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 네비게이션


분야별보기

트위터

페이스북

2010.7 |
임안자의‘내가 만난 한국영화’
관리자(2010-07-05 13:38:35)
임안자의‘내가 만난 한국영화’ 이장호 감독에게 주어진 헌정시사회 - 임안자 영화평론가 1992년 유럽에서 처음으로 열렸던 페사로국제영화제의 한국영화회고전은 한 번의 행사로 그치지 않고 해를 넘기면서 유럽의 여러 영화제에 한국영화의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을 만큼 파급효과가 컸다. 지난 6월호에 언급한 1992년의 아미엥국제영화제의 배우 안성기 오마주와 1993년 스위스 프리부룩국제영화제의 이장호 감독 헌정시사회 그리고 파리퐁피부센터에서의 대대적인 한국영화회고전은 모두 페사로국제영화제의 여파로이뤄진 수확이었다.프리부룩국제영화제는 1993년 3월 1~8일까지 이장호 감독에 주는 헌정시사회를 가졌다. 전 집행위원장 마르시알 크네벨은 페사로국제영화제서 <바람 불어 좋은 날>과 <나그네는 길에서 쉬지 않는다>의 두 작품을 본 뒤“감독의 뛰어난 연출력에 감동하여 헌정시사회를 열기로 마음먹었다”. 거기에 마침 페사로국제영화제에 와있던 한국의 몇몇 평론가들이 추천한 <어둠의 자식들>, <과부 춤>, <바보선언>의 세 편이 보태져 다섯 영화의 조그만 프로그램이 만들어졌다. 규모는 크지 않았으나 영화제가 생긴 뒤 처음 치르는 헌정시사회였는지라 주최자 측에서는 그것도 버거웠던 듯했다. 그러나 관객과 평론계로부터 좋은 반응을 거두었다. 프리부룩국제영화제의 헌정시사회는 이장호 감독이 해외영화제로부터 받은처음이며 마지막의 초대전이었다. 적십자정신을 이어받은 프리부룩영화제 독자 가운데‘프리부룩국제영화제가 어디지?’하고 묻는분들이 있을 성 싶어 이번 기회에 짧게 소개한다. 프리부룩국제영화제는 이름난 로카르노국제영화제 다음가는 스위스의주요 영화제이며, 스위스의 국제원조협력단체(NGO)인 헬베타스(Helvetas)가 설립했다.1980년 헬베타스는 조직체의25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아시아,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의 영화 7편을 초청하여 스위스의 불어권 여러 지역에서 순회상영을 시도했다. 그러는 과정에서 3대륙의 영화에 대한관객의 관심이 기대 이상으로높다는 것과 그럼에도 아프리카, 아시아, 라틴아메리카의 풍부한 영화를 수입하는 배급사가 스위스에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문제 해결에 나섰다. 그 결과 관객 수가 제일 높았던 프리부룩에 3대륙의영화를 위해‘제3세계 영화제’를 열었다. 그리고 경쟁부문의 수상영화에게는 스위스 배급상을 주어 스위스 영화관에서상영될 수 있도록 길을 터줬다. 그러나 그것으로도 충분치않아 80년대 중반에 비서구 지역 영화의 전문배급사 트리곤필름(문화저널 1월호에 실린 필자의 글 참조)을 만들었다.한편 3세계 영화제는 몇 년 뒤 프리부룩국제영화제로 바뀌었고 트리곤필름에서 일해오던 마르살 크네벨이 1992년집행위원장 자리를 맡으면서 영화제는 격년제에서 연중행사가 됐으며 1993년, 유네스코로부터‘문화발전을 위한 세계의 10년’의 표창장을 받았다. 그리고 순회상영이 시작된 지18년이 지난 뒤인 1998년 프리부룩국제영화제는 드디어 국제영화제로 한층 더 커졌다.한국영화가 프리부룩국제영화제와 가까워진 건 이장호 감독의 헌정시사회 때부터다. 