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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7 |
신귀백 영화엿보기 - 과거가 없는 남자 2002
관리자(2010-07-05 13:38:54)
디테일을 지우는 일필휘지(一筆揮之)의 붓끝! -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의 <과거가 없는 남자, 2002> ▶▶좋은 시 시가 탄생하는 순간이 있다. 가지를 흔드는 무심한 바람결에도 시인의 촉수는 바람보다 먼저 움직인다. 시인에게찾아온 순간의 포착이 사유의 먼 과정을 거쳐 언어를 조탁한다. 상그럽게 굴러가는 시가 장르적 관성을 깨면 최고다.그 간극은 멀수록 좋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언어란 놈을 닦달하고 휘둘러야 한다. 자연과 삶에 대한 어정쩡한 비교를 하다가 수를 들키는 시보다는, ‘이까짓 것’하는 지점에서 언어를 제 맘대로 휘두르는 놈이 진짜 시인이다. 시인은 문법을 창조한다는 말도 있잖은가?영화라고 다를까? 장르적 관습에 매몰되지 않는 새로운스타일을 만나면 일단 부럽다. 개연성에 함몰되지 않고 자신만의 영화 문법을 만들어내면 그 때부터는 작가다. 그 휘두름의 스타일은 어디에서 올까?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치열하게 살아내는 고집에서 올 것. 감독이 카메라로 휘두르는 붓질은 그의 보이지 않게 살아온 이력서이니까.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은 거장 소리를 듣는다. 그의 출세작 <레닌그라드 카우보이, 미국에 가다, 1989>는 진기한 영화다. 참신하다 못해 골 때린다. 수가 함부로 드러나지 않는다. 예측을 불허하는 구성은 그의 뚝심을 보여준다.‘ 모든 쓰레기는 미국에 모인다’는 한마디는 그의 하이쿠 아니겠는가. 시의 내용이 문체를 가질 때 작가로 대접받는 것. <과거가 없는 남자>는 2002년 작품으로, 칸에서 심사위원 그랑프리를 받았다. 잊고 싶은 것이 많은 사람, 시가 안 되는 시인이라면 그의 무표정의 문체를 따라가 보자. ▶▶기억상실 클리셰 한 남자가 있다. 야간기차에서 내린 그는 역 앞 공원벤치에서 논두렁 깡패들에게 뒈지게 두들겨 맞는다. 아마 아리랑치기 같다. 술도 안 마셨는데. 그의 지갑은 물론 가방 속에 있던 소지품도 그냥 버려지고 만다. 코마 상태의 이 남자 병원에 실려가 미라처럼 붕대 칭칭 감고 침상에 누워있는데 의사는 사망을 선고한다. 아니, 이 죽은 남자는 갑자기 깨어나 비뚤어진 코를‘빠지직’바로 잡고 벌떡 일어난다. 어딘가로 무작정 걷는다. 그리고 다시 쓰러진다.다시 눈을 떠야 이야기가 된다. 그는 무슨 장엄한 전투에서 패배한 후 바닷가로 쓸려온 왕자가 아니다. 그러니 따뜻한 실내나 예쁜 공주에 의해 우연히 발견되지 않는다. 바닷가 마을 컨테이너 박스에 사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간신히발견되어 목숨을 부지하는 것. 얼마 안 되는 거친 빵을 나누어 줄 줄 아는 영혼을 가진 사마리아 사람들을 통해 그는조금씩 붕대가 벗겨지며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혹시 천국이 있다면 이 정도 아닐까?다음은, 기억상실증의클리셰다.‘ 내가누구지?’하는지겨운 정체성 이야기 아니니 걱정 붙들어 두시라. 이 남자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직업? 하급관리나 선생도 아니었다. 두들겨 맞을 때, 그의 가방에서 나온 용접용 보안경이 그의 신분과 전력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단서니 그가 기억을 되찾은 후에도 높은 신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이 남자 말이 없다. 표정도 없다. 커트 러셀 같은 분위기지만 노동자의 냄새가 더 풍긴다. ▶▶캐릭터의 무미건조 과거 속 모든 기억에서 유배당한 사람. 