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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초점] ‘길’의 재발견-예향천리 전북의 마실길 3
관리자(2010-07-05 13:40:35)
‘길’의 재발견-예향천리 전북의 마실길
우리는 왜 길을 걷는가
- 김천식 전주대 역사문화콘텐츠 강사
걷기는 직립 보행을 하는 사람에게만 있는 유일한 동작이다. 걷기는 인간의 탄생과 더불어 시작된, 아주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걷기를 단순한 이동 수단으로만 여겨왔기 때문에 걷기가 역사로 기록되거나 연구의 대상이 아니었다.처음에는 모두가 걸어 다닌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인간 사회에 계급이 형성되면서 사람 간에 신분적 차이가 생겼고 생활의 양상이 달라졌다. 계급이 낮은 부류는 계속 걸어 다녔지만계급이 높은 사람은 탈것을 이용하게 되는 차이를 가져오게 된 것이 사회적 관례가 된 것이었다.
‘걷기’의 변천사 - 신분의 고하를 결정짓던 수단
조선시대에 종로는 상업의 중심지로 사람들이붐볐고, 이곳에 임금이나 높은 벼슬아치가 자주왕래 하였다. 당연히 고관들은 가마를 타고 행차하였고, 호위병들은 말안장 위에서“대감마님 행차시다. 훠이~물렀거라!”라고 호령하며 방망이를 휘둘렀다. 이 때 길 가던 사람은 신속하게 고개를 조아리거나 길바닥에 엎드려야 했는데 동작이 굼뜬 사람은 호위병의 방망이에 얻어맞기 일수였다. 그래서 큰길에 있다가도“비켰거라”는소리가 들리면 사람들은 잽싸게 골목 안으로 피신하였다. 이 골목이 종로에 있는 피맛골인데, 말(馬)을 피한다는 뜻인 피마(避馬)에서 연유한다.외국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17세기 초 유럽에서도 걷는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당시만 해도 걷는 사람들은 걸인이나 도적의 표적이 되어 생명의 위협을 받는 상황이 초래되곤 하였다. 그래서 귀족들은 정원과 사유지를 넓히고담을 높이는 등 자기들만의 세계를 구축하였고혹 밖으로 나갈 경우에는 말이나 마차를 타고 다녔다. 반면에 천한 신분의 사람들은 걸어 다닐 수밖에 없었고, 걸어 다니다가 귀족들의 마차에 부딪치는 사고를 당해도 하소연하지 못하였다.이렇듯 걸어 다니느냐, 탈것에 타고 다니느냐가 신분의 고하(高下)를 구분 짓는 시대가 오랫동안 지속되었고 걸어 다니는 사람은 천민으로 취급 받았던 과거사 때문에 걷기는 주목 받지 못했다. 이러한 이유로 지금도 가능하면 걷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최근 들어 건강의 문제가관심사로 떠오르면서 건강을 유지하는 비결로서의‘걷기’가 대두되었다.걷기는 인간의 본능적 행동으로서 지구상에 출현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인류 초기에는 먹을것을 구하기 위해서 주변을 걸었고, 유목생활 시기에는 주거지를 옮기느라 이리저리 걸었다. 그후 인류는 정착 단계에 이르고 집단을 이루고 살게 되면서 물물교환 또는 장사를 목적으로 먼 길을 걸었다.