그 이후 지난 15여 년 동안 숫한젊은 세대 감독들의 영화가 이곳에 초청됐었다. 그 가운데몇몇 작품은 대상에서 관객상까지 여러 종류의 상을 받았으며 한국영화에 대한 관객의 반응은 일반적으로 좋은 편이다.그런 까닭에 부산영화제는 이천년 초에 한국영화 발굴에 힘써온 마르살 크네벨 집행위원장에게 젊은 감독들을 대표하여‘한국영화 해외증진 공로상’을 줬다.프리부룩은 스위스의 중부 지방에 놓여있는 독어권과 불어권이 맞닿는 도시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불어사용의 인구가다수를 이루며 천주교회의 영향으로 보수적인 경향이 짙다.그런데다 다른 칸톤(한국의 도(道)에 가까움)에 비해 주요산업의 지대가 아니라서 경제적 발전이 뒤늦은 편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70년대까지 만도“프리부룩 사람들은 목욕을 자주 하지 않아 냄새가 코를 찌를 정도다. 그래서 새들도 프리부룩 상공을 지나갈 때는 날개로 코를 막고 날아간다”, 또는“프리부룩의 병원에서는 수술환자에게 환자가 신던 양말을코에 얹는데 양말의 냄새가 마취보다 더 독하기 때문이다”등의 고약한 농담이 퍼져있었다.그러나 프리부룩은 나에게 잊지 못할 곳이다. 사사로운 이야기를 하자면, 70년대 초부터 거의 5년을 나는 프리부룩대학에서 신문학을 공부했다. 장학금을 받을 수 없어 해마다여름 방학이 시작되면 나는 3개월 동안 일을 해야 했었다.거기다 필수였던 독일어를 배우느라 너무 힘들었고 그러면서도 불어의 매력에 끌려 대학에 딸려있는 불어학원을 열심히들랑거렸다. 그러자니 항상 바빴다. 그러나 나는 행복했다.프리부룩은 내가 영화가 뭔지를 깨달은 곳이었고 무엇보다현재의 남편과 한참 사랑을 하던 때라서 내 주변의 모든 게아름답고 멋있어 보였다. 그리고 20년 뒤 처음으로 나는 프리부룩에 다시 갔다. 이장호 감독에 관련된 카탈로그의 글과프레스를 맡았던 것이다. 그런데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했던가! 나하고 같이 공부했던 친구가 그 사이 신문학과의 과장이 되었는가 하면 나를 가르치던 교수가 영화제의 조직위원장 직을 맡고 있지 않는가! 나는 정든 고향에 다시 온 기분이었다. 이장호 감독의 영화입문 1945년에 태어난 이장호 감독은 1966년 홍익대학에서 건축미술을 배우다 2년 뒤 그만두고 영화 쪽으로 마음을 돌렸다. 마침 영화검열관이었던 아버지는 영화계의 여러 사람들과 알고 지내는 사이었기 때문에 어느 날 아들을 신상옥 감독한테 데리고 갔다. 신 감독은 그 당시 한국영화계를 휘두르던 대가였는지라 아버지의 도움 없이는 쉽사리 이뤄질 일이 아니었다. 애초 청년 장호는 배우가 될까 했었다. 그래서아버지의 권고로 눈꺼풀 수술까지 하고 신 감독에게 갔는데“배우처럼 잘 생긴 신상옥 감독 앞에 서기가 질려 자기도 모르게 감독이 되고 싶다”고 했다. 그 뒤 그는 신 감독 밑에서어렵사리 8년간 조감독 시절을 보내면서‘어깨 너머’로 연출방법을 익혔다. 그러다 1974년 드디어 첫 영화 <별들의고향>을 만들 수 있었다. 조선일보에 연재소설로 한참 인기를 끌던 최일남의 동명소설을 바탕으로 한 이 영화는 국도극장에서 45만이 넘는 관객을 끌어들였고 그 해의 대종상을모두 휩쓸었다. 영화당 평균 관객 수가 1만 명 정도였을 때였으니 그가 하루아침에 한국영화의 스타감독이 될 만도 했다.성공의 비결은? 이장호 감독은“최일남 소설의 인기와 완전히 할리우드 영화의 형식을 베낀 자신의 연출 스타일이 뭔가 새로움을 찾는 관객의 취향과 잘 맞아떨어져 나타난 현상”으로 해석했다. 