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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영·전흥남의‘꿈꾸는 노년’
관리자(2010-07-05 13:38:28)
장미영·전흥남의‘꿈꾸는 노년’
한승원 소설에 나타난 노년의 당당함과 조화에 대하여
- 전흥남 한려대학교 교수
‘남도’와 인연을 맺으면서‘남도’의 작가와 문학에 대해 자연스럽게 관심이 기울여지곤 한다. 얼추 4~5년여 전쯤으로 기억된다. 학기 중에 학생들을 인솔하고 한승원 문학의 배경이 됐던‘장흥’을 답사할 기회를 가졌다. 이 때 노년의 작가 한승원을 직접 만나서 자신의 문학세계와 고향‘장흥’과 관련해서 여러 가지 도움말을 주고받았던 감회도 새롭다. 특히 한승원의 집필실‘해산토굴’을 방문했을 때 노작가는 추사 김정희를 소재로 한 장편을 한창 집필 중이었다. 노작가의 창작열과 에너지를 접하면서 우리 후학들은 작가에 대한 경외심(敬畏心)을 품었고, 스스로의 문학과 삶을 돌아보면서 왜소함을 동시에 느꼈던 기억도 새롭다.한승원 문학의 원형(혹은 샘터)이 되고 있는‘장흥’은 남도의 문학, 아니 우리 문학사에서 내노라하는 걸출한 작가들을 배출하기로 유명한 문학의보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3년여 전에 작고한 이청준은 한승원과는 문학의 도반이기 이전에 고향친구다. 똑같이 1939년생이지만 초등학교는 이청준이 1년 선배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작년 이맘때‘소설가 이청준 선생 추모학술대회’때에 외우 이청준에 대한 애잔한 그리움을 참느라고 애쓰던 그의 모습이 오버랩 된다). 장흥의 이러한 문학적 토양은 이승우를 비롯한 후배들이 문단의 맥을 이어가는데 자양분 구실을 톡톡히 해 주었을 뿐 아니라 왕성하게 창작활동을 하게 하는 동인으로 작용한 측면도 크다. 한승원은 역시 지금도 천관산의 서기(瑞氣)로움과 바다를 품에 안은 채 율산 마을에서 왕성하게 창작활동에 여념이 없는 현역 작가다. 철저한 자기 관리와 치열한 작가정신으로 무장(?)되어 있지 않다면 가능하지 않은 것이다. 여기서 더 이상 한승원의 개인사와 필자의 개인적 감상을 길게 논할 자리는 아닌 것 같다. 지면의 성격에 맞춰 노년소설 1~2편을 통해 노년의 삶에 대한 작가의 생각(혹은 세계관)의 일단을 추출하는데 주안점을 두어 접근해 보자.
때로는 당당함을 앞세워
한승원의 노년소설에 해당하는 작품으로는적지 않은 작품들이 있다. 우선「수방청의 소」,「저 길로 가면 율산이지라우?」, 「그러나 다 그러는것만은아니다」,「 감따는날의연통」,「 버들댁」,「 잠수거미」, 그리고「태양의집」등을노년소설의 범주에 넣을 수 있다. 위의 작품들은「태양의 집」을 빼고는 소설집『잠수거미』에 모두 수록되어 있다. 물론 위에서 열거한 한승원의 소설을 노년소설의 범주 안에서만 논의할 성격은 아니다. 위의 작품들은 일정 정도 고향을어떻게 그려내고 있으며, 또 여전히 고향을 한, 애증, 역사, 그리고 욕망의관점에서 그리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할 필요성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다 본질적으로는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삶의 면면을 통해서드러나는‘삶의 자리’역시 소중한 한 측면을 담아내고 있다는 점을 놓칠수없다. 특히열거한작품들중에서「수방청의소」,「 저길로가면율산이지라우?」,「 그러나다그러는것만은아니다」의작품에는98살의노모들이 주요 등장인물로 등장할 뿐 아니라 서사의 주체를 형성한다. 따라서 이러한 작품들은 노년소설의 범주 속에서 분석할 때 한승원 소설의 본질 해명에 보다 용이하고 효과적이라는 점만은 분명해 보인다. 