‘걷기’의 변천사 - 구도적 의미의 거룩한 행위
문명이 시작된 고대와 문명의 꽃을 피우던 중세에 걸쳐서는 순례의 목적으로 걷기가 성행하였다. 세계 3대 성지로 일컬어지는 곳이 로마, 예루살렘 그리고 스페인의 산티아고 콤포스텔라인데이곳을 순례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되었다.이전까지는 걷기가 생활의 필요에 의한 단순한이동의 수단이었으나 종교적, 정신적 목적이 수반되는 순례가 성행하면서 걷기는 이제까지와는다른 의미로 부각되었다. 성지 순례의 길에서 만큼은 교황도, 황제도, 귀족도 똑같이 길을 걸었다. 이로 인해 길을 걷는다는 것을 구도(求道)적의미로 인식함에 따라 걷기는 거룩한 행위로 여겨지게 되었다. 물론 사회전체에 확산 된 것은 아니지만 걷기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계기가된 것이다.걷기라는 행위가 의도적으로 나타난 때는 16세기경부터라 할 수 있다. 이때에 공간의 활용에변화가 오는데, 즉 귀족들의 주거가 산위의 성채에서 평지의 저택으로 바뀌기 시작하면서 산책공간이 생겨났다. 당시 의사들이 매일 걷는 것이건강에 좋다는 점을 강조한 때문에 귀족들은 회랑을 만들고 날씨에 관계없이 언제나 걸을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대중적인 변화가아니고 오로지 높은 신분인 귀족들 자신들을 위한 것일 뿐이다.대중과 관계된 것으로서의 맨 처음 변화의 조짐은 영국에서 나타난다. 지금까지 요새처럼 견고하였던 귀족들 정원의 경계가 조금씩 허물어졌고, 또한 1770년경부터 정원과 세상이 하나가 되면서 도로가 정비되고 노상 범죄가 감소하기에이르게 되었다. 이는 도보 여행의 물리적 방해요소가 제거되는 계기를 가져 왔으나 아직 걷는 것은‘귀족의 체면 손상’이라는 사회적 인식에서는 완전히 자유롭지 못했다.
‘걷기’의 변천사 - 단순한 이동수단에서 삶의 중요한 존재로
이렇듯 걷기가 사회적 편견에 갇혀 있을 때 이 틀을 깨뜨려버린 귀족이 영국에서 등장했다. 그는 다름 아닌 윌리암워즈워드이다. 그는 1794년 겨울 어느 날 여동생 도로시와함께 그라스미어에 출발하여 케즈윅까지 24km를 걸었다.지금으로서는 24km의 거리가 별 것 아니라고 할 수 있지만그 지역을 가보면, 계속 오르락내리락하는 언덕길이 이어지고 좌우에 야산이 둘러싸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지금도 비오거나 안개가 덮여 있으면 으스스한 느낌이 든다. 200여년 전 당시 야생 동물들의 출현으로 매우 위험했을 이곳을두 남매가 걸어 간 것이다. 두 남매의 용기는 대단하였다고할 수 있는데, 그들의 용기는 위험한 지역을 갔다는데 있지않고 사회적 통념과 귀족의 체면이라는 굴레를 박차고 뛰쳐나온데 있다.워즈워드 이전, 이후에도 걷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처럼걷기를 자기 삶과 예술의 중심으로 만든 경우는 드물었다.워즈워드는 자연 경관에 심취되어 구석구석을 산책하였다.워즈워드에게서 걷기는 그가 세상을 대하는 방식이자 시를창작하는 방식이었다.이 무렵 아름다운 자연을 보는 안목이 생기게 되고 아름다운 경치를 찾아 이를 감상하고자하는 움직임이 싹터서‘여행’또는‘관광’이라는 새로운 개념이 생겼다. 이러한 인식변화는 많은 사상가들, 문학 작가들을 여행에 나서게 하였다. 독일의 괴테는 1786년 이탈리아 여행을 계기로 고전주의를 지향하게 되는, 생애 큰 전환점을 가져왔다. 아름다운동화로 덴마크의 국민작가가 된 안데르센은 지중해 여행을통해 여행의 낭만과 감동을 재현해내었다. 장 쟈크 루소(1712~1778)는 16세부터 여행을 하면서 사상가의 싹을 키웠고 여행의 느낌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나 홀로 다닌 도보여행에서만큼, 그토록 깊이 생각하고, 살아있음을 느끼고, 나 자신을 되찾았던 적은 없었다. 감히 말하건대, 오로지 내 발로 직접 걸었던 여행을 통해서만 그 모든 것을 경험할수 있었다. 걷기에는 생각에 생명을 주고 활기를 띠게 하는 무언가가 있다. 아름다운 경치를 보며, 화창한 날씨에 천천히 걷다보면, 유쾌한 기분으로 산책을 마칠 수 있다. 이것이 나의 이상적인삶의 방식이다. 시냇물, 전나무, 바위, 울창한 숲, 울퉁불퉁한 길에서 나는 자연의 매력에 도취되어 기쁨을 맛볼 수 있었다.