하여, 그것이 자유로 작용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니 망각조차 없다. 기억 속에 호명할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 열정과 숭배 혹은 고통과 좌절의 순간 그 어느 것 하나 기억하지 못한다. 자신이술을 좋아하는지 담배를 피웠는지 기호에 대한 기억도 없다. 그러니 죄와 구원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고 개과천선할 것도 없다. 자기기만이나 갈등은커녕 이 남자 목표도 희망도 의지도 없다. 누가 보고 싶다는 생각도 없다. 슬퍼할것이 없다. 모든 존재는 상호작용의 결과라 할 때, 그는 어떤 고리마저 모르는‘노바디’다.탄성한계가 완전히 끊어진 스프링은 생명을 다하지만 고무줄은 다르다. 조금 짧은 대로 사는 거다. 그러니 그는 스프링에서 고무줄로 새로 태어나는 것. 단지 먹을 것이 부족하고 입을 것이 부실할 뿐. 그래도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걱정하지 않는다. 공중의 새도 들판의 백합화도 길쌈수고하지 않아도 잘 살아가지 않던가.사진이 그렇고 영화가 그렇듯, 기억은 대개 시간에 저항한다. 그런데 그는 저항하지 않는다. 신앙심 깊은 욥도 아닌데 불평도 없다. 섬에 갇힌 로빈슨 크루소에게는 하인 프라이데이라도 있었는데, 그에게는 허접한 이웃이 있을 뿐.도둑전기를 끌어다 주고 주크박스를 고쳐주는 선행은 있는만큼 해주는 모범 선행의 표본이다. 감독이 만든 시간은 천천히 흐르고 그는 기력을 회복한다.그렇다. 이 긴 이름의 핀란드 감독은 인간이 살아가는데필요한 것은 몇 가지 안 된다는 것을 말한다. 눈비를 피할컨테이너 하나에 침대와 감자 몇 알 그리고 음악 재생기를돌릴 전기 정도랄까. 사회적으로 필요한 공간은 술집과 교회, 더 필요하다면 은행과 기차역이면 된다. 허기를 감출정도의 수프와 빵, 티백을 적실 수 있는 따뜻한 물, 맥주 한잔. 단순해서 좋다. 이것들이 그가 받은 시혜인데 그렇다고약간의 도움을 준 그들에게 구태여 갚으려 하지 않는다. 맘에 든다.이 집 쥔이 저녁 한 끼 하자해서 한 턱 쏘는 줄 알고 따라나섰는데, 하하 바로 구세군의 무료배식 장소다. 여기서 가난한 이웃들을 도우며 사는 구세군(救世軍)여인 이루마를만난다. 삶의 여유가 없는 긴장으로 가득 찬 모습. 이 노처녀는 마른 감자 같이 생겼다. 그도 그 여자도 서로의 과거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이 홈리스가 작업을 걸고 또 받아주고. 조금씩 활기를 되찾는다. 같이 차를 마시고 음악을듣고 나름 사랑을 키워가는 것. 종교적 의무와 시혜 속에서궁상맞게 사는 독신 역시 나을 것 없다는 말로 읽힌다. 불특정한 이웃들을 돕는 것보다 누군가‘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이 진짜 행복 아니냐는 것이 감독님의 생각인지?몸이 조금 추스러진 후, 돈만 아는 경찰의 제안으로 그는컨테이너를 얻고 일을 찾아 나선다. 그 살집 좋은 경찰이불쾌하지만 그는 불만을 표출하지 않고 동의한다. 취업자도움센터에서 관료들의 행태에서 적잖은 스트레스를 받지만 그는 계속 무표정일 뿐이다. 괴로움에서 간신히 벗어난이의 해찰이라니. 사는 게 팍팍하지만 상투적 연민은 없다. ▶▶돌아온 기억 <본 아이덴티티> 시리즈의 맷 데이먼은 기억을 찾기 위해 첨단기술을 사용하지만 이 영화 속 남자는 영웅설화의주인공이 아니니 천재 스파이처럼 자신의 과거를 찾으려 애쓰지 않는다. 사는 것, 무어 그리‘메멘토’하냐는 거다.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에 크게 상심하지 않으니 예측불허다. 복수를 위한 몽테크리스토 백작이나 코르시카의 나폴레옹도 아니고 스스로 유배를 선택한 사람으로 읽힌다.기억이 돌아와야 이야기가 된다. 우연히 용접에 소질이있음이 밝혀진 후 취업을 위한 은행 계좌 트기 과정에서 강도를 만나는 과정에서 그의 작은 과거가 드러나는 것. 아내가 있었단다. 만나야 한다. 이 전직 용접공은 자신이 살았던 집으로 가기 위해 기차를 탄다. ‘과연 그는 돌아올까’하는 배웅하는 구세군 여자의 눈빛. 힌트는 있다. 