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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7 |
[저널초점] ‘길’의 재발견-예향천리 전북의 마실길 5
관리자(2010-07-05 13:41:00)
‘길’의 재발견-예향천리 전북의 마실길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꽃자리 - 최기우 극작가 길을 걷는 이유는 저마다 다르지만,길은 오가는 사람들을 모두 품어준다.과거의 추억과 지금의 일상과 미래의기대로 걷는 길, 길은 짧아도 내막은긴 길, 길 안의 길과 길 밖의 길, 길을 묻는 길, 꿈을 키우는 길, 홀로 떠나도 좋고, 함께 가도 좋은 길…….낯설면 낯선 만큼, 낯익으면 또 낯익은 그만큼 설레기도 하고 다정하기도한 길의 여정은, 그 꿈만으로도 이미우리를 즐겁게 한다. 계절은 여름, 나그네가 되어 어디론가 떠나기는 더없이 좋은 날이다. 바로 옆에서 꽃 피는소리가, 토각, 차표 끊는 소리처럼 터진다. 도반(道伴), 전라북도. 자연이 살아 숨 쉬는‘전북의 마실길’ 청정한 기품. 섬진강과 금강의 발원지가 있고, 만경강과 동진강이 동서를 가르는 전라북도는 멀지 않은 곳마다 맑은 물이 철철 넘치고, 역사의 상흔을 딛고 의연히 서 있는 산봉우리마다 푸른빛이 난다. 산과 들, 강과 바다를 고루 갖춘 풍요로운 땅. 변산반도의 녹음이 여름을 대표하고, 내장산 단풍은 가을 자태를 뽐낸다. 백양사의 설경이 겨울에 절경을 이룬다면, 벚꽃 풍성한 모악산은 봄에 가장 아름답다. 사람들의 구성진 웃음은 또어떠하리. 움켜쥐기보다 베풀기를 좋아하는 사람들. 어느 찻집에 들어가도 멋진 산수화와 같은 동양화 몇 점은 반드시 걸려 있고, 명필은 아닐지 몰라도 정성스럽게 쓴 서예 족자 몇 점 걸려 있는 곳이 전북이다.전북에서의 걸음은 곁에 있는 것들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는 아주 특별한 여정이다.이 길은 구부러지거나 꺾어져 돌아간 자리마다 반가운 사람들을 감춰놓았기 때문이다.재래시장의 들썩임, 끝없이 펼쳐진 짙푸른 들녘, 산골짜기를 타고 내리는 서늘한 바람,생명이 움찔하는 갯벌, 밤이슬 젖은 바짓가랑이에 차이는 날벌레들, 놀란 가슴 털어내며깔깔대는 달빛, 한 걸음 한 걸음마다 여럿이 일어나 덩실덩실 춤으로 호응한다. 쑥대머리 한 대목이면 약주로 불콰한 아저씨도 눈물 한 바가지는 거뜬하고, 지화자 한 대목에앞니 다 빠진 할머니도 흥에 겨워 어깨춤이 절로 난다. 맺고 풀며 도도하게 흐르는 소리한 자락. 대숲은 곳곳에서 술렁거리고, 댓잎처럼 날카롭고 빠른 바람이 숲에서 불어온다. 그 바람은 적벽에 부는 동남풍처럼 기세등등하다. 그 기운에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에도 길을 낸다. 그래서 길을 가다 모퉁이를 만나면 더 반갑다. 그 모퉁이에서 손을 잡고싶은 사람이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잰걸음을 하거나 뛰어가기도 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길이 있고, 그 길에서 마음과 마음이 만난다. 그러니 길을 나서면 우선내 마음부터 다정하고 볼 일이다. 물길은 낮은 데로 흐르고,사람의 길은 따뜻한 곳으로 이어진다.‘걷는 것’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전라북도는다양한길조성사업을추진하고있다.‘ 예향천리마실길’. 지난해 군산과 익산, 완주, 장수, 부안, 고창, 진안 7개 시·군이 자연과 역사, 문화를 품어 안은 테마가 있는 길을 먼저 열었다. ‘신화가 있는 질마재 백리길’(고창·40㎞), ‘망해산둘레길’(군산·9.1㎞),‘ 변산 마실길’(부안·18㎞),‘ 위봉산성길’(완주·6㎞), ‘백제의 순결! 익산 둘레길’(익산·12㎞), ‘마루한길’(장수·12.5㎞), ‘진안 마실길’(진안·58.3㎞)이다.익산의 길은 서정이 흐른다. 이 길은 1백 년 전 선조들이자연석을 직접 쌓아 만들었던 담장이 복원된 함라마을 돌담길에서 시작된다. 함라 삼부잣집과 담쟁이 넝쿨, 감나무가내다보이고 작은 풀꽃들이 어우러진 이곳은 한발 한발 디디면 시나브로 옛 추억이 떠오르는 길이다. 한옥을 잇댄 담장과 골목과 문(門)이 있고, 묵은 지붕 너머에는 몇 백 년도 더늙었다는 나무 둥치들이 얼마든지 서 있다. 이 땅의 골목들은 걸으면 걷는 대로, 길을 내어준다. 문은 낡았거나 낡지 않았거나 늘 그 자리에 있다. 그 앞에서 문득 길게 목을 빼고친구의 이름을 불러보고 싶다. 기와로 새겨진 꽃문양을 보고있으면 내 안에도 한 송이 꽃이 막 피어오를 것만 같다. 처마가 석양 아래 짙은 그림자를 골목에 드리울 때면, 맑은 바람소리가 걸음을 떼는 길 위로 푸르게 깔린다. 