이 감독의 초기 연출 스타일은 신상옥 감독의 연출법과 할리우드 영화의 영향이 컸다. 이 감독은“전통적으로 한국영화는 아주 느리게 돌아갔는데 그 전통에서완전히 벗어나기 위해 나는 할리우드 영화의 빠른 리듬의 박력 있는 스타일을 모방했고 그걸 자랑스럽게 생각했다”고 솔직히 털어놨다.첫 작품의 화려한 성공 이후 이 감독은 2년 사이에 세 영화를 만들었다. 그러나 한 편도 성공하지 못했다. 이장호 감독·연출 경력에 드물지 않게 나타나는 첫 창작의 위기였다.그런데다 설상가상으로 이 감독은 본인도 알 수 없는‘대마초 사건’에 걸려들어 2주간 정신병원에 머물러야 했고 문화공보부로부터 1976~1980년까지 4년간 감독자격증을 빼앗겼다. 4년은 이 감독에게 그러나 한국사회의 부조리를 깨닫고 감독의 사회적 책임과 자신의 역할이 뭔지를 되물었던 정신적 재충전의 시간이었다. “내가 다시 영화를 만들 수 있다면 전혀 새로운 영화를 만든다”는 다짐도 했다. 그는 어느 주간지의 기자였던 진보 성향의 누나가 권하는 책들을 통해 이문구, 김지하, 송기원, 고은, 엄무웅, 황석영 작가들의 세계로 파고들었고 종교에도 마음이 쏠렸다. 이장호 감독의 영화 유럽 진출 나는 1988년이 저물던 무렵 이장호 감독의 <바보선언>과<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를 바젤 시의 시네 클럽‘르 봉 필름(Le Bon Film)’의 프로그램을 통해 봤다. 내가영화공부를 끝낸 뒤 처음 보는 한국영화였다. 르 봉 필름의프로그램을 당당하던 친구 부부는“드디어 너의 나라의 영화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왔다’면서 나보다 더 반가워했는데, 두영화를 보고 나는 문화충격에 가까운 감동을 받았다.알고 보니 이 두 영화는 바젤 전에 베를린 영화제의 포럼프로그램을 거쳐 상영됐었다. 포럼은 울리히 그레고와 그의부인인 에리카 그레고가 1971년 창설한 것으로, 포럼이 어떻게 한국영화와 접촉을 시작했는가에 대해서 그레고 부부가나에게 들려준 이야기는 이렇다. 그레고 부부는 모스코바영화제서 만난 일본의 노장 영화평론가 타다오 사토로터“한국의 이장호 감독의 <나그네는 길에서 쉬지 않는다>(지금부터는‘나그네…’로 통일)에 주목하라”는 말을 듣고는 1987년처음으로 한국으로 갔다. 그리고 이장호 감독을 만나 <나그네…>뿐 아니라 1983년 작 <바보선언>까지 볼 수 있었다.이들은 서울에 일주일 넘게 머물면서 영화진흥공사에서 상당수의 새로운 한국영화를 봤으나 포럼에서 보여주고 싶은영화는 찾지 못하여 어쩔 수 없이 이장호 감독의 두 편과‘열린 영화’단체의 일곱 편 단편만 초청했다. 그 가운데 이장호감독의 <나그네…>는 칼리가리 상을 받았다.칼리가리는 20년 독일의 유명한 표현주의와 호러의 컬트영화 <칼리가리박사의 캐비넷>(감독 로버트 비에네)에서 따온 이름으로‘주제와 형식에서 혁신적인 영화’에 주는 상이다. 원래 포럼 자체는 상을 주지 않지만 해마다 포럼의 이름으로 5개의 상이 주어진다. 칼리가리 상은 그 중에 하나이며상금 4천 유로가 주어진다. 상은 독일 전국에 존재하는 비상업성 영화상영단체인 Kommunales Kino(지역 영화관)에주며 칼리가리 수상 영화는 독일 전국의 지역영화관에서 상영될 가능성이 크다.그런 면에서 이장호 감독의 두 편 영화가 바젤의 르 봉 필름(Le Bon Film) 클럽을 통해 소개된 것은 위에서 말한 독일의 지역영화관의 역할과 무관하지 않다. 한편 르 봉 필름(좋은 영화라는 뜻)은 1931년에 바젤대학의 학생들을 중심으로 세워진 80여 년의 역사를 간직한 국제적으로 가장 오래된 영화 클럽의 하나다. 