용접은쇠를 붙이는 것만이 아니라 붙은 쇠를 자르는 역할이니까,과연 그는 어떻게 될까?최소한의 기억을 회복한 후, 그는 한 때 아내였던 여자를만난다. 이 미스테리한 남자의 아내는 히스테리를 가진 그냥 그런 여자였다. 식은 난로 같은 아내에 대한 태도는 역시 미적지근하다. 결투할 줄 알았던 새 남편이라는 남자가던진 말이 재미있다. ‘듣기보다 좋은 사람’이라는 말은 얼마나 애정이 식었는가에 대한 표현. 밝혀진 옛날의 그. 절제 없는 인간이었다. 회장집 아들도 아니고 미인 아내와 자식이 있는 것도 아닌. 주식이 망해서 화가가 되기로 한 고갱도 아니다. 노름으로 절제력을 잃고(빚에 시달리던 도스토옙스키에 대한 헌시는 아닐지) 아내와의 관계마저 깨어져 무너질 수밖에 없을 때, 그는 집을 나온 것. 아마 톨스토이는 강도에게 매 맞는 것이 아니라 추위와 허기에 쓰러지는 것으로 묘사할 텐데. 기쁨과 즐거움이 없는 젖은 장작같은 삶일 때, 우리는 죽고 싶다. 과거 속에서 그는 오직 죽고 싶었을 뿐이고 현재 속에서 그저 살고 싶을 뿐이다. ▶▶감독의 일필휘지 우리가 알기로 <카모메 식당>의 밝음, ‘노키아’의 정확성, 복지와 교육이 잘 된 나라, 핀란드인데…. 은행은 몰염치, 취업서비스는 엉망, 경찰은 개판, 공무원은 불친절 등이것이 북구 그 피요르드의 나라일까 라고 갸우뚱 할 필요없다. 감독은 복지 잘 된 핀란드의 그늘을 소개하는 것이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하니까.이 무표정남이 월급을 현금으로 달라고 할 때, 사장이 건네는 말씀.“ 그럼, 은행은 뭐 먹고 사나?”아하! 할이다. 살아온 기록이 금리의 퍼센트를 결정하는 것이 우리네 삶 아니던가. 그렇다고 자본주의의 잘못된 부분을 드러낸다 해서 공익에 대한 설교로 가는 건 아니고. 오히려 유머로 간다. 은행에서 강도를 만나는 장면의 웃음이나 도둑 전기를이어주는 장면에서“어느 날 내가 고랑에 빠졌을 때 나를끌어당겨줘요”는 여유다. 이 유머를 던지는 이는 감독이지배우가 아니다.삶의 그늘을 닦달하는 서사? 단순해서 좋다. 주인공이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하지 않는 것처럼 감독의 솜씨 역시 거의 무표정이다. 그렇다고 감독이 백치겠는가. 서사,캐릭터, 미장센 그런 것 일필휘지의 달리는 붓이 그 세밀한감성을 쓸어버린다. 강가 옆 창고 앞에 감자 몇 알을 심고거두고 하는 장면들은 어린애 장난처럼 태연하고 뻔뻔스럽다. 그래도 감독이 만든 그림에서의 주인공은 청바지에 초록 셔츠, 하늘색과 푸른 바다 빛 그리고 오래되 녹이 슨 창고의 녹색 등 분명 회화적 감각이 있다.단조로운 음악만을 연주하던 구세군 밴드의 레파토리는조금 바뀌지만 실력이 특별히 좋아지지도 않는다. <레닌그라드 카우보이…>의 밴드도 마찬가지였다. 이야기가 화려해지면 존재의 본질을 생각할 여유가 없으니 감독은 철저히 무미건조로 가는 것. 영화 속 주인공이 그렇고 경찰도간수도 변호사도 모두 무표정한 사람들이라니. 기름기 없이 뼈다귀만 남은 대사 역시 간략하다.편집 없는 영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소스를 구한 후늘어놓고 짜깁기 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붙이는 솜씨가 거침없다. 한 마디로 일필휘지다. 그 붓질은 무심한 상태에서나올 것이다. 용맹정진하지 않지만 놀지도 않는 상태. 잘써야겠다는 강박관념이 없을 때 내공이 실력으로 이어져무념무상에서 나온 작품이란 느낌.그의 주인공들은 결심하지 않는다. 미워하기, 더 올라가기, 더 열심히 일하고자 결심하지 않는다. 철저히 가라앉은자만이 떠오를 수 있다는 삶의 철학, 좋다. 그러니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 이 정도대가를 지불할 수 있다면 과거‘가’없는 남자로 다시 사는것도 좋을 듯….추측? 깡패들에게 맞은 이유는 그가 스스로 고용한 킬러들은 아니었을까? 왜? 화면을 잇기 위해서는 페이드아웃시켜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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