우선, 「그러나다 그러는 것만은 아니다 」를 살펴보자. ‘백수를 한 해 앞두고 있는 허리기역 자로 굽은 노파를’둔 김명윤과 여섯 해전에 아내를 여윈 이장환은 죽마고우 사이다.애초부터 둘 사이가 친한 건 아니다. 이장환은개화를 한 아버지 덕택에 중학교 문턱을 디뎌보았을 뿐 아니라 사진관을 운영하면서 손톱밑에 떼를 들이지 않은 채 평생 베레모 쓰고카메라 걸치고 멋 부리며 살았다. 반면, 김명윤은 초등학교 문턱도 밟아보지 못했을 뿐 아니라 평생 고기잡이하고 짐승 키우고 논밭 일구면서 살아왔다. 예전 같으면 술자리 마주 앉을 수도 없었고 길거리에 만나도 고개나 까딱하고 지나치는 사이였지만 지금은 늙어 이 친구 저 친구들이 저승으로 떠나고 몇 남지 않아외로워져 조금씩 가까워지는 사이다. 수문마을과 율산 마을을 통틀어 동갑내기가 오직 두사람 남았을 뿐이다.그런데, 김명윤이 이장환의 행위에 대해 분을 삭이지 못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김명윤이노모를 대접한답시고 고운 한복을 한 벌 마련했다고 모시고 나가 순천만 갈대밭에서 앳된여자와 벌거벗는 모습을 망원렌즈로 카메라에담는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치밀하게 계산을 세워 비밀리에 실행에 옮겼는데발각되고 만 것이다. 일부러 노모와 20만원을주고 산 앳된 여자의 속저고리와 저고리의 고름, 속속곳끈, 속곳끈, 속치마끈, 치마끈 들을잘 풀리지 않도록 단단하게 마주 홀맺어 놓았다. 홀 맺힌 그것들을 푸는데 만도 한 2, 3분씩 걸리도록.그는 카메라 속에 노모와 앳된 여자가 옷을 하나씩 벗어가는 모습들을 담고,알몸이 된 두 여자의 모습, 속속곳과 속곳과 속치마의 끈을 푸는 모습, 알몸이된 앳된 여자가 노모의 알몸에 옷을 입하는 모습,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노모가앳된 여자의 옷 입는 것을 도와주는 모습, 노모가 앳된 여자의 알몸 여기저기를탐스럽다고 찬탄하면서 쓰다듬고 어루만지는 모습, 속속곳·속곳·속치마·치마를 차례로 입느라고 엉거주춤 일어서거나 엉덩이를 빼거나 몸을 외튼 모습, 치마를 허리에 두르며 발아래를 내려다보는 모습, 저고리를 입고 고름을 매는 모습,잘못 맨 것을 노모가 고쳐 매주는 모습들도 담았다.뿐만 아니다. 달콤한 매실주 석 잔에 노모는얼큰하게 취해 있었다. 이장환은 김명윤의 노모가 두 활대를 벌리고 앳된 처녀와 춤을 추는 모습들을 카메라에 모두 담았다. 그런데 이러한사실이 알려지면서 김명윤은 분노하고, 앳된 소녀가 그 일을 겪은 후 감기에 걸려 학교 측이 알고서 경찰서에 고소하는 사건이 생기게 된다.하지만 이 사건을 맡은 경찰은 이장환 노인의행위를 예술행위로 이해하고 두 사람의 화해를주선까지 해 준다. 김명윤 역시 경찰관의 간곡한 화해 권유와 주변의 설득으로 몇 가지 조건을 제시하고 잊으려 한다. 김명윤이 제시한 조건 중에는 노모에게 갈대밭에서의 무례한 행위에 대해 용서를 빌고 사진을 불태우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장환이 김명윤과 함께 노모에게 사죄하기 위해 찾아갔을 때 자초지종을 전해들은 노모의 반응은 의외다.안 된다이 절대로 안 된다잉. 그 사진 다 맨들어갖고 오너라이. 나 진작에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었어야. 장환이 이 사람이 사진에 미친놈이라는 것을이 근동 사람 쳐놓고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냐?잉? 나 그 사진 얼른 보고 싶다이. 그라고잉, 그것들 죽을 때 내 관속에 넣어 주라고 할란께 한나도뗀게 뿔지 말고 옴씨래미 다 가지고 오너라이. 죽으면은 썩어질 몸뚱이 사진으로 조깐 찍으면 어짠다냐? 잉? 느그 어메 살이 닳아진다더냐? 명이 짧아진다더냐? 사진기 눈깔이 느그 어메 살을 파묵는다더냐, 잉? 그날 나 얼매나 즐거웠는지 아냐? 