설립시기에는 러시아의 대가 세르게이 에이젠스타인과 지가 베르토프를 초대되는 등 학생들의국적을 뛰어넘는 영화예술에 대한 열정은 대단했다. 나는1975년 결혼 뒤 바젤에서 정착하면서 이 클럽의 회원이 되어 르 봉 필름의 세계 수준의 영화를 지금도 즐기고 있다. 프리부룩국제영화제에서 본 이장호 감독의대표작5편 나는 1992년 페사로국제영화제서 만난 이장호 감독과 긴인터뷰를 한 바 있다. 그의 헌정시사회를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 글을 쓰기 위해 그 때의 인터뷰를 다시 읽어봤다. 인터뷰를 할 때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이 감독 특유의 연출 성향이 두 번째 읽으면서 훨씬 뚜렷이 짚였다. 예를 들면그의 천부적인 즉흥성과 순발력 그리고 상반되는 성향이다.이장호 감독은 한때 할리우드에 심취됐었다. 그러나 1989년한미 FTA의 합의에 따라 할리우드의 UIP 배급사가 서울에서 문을 열었을 때 그는 주저 없이‘직배에 반대하는 영화인들의 항의 대열에 끼어 거리행진을 했다’. 이 감독은 서울의중류층 출신이다. 그러나 그는 도시의 세련미를 즐기면서도농촌 사람들의 시골티를 좋아하고 때로는 부러워했다. 섹스와 종교, 영성의 세계는 그의 영화에서 자주 나타나는 주제이었다. 그리고 그는 상업성 영화와 작가 영화 사이를 자연스럽게 넘나들며 성공과 패배가 거듭되는 일진일퇴의 연출스타일을 보였다. 그러나 이 감독의 영화에서 지나치게 한쪽으로만 치우치는 사상과 관념의 흑백 논리나 주장을 찾기 힘들다. 나는 이 기회에 감독과의 인터뷰를 참고하면서 프리부룩국제영화제서 보여준 감독의 5편 영화를 여기서 소개할까한다.<바람 불어 좋은 날>은 1980년 이장호 감독이 대마초 문제로부터 다시 자유를 찾은 뒤에 만든 첫 작품이었다. 최일남의 원작 <우리들의 넝쿨>을 작가 송기원이 각색한 작품으로, 박 정권이 끝나고 전두환이 정권을 잡은 그 사이에 잠깐꽃을 피우던‘서울의 봄’에 영화는 태어났다. 감독은 시골에서 상경한 세 젊은이들을 통하여 자본지배의 사회에서 힘을가진 자들의 횡포와 없는 자들이 당하는 설움을 멜로드라마의 형식을 빌려 꾸밈새 없이 보여준다. 그와 동시에 미끈한촬영기술과 경쾌한 음악의 리듬 그리고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여주인공의 관능적인 육체미를 양념으로 로맨틱한 분위기를 풍기며 카메라는 곧 뿔뿔이 헤어질 세 청년을 따뜻한 시선으로 감싼다. 이 로맨틱의 리얼리즘의 영화는 관객과 평단으로부터 뜨거운 박수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정치·사회적으로 숨이 막힐 정도로 경직됐던 시절에‘청춘 문화’를 불러일으켰다. 이 감독 주변에는 감독을 꿈꾸는 배창호, 신승수, 재야 운동권의 장선우, 서울대학의 얄라성 클럽의 박광수, ‘영상시대’의 김홍준, 황규덕 등이 모여들어 충무로의 세대교차를 이루었고 그 가운데 배창호와 박광수는그의 조감독이됐다.<어둠의 자식들>은 황석영의 동명의 소설을 영화에 옮긴것이며 <바람 불어 좋은 날> 보다 훨씬 강도 높은 현실성의영화다. 그건 소설이 써진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사실 소설을 쓰게 한 사람은 서울의 빈민촌에서 살면서 매춘지역의 문제점을 꿰뚫어 본 이동철이었다. 문맹이었던 그는 황석영 작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써달라고 부탁하여 나온게 <어둠의자식>이다. 