이렇듯이 많은 사람들이 걷기를 주된 방법으로 한 여행의결과로 사상적 변화를 가져 왔으며, 세계적 문학 작품들이나오게 되었다. 이제 걷기는 단순한 장소이동을 위한 수단이아니다. 도보여행, 콤포스텔라 같은 옛길 순례, 산책, 자기확인, 자연과의 대화 등으로 그 중요성을 더해 가고 있다. 단순한 이동 수단이었던 걷기가 이제‘나는 걷는다. 고로 존재한다’는 우리의 삶에 존재 이유가 된 것이다.걷기나 여행은 사람을 변화시키기도 한다. 원래 민영환은욕먹는 존재였다. 그는 왕실의 핵심 외척이라는 가문의 배경으로 급격한 출세를 했는데, 왕실만을 중요시하고 백성에게는 관심이 없는 그의 인식 태도 때문이었다. 1894년 동학혁명을 이끈 전봉준이“나라를 들어 먹고, 백성을 학대하는 자”라고 토로했듯이 세간에 그의 평판이 그랬었다. 그러던 그가‘종래의 민판서’에서 변하여‘새사람’이 되었는데, 조선이라는 한 나라를 벗어나 세계를 경험한 것이 계기가 된 것이다.베티나 셀비(Bettina Selby)는 자전거로 영국을 출발할 때는 무신론자이자 불가지론(不可知論)자였지만, 옛 순례자들의 길을 따라 수 백 킬로미터를 여행하여‘별의 들판(Fieldof the Star)’이라 전해오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도착했을 때는 사람이 바뀌어 있었다. 그녀는『순례자의 길(Pilgrim's Road)』에서“여행은 시간과 현실을 벗어난 것이아니었다. 그러나 같은 현실을 다른 각도와 다른 관점에서바라볼 수 있는 기회였다. 나는 성 야고보가 스페인에 왔었다고 믿지 않았지만, 유적지들에는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힘이 스며있는 것을 느꼈다”라고 적고 있다. 그리고 그녀는 순례길에서 배운 겸손이 진정한 순례를 하도록 만들었다고 하였다.순례의 사전적 의미는 신앙 행위의 일환으로 종교상의 성지나 성인의 영혼이 서린 장소를 찾아 참배하는 여행을 말한다. 원래 성지 참배의 목적은 신심(信心)의 고양(高揚) 및 소원 성취와 속죄를 위한 것이다. 따라서 순례는 초월적 능력을 얻거나 회개 혹은 감사의 표시로 성지를 여행하는 것이라할 수 있다. 그렇다면 순례길은 사람들로 하여금 신앙심을 불러일으키고 마음에 평화가 깃들도록 해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걷기’가 성행한 요즘, 다시 길을 묻다
순례의 본질이 이러할진대 요즘 우리의 순례가 과연 그렇게 되고 있는지 반문해 본다.언론 보도에 의하면 다녀간 사람들의 숫자와 함께 **길 167억, ***길 40억 대박 등 길을 통한 수익을 부각하였다. 물론 이는 지역 경제에 보탬이 되는것이므로 좋은 일이다. 그러나 길을 걸으며 자기 성찰의 계기로 삼는다는 본질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기독교 성지인 스페인의 야고보의 길(Camino de Santiago) 800km를 아들과 함께 자전거로 가면서 보았다. 그곳에서는 깃발 들고 가는 그룹을 볼 수없었고, 이벤트 행사를 벌인다던지 사람들을 유치시키려고 애쓰는 단체도 없었다. 그들은 순례자들이 길을 잃지 않도록 표시만 해 놓을 뿐이다. 어디에도상업적인 의도가 보이지 않는다. 이 길을 가는 많은 사람들은 지루하고 힘든길이지만 묵묵히 자신과 싸우면서 40여일을 걷는다.걷기를 경제적 가치에만 목적을 두어서는 안 된다. 걷는 길을 지역경제 창출의 수단으로만 활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자기 단체의 부각에 치중해서도 안 된다. 일반 길이든 순례길이든 간에 길을 걷는 사람들로 하여금 명상·자기 성찰·영적 단련 등에 몰입하도록 해 주어야 한다. 걷는 사람들 또한 행사에 참가하는 생각으로 가거나 옆에서 누가 갔다 왔다고 하니까 나도 질세라길을 나서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것인가를 생각해보아야 한다.산티아고의 길처럼, 켄터베리 순례길처럼 우리의 길에서도 자신을 돌아보며 자기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길이 삶의올바른 길을 제시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김천식 전주예수병원에서 역사자료실장을 맡았다. 현재 전주대학교 역사문화콘텐츠학과에서 강사로 활동 중이며 전주대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