시집 한 권 벗삼으면 더없이 좋으리니. 함라면 소재지에서 칠목재 임도를지나 자생녹차 군락지와 입점리 고분 전시관, 숭림사로 이어지는 이 길은 광활한 익산평야와 금강이 땀줄기를 닦아준다.진안의 길은 물가에 바짝 붙어 지어진 영모정에서 시작된다. 느티나무와 참나무, 서나무와 때죽나무, 산벚나무와 소나무가 산 아래 마을과 사람들을 품으면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들려줄 것만 같이 소담한 곳이다. 이 냇가를 머금은 숲에꽃 피고 잎 지고 눈 내리며 세월이 흐르는 동안, 물소리를 귓전 가득 품었을 마을 어르신들의 말씀은 이야기를 품은 시(詩)다. 백운면을 스쳐온 바람도 언제나 살갑다. 물그림자 짙어진다.완주의 길은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자랐다. 꽃불번지는 산길이든, 좁고 구불구불한 논두렁길이든, 지금은 낡아버린 신작로든, 넓고 평평한 아스팔트든. 발길이 끊어지면숲에 묻히지만,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면 길은 더 단단해진다. 사람의 발자국 소리에 길은 자신만의 소리로 화답한다.보도블록도 걷는 사람마다 다른 소리를 낸다. 근심 있는 사람이 걸어가면 무겁고 둔탁한 소리를 내고, 기쁜 마음으로누군가를 만나러 가는 사람이 걸어가면 맑고 경쾌하다. 이길을 따라가면 전북 땅의 역사가 선연하다. 위봉폭포와 위봉사와 위봉산성, 태조암, 오도재, 오성마을. 연이은 산봉우리들의 굴곡이 장관을 이루고, 동상저수지가 햇빛을 받아 반짝거린다. 운장산과 대둔산도 아련히 시야에 들어온다.고창의 길은‘신화가 있는 질마재 백리길’이다. 고인돌유적지에서 시작돼 오베이골의 숲길과 운곡저수지, 할매바위,선운사, 도솔암, 하천갯벌체험장, 미당시문학관으로 이어진다. 수억 년의 신비를 간직한 살아 있는 거석(巨石) 박물관인고창 고인돌군락은 BC 4~5 세기경 조성된 동양 최대의 고인돌 집단 군락지이자 세계 선사문화유적의 거점으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전 인류가 꼽는 선사문화의 최고 가치이며 자부심인 것이다. 죽림리와 상갑리 고인돌군은 선조의창의성과 정밀한 기술을 살필 수 있다. 그리고 희망의 땅, 미래의 삶터 새만금.서해바다를 벗 삼은 변산의 길은 노을에 붉게 물든 어촌과해변, 갯바위와 포구, 바다 물결에 맞춰 출렁이며 잇닿은 봉우리들이 쉼 없이 펼쳐져 아찔한 풍광을 연출한다. 눈길 주는 곳마다 고즈넉한 포구와 기암절벽, 아늑한 해변이 마술을부리듯 사라졌다 나타난다. 이 길에서는 길을 잃을 걱정은없다. 길을 잃는다고 해도 조금 에둘러 가면 그만이다. 발은좀 더 지치겠지만, 눈과 마음은 한껏 호강할 것이다. 전북의 마실길, 조금 더 천천히, 느리게 전라북도는 올해와 내년, 3대 핵심권역과 14개 시·군별‘예향천리 마실길’을 조성할 예정이다. 핵심권역은 전주·김제·완주를 잇는‘모악산 마실길’(56㎞)과 무주·진안·장수를 잇는‘백두대간 마실길’(111㎞), 고창·부안을 잇는‘서해안해변 마실길’(64㎞)로 총 230㎞이며, 각 시·군에서 조성할 마실길은 총 280㎞다. 사람들의 발길로 무한히 확장되고 있는 전북의 길. 행인들의 잦은걸음에 벌써부터 지친 제주도 올레길을 생각하면 전북의 마실길은 조금 더디 가도,천천히 느린 걸음으로 해찰하며 둘러보는 것도 좋으련만……. 길의 동력은 울퉁불퉁한 바닥에서 생겨나는 호기심.마실길이 모두 생기면 전북의 길은 비로소 곡선을 얻을 것이다. 스스로를 굽힌 그 길에는 저마다 가지각색으로 먼저 피고나중 피면서 도란도란 안부를 나누는 못생긴 꽃들의 살아있는 목소리가 들릴 것이다. 동네 소문이 스며있는 흙벽에 슬그머니 귀를 열어두어도 좋으리라. 아이들은 자라서 어른이 되고, 어른은 살면서 옛날을 돌아본다. 꿈꾸는 앞날이 있고, 돌아볼 옛날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낯설고 두려운 세상으로 떠나는 발길은 얼마나 싱그럽고 아름다운 것인가. 가슴까지 밀려오던 달빛. 그에 흥건히 잠겨, 지나온 날과 살아갈 날들에 대해 밤이 다하도록 이야기할 수 있으리니.빛바랜 사진첩을 들추어보듯, 추억의 길을 되짚어볼 수 있는여정이 이곳에 있다. 익숙한 시선. 우리의 추억 여행은 전라북도에서 시작된다.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꽃자리, 그 위에흩날릴 난만(爛漫)한 꽃비, 전라북도‘예향천리 마실길’. 최기우 극작가. 전북일보에서 기자를 지냈으며, 현재 최명희문학관 기획연구실장으로 있다. 희곡집『상봉』과 창극집『춘향꽃이 피었습니다』를 비롯해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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