이 늙은 몸뚱이가 아직 쓸모 있다고 생각한게 환장하게좋드라이. …(-중략-)… 그 가시내 젖통, 엉뎅이,눈, 코, 잎, 귀, 볼, 턱, 머리카락 들 참말로 참말로참개꽃같이 희고 보들보들하고 탐스럽다이. 다 찌그러진 몸뗑이하고 참깨꽃같이 피어난 몸뗑이하고, 그두가지 것 한번 맏대 보자이. 그 가시내 벗은 몸을본께 나 젊었을 적 일이 생각나드라. 내가 다시 싱싱해진 것같이 가슴이 수런거리고 환장하게 좋기만 하드라….(97~98쪽)노모의 늙은 몸과 앳된 여자의 싱싱한 몸이라는 선명한 대비로, 육체된시간에 종속된 존재의 외형임을 알 수 있다. 그 외형의 변화가 늙음, 낡음,망가짐과 문드러짐에 이른다는 뜻에서, 시간은 육체에 대한 폭력형식이라할 것이다. 그런데 천진하게도‘찌그러진 몸’과‘피어난’몸을‘맞대 보자’고 할 때, 노모는 처음과 끝이라는 시간의 선적 논리에 지배되지 않는다. 젊은 시절이 생각나고“다시 그렇게 싱싱해진 것 같이”환장하게 좋더라고 말할 때, 노모는 처음과 끝을 회통시킨다고 할 수 있다.이런 회통을 두고 한승원은‘농현같은 시간’이라고 표현한다. 포르노의육체가 상품의 시간처럼 일회적으로 소모되는 것이라면, 이장환의 사진은처음과끝이맞물린시간,‘ 농현같은시간’을담아낸것이다. 농현(弄絃)은가야금이나 거문고 연주자가 줄을 퉁기면서 흔드는 기법을 뜻한다. 연금술의 기적처럼, 농현은 수직과 수평, 대칭과 비대칭이라는 대립물을 하나로융합한다. 부처와 중생 사이에 경계가 사라지고, 아름다움과 슬픔이 서로횡단하는 경지라면, 농현으로서의 시간은 불교적인 전생윤회가 아니라 해탈의 경지라 할 것이다(황국명, 2008, 64쪽). 꽃과 꽃씨, 아기와 부모가 서로를 품고 있는 형국이라면, 농현같은 시간은 계량할 수 없고, 거기에 순차나 선후관념도 스며들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한승원의 소설이 늙은 육체를 부정적인 태도로 대하거나 늙은 몸을 참담하게 대할 이유가 없다.
때로는 조화를 통해
한편, 한승원의 노년소설에서 유난히 두드러진 조손의 유대관계, 노인과 아이의 상호의존도 주목할 필요를 느낀다. 한승원에게 노인과 아이, 선조와 후손을 상호 유대하고, 늙음과 젊음은 역설적으로 공존한다. 「감 따는 날의 연통」은 이러한 한승원의 말년의식을 압축적으로 드러내고 있는작품이다. 기독교적 상징에서 나무의 열매와 맺은 관계가 인간고통의 기원이 된다면, 이 작품에서 늙은 감나무는 우주목이 된다.그렇다. 정말 그렇다. 땅도 사실은 음험한 한 세계의 심장 그 자체인 것이고,땅 심장의 관상 동맥 혈관들은 이 늙은 감나무의 뿌리들이다. 땅의 심장은 그 뿌리들과 가지들을 통해 피를 하늘로 짜 보내고 그 피는 하늘 안의 구석구석을 휘돌다가 다시 땅으로 되돌아오곤 하는 것이다. 그것은 연통(連通)이다.(140쪽)엘리아데의 지적에 의존한다면, 한승원 소설의 늙은 나무는 수직적으로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우주목, 불멸의 절대현실을 상징한다고 할수 있다. 이런 연결을‘연통’이라 하거니와, 천지를 소통시키는 늙은 나무는 우주의 중심축이라 하겠고, 나무로 유비된 조손의 대칭적 조화에 경외심을 품을 만하다.응접실 유리창을 통해 조손의 감 따는 작업을 바라보는 내 가슴에는 뜨거운 기운 한 줄기가 일고있었다. 우주의 대칭적인 조화가 그 늙은 감나무 주위에 형성되고 있었다.(138)우람한 고목나무 곁에서 행복한 유년을 보낸추억을 떠올린다면, 노인과 아이의 친화, 늙음과 젊음의 동락(同樂)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있다. 결국 나무와 열매, 노인과 아이는 우주적조화를 상징하며, 이런 조화에 대한 작가의‘경외심’은 우주적 근원에 대한 신화적 혹은 주술적 반응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한승원의「태양의 집」은 노년의 자아정체성에 대하여 깊이 성찰하게 하는 작품으로,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노년의 삶에 대한 전망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화자‘나’는선배인 안기철 선생이 외손자인 영후를 보살피는 것을 보며, 어린 시절의 할아버지를 떠올린다. 