이동철의 삶은 이장호 감독의 작품세계에 많은영감을 주었고, 이 감독이 기독교인 된 것도 그의 영향이 컸다. <어둠의 자식>은 가수가 되는 걸 꿈꾸는 한 젊은 여성이부모의 반대와 음악계 남성들의 성폭력의 피해자로 성을 파는 곳에 정착하는 과정을 이야기한다. 매춘문제는 한국영화에서 자주 보는 주제지만 대개 감상적인 색채로 칠해졌던 데비해 <어둠의 자식들>에서는 같은 주제를 통해 매춘 여성들의 땅에 짓밟힌 인권문제에 초점을 두고 있으며 성을 파는직업여성도 시민으로서 인간답게 살 권리가 있음을 설파한다. 이장호 감독은“영화를 만들기 전까지 자신도 매춘여성들은 부도덕하고 난폭하다는 편견을 가졌었다. 그러나 내가매춘세계에서 본 건 가난의 비참이었고 매춘과 인간매매는한 치의 차이일 뿐”이라고 했다. <어둠의 자식들>은 한국영화계에 화젯거리가 되면서 관객모집에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정부의 눈에 거슬려 검열대상이 되면서 베를린국제영화제로부터 초대를 받고도 참석하지 못했고거기에다 수출금지까지 당했다. 이유는‘외국에한국사회의 부끄러운 면을 보이기 때문’이었다.<과부 춤>(원명은 <다섯 과부>) 역시 이동철의이야기를 연극 연출가, 판소리 음악인 임진택이각색한 여성 주제의 두 번째 작품으로, 빈민층의다섯 과부들이 한 집에서 모여 사는 공동체를 사회학적 차원에서 그린 영화다. 이 영화에서 감독은 한국에 과부가 유난이 많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는 6.25 동란, 베트남 전쟁 그리고 70년대이후 늘어가는 산업재해 등에서 원인을 찾는 듯했는데, 왜 빈민층의 여성들이 과부가 될 가능성이 부유층 보다 상대적으로 많은 가를 한 장면을통해 보여준다. 환경미화원인 찬일은 새벽에 길거리를 쓸다가 자동차에 치어 집에 부인과 아들은 놔둔 채 목숨을 잃는 장면이다. 그 밖에 남자들에 속임을당한 뒤 복수심에 차있는 결혼상담소장, 결혼에 실패하고 기독교에 빠지는 광신자 여인, 무당, 판소리꾼의 남편을 잃는과부, 이들은 서로 의지하며 서울 바닥에서 소우주를 이루며살고 산다. 이들이 집 마당에서 장구소리에 맞춰 춤을 추는장면은 종교의 차이점보다 인간적 공통점을 강조한 이 감독의 열린 종교관이 돋보였고, 끝에 가서 무당은 갈 데가 없는만삭의 여인을 집으로 데리고 와 출산을 돕는다. 과부들만의소우주 속에서 애기가 낳다. 삶의 신비를 가히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으랴! 이 영화를 두고 이 감독은“미완성이지만 아주좋아하는 영화”라고 했는데, 관객과 평단의 반응은 밋밋했던것 같았다.<바보 선언>은 <과부 춤>과 같이 1983년에 나온 작품으로 여기서도 이동철의 삶은 극적 줄거리의 원천으로 작용했다. 한편 이 영화는 타고난 순발력을 무기로 군사정권의 철통같은 검열제도와 싸워 이긴 이장호 감독 개인의 모험담이기도하다. 이 감독은 이동철의 실질적 경험을 기반으로 예전의 영화들 보다 사회문제에 더 무게를 둔 영화를 만들 생각으로 자신이 직접 쓴 시나리오를 검열관에 보냈다. 하지만중형의 범죄자가 주인공이라는 이유로 세 번이나 거절당했다. 제작비는 이미 받아놓은 상태여서 중도에서 그만둘 수도없는 형편이었다. 그런데다 검열 때문에 시간을 뺏겨 촬영은한 달 안에 끝내야 했다. 진퇴양난에 빠진 그는 애국자를 주인공으로 한 엉터리 시나리오를 써 보내 검열에서 통과됐다.역설적이게도 <바보선언>은 감독도, 제작자도 아닌 검열청의 누군가가 지어준 제목이다. 