게 가는 길엔 바람이 불고』가 있다. 현재 <전주영상미디어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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