할아버지는‘나’의 생김이나 성격에 대하여부정적으로 말했던 아버지와 다르게‘나’에게서 무한한 가능성을 발견하고 꿈을 심어주었다.‘나’에 대한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견해 차이는‘연’으로 상징되어 나타난다.나에게 처음 연을 만들어 준 사람은 할아버지였다. 내가 처음 가져 본 것은 병어연이었다. 할아버지는 나에게 글을 읽히다가 연을 만들어가지고 동산으로 가서 띄웠다. 반면 아버지는 연 띄우는 일이백해무익한 일이라며 권하지 않고 꾸짖기만 했다. 쓸데없이 종이와 글 읽을 시간을 낭비할 뿐만 아니라 허황한 꿈을 허공에 띄우는 것이라고 했다『.( 소설, 노년을 말하다』, 황금가지, 2004, 35쪽)‘나’는 이러한 할아버지의 격려에 힘입어 긍정적이며 자신감을 가진 아이로 자라나 소설가가 된다. 할아버지는‘나’에게 꿈을 심어주고 미래의가치를 두며 사는 삶을 가르쳐 주는 존재이다. 노년기에 이른 화자‘나’는그 할아버지의 모습을 선배인 안기철 선생에게서 발견한다. 안기철 선생은 사업하다 망한 사위와 딸이 맡기고 사라진 외손자 영후를 키운다. 안기철 선생은 영후에게 어머니의‘자궁’과 같은 역할을 해주려고 한다. 어머니의‘자궁’이 생명을 잉태하고 자라게 하듯이 어머니가 부재인 영후에게‘자궁’의 역할을 스스로 맡는다. 어머니의 자궁은 창조의 사물이고, 하나의 소우주이다. 우리들의 원초적인 고향인 셈이다.여기서 노년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작가의 전망을 드러내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 그것은‘노인들이 새로운 세대의 자궁 역할을’할 수 있다고 작중인물인 안기철 선생의 입을 통해 말해주고 있다. 여기서 안기철 선생이 옥호를‘태양의 집’으로 지은 것도‘자궁’의 역할과무관하지 않음을 발견할 수 있다. 안기철 선생의 의도를 깨달은‘나’는 연꽃 이야기를 영후에게 해주며, 결손가정에서 자라는 영후가 자라서 아름다운 삶을 꽃피우기를 바란다. 결국 작가는 안기철 선생이나 화자인‘나’두 노인을 통해 현대의 노인들이 새 생명을 기르는‘자궁’의 역할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인생에서 자신의 실체를 인식한다는 것이 삶의 질에 영향을 미친다고 볼 때, 황혼기의 삶에서 자아정체성을 갖는다는 것은 중요한것의 하나로 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노년소설 속에서 자아정체성을 획득한 노인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 노인의 삶의 행적을 따라가 보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 되기도 한다.한승원의 몇 편의 노년소설을 통해서도 살펴본 바와 같이, 한승원의 소설 속에 나오는 인물들 역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나름대로의 생활 속에서 노인으로서의 품위를 잃지 않으면서, 비굴하지 않게 인생의 마지막을살아가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때로는 당당하게, 때로는 조화를 통해서, 그리고 자아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는 모습을 통해서 노년의 삶을 채우고 있는 것이다.노풍당당(老風堂堂)이 소설 속에서만 가능한 현실이 아닌 시대를 우리모두가 조성해야 할 책무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