감독은 그 때“죽고 싶은 심정이었다고”했는데 영화의 맨 첫 장면에서 한 영화감독이 지붕 위에서 뛰어내리면서“영화는 죽어간다”라고 외치는 장면은 이 감독은 직접 연기한 장면이다. 이 감독은 이 영화에서 매춘부인 가짜 여대생과 그를 사랑하는 동칠(검열관에선이동철 이름도 부르지 못하도록 했다.) 그리고 할일 없는 택시 운전수의 떠돌이 생활을 거의 대화 없이 숨긴 카메라를통해 끝까지 즉흥적으로 찍어나갔다. 시나리오가 없으니 촬영은 완전히 감독의 즉흥적인 기상천외의 상상력에 의존할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쫓기는 상태에서. 감독은 즉흥성을유지하기 위해 전 촬영을 숨겨진 카메라로 찍었고 편집을 통해 영화의 형식을 갖추게 됐다. 감독은 <바보선언>을 가리켜‘몽타주 영화’라고 불렀다. 영화의 문법을 역류하여 태어나‘몽타주 영화’는 즉흥극의 미학을 자양분으로 한국영화사에서 보기 힘든 블랙 코미디가 되었고, 영화계에서는 80년대의 최고 작품으로 높이 평가했다. 더불어 이 영화는 베를린국제영화제의 포럼 그리고 시카고국제영화에 초청됐었다.<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는 1987년 작으로 이감독이 세운 제작사 판영화의 첫 작품이다. 작가 이제하의동명소설을 이 감독이 각색한 이 영화의 주제는 남북의 분단문제다. 이 감독은“이제하의 소설에 큰 영감을 받았으면서도 소설의 추상적인 서술체와 민감한 분단문제를 어떻게 시각화 할까를 두고 망설였고 검열이 두려웠다”고 했다. 영화는 이북출신인 죽은 아내의 재를 담은 항아리를 안고 아내의고향 근처인 동해를 향하여 길을 떠난 남자가 도중에 불가사의한 두 여인의 죽음에 관련되고 무속 세계로 끌리는 한 여인과의 운명적인 헤어짐을 줄거리로 하고 있다. 영화의 끝에가서 나타나는 공중에 뜬 손바닥의 수수께끼 같은 장면은 영화의 전반에 흐르는 무속적인 분위기를 더욱 짙게 한다. 이감독은 “이제하 작가는 그 장면을 놓고 독자의 상상력에 맡긴다고 했지만 내 영화에서는 분단에 반대하는, 통일에 대한요청을 상징하는 무속의 언어다”라고 설명하면서“무속은 통일이 이뤄질 경우 떨어져 있던 민족이 다시 하나가 되게 할수 있는 공통의 정서적 밑받침이 될 수 있다”는 의견을 비쳤다.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는 주제의 난해성에도불구하고 한국영화사에서 빛나는 명작의 하나로 간주되며 도쿄국제영화제서 대상과 국제평론협회상을 받은 바 있다. 중앙대학교의 이용관 교수는“다른 영화에서도 그랬지만 천재적인 이장호 감독은 원작자의 유명세를 타면서도 자신의 내적 감성과 즉흥성의 연출스타일을 통하여 자신의 영상언어를만드는데 성공했다”고 호평을 했다.후서: 나는 올해 전주국제영화제의 방문을 끝내고 서울에머무는 동안 이장호 감독과 만날 기회를 가졌었다. 15년 전프리부룩국제영화제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는 바젤의 우리 집에도 두어 번 들렸던 가족의 친구다. 그는 나더러 정년퇴직의 나이가 되어 전주대학교를 그만 두었다고 하면서 영화진흥위원회의 제작지원의 대상으로 뽑혀 조만간 영화를 만들 것 같다고 했다. 그는 2001년 스물두 번째 영화 <행복>을 끝으로 영화를 만들지 않았는데,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이장호 감독의 다음 영화를 간절히 기다리며 이 글을끝맺는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