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8 |
[문화칼럼] 예술판 안에서 소통(疏通)을 고민하다
관리자(2010-08-03 09:13:37)
예술판 안에서 소통(疏通)을 고민하다
- 이 섭 전시기획자
문화-예술판에서 소통을 바라는 것은 아주 오래된 욕망이다.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으니 소통되기를 갈망한다. 소통한답시고 던지는데 도통 알아들을 수도 알아듣게도 하지 않으니 문화-예술판을 바라보는 판에서도 소통에 먹먹한 가슴앓이를 한다. 하여간 우습지도 않은 일이 벌어지는 판(版)에서 우리는 최소한 이름하나는 걷어내야 한다.
과녁을 향해 쏴라
문화란 본시 소통되어져 그 결과로 응축되어 있는 유·무형의 판이니 말이다. 문화판에서 소통이 부재하다는 것은 그 서술에서조차 문제가 있는 게다. 그럼 문제의 본산은 바로 예술일터인데, 예술은 그러니까 예술판에서는 사실이지 소통이 없다. 소통(疏通)은 말뜻에 따라 막힌 것을 트이게 하고 두루 미치게 하는 것이니 예술에서 무엇이 막히고 무엇이 두루 미치지 못하는지 알 수 있는 재간이 없는 게다. 소통을 바라는 욕망은왜 아주 오래되어 아직도 해결되지 못하고 있는지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 사랑하는 연인사이에서 소통을 바라는 욕망이 성립되기나 하는가? 그건 이미 사랑하는 사이가 아니다. 그러나 결혼 수십 년 지간의 부부사이에서는 소통을 바라는 욕망조차 있기나 한가?예술을 사랑한다면 소통이 수월하고 늙다리 예술 애호의 시간은 그 욕구조차 사라지는것인가?말뜻에는 우리가 놓치고 지나치는 잘못을 되짚어 전회하도록 하는 결심의 찰나가 숨겨져 있다. 두루 미치게 하기 위해 선행되어야 할 것이 막힌 것을 트이게 하는 일이다.이것은 막힌 것을 뚫는 것이 유일한 목적이 아니요 동시에 두루 미치게 하는 일만이 해결할 숙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뚫기 위해 뚫을 도구가 필요하다. 예술에서 도구는 무엇일까? 장르가 다르면 도구가 다른가? 공연예술의 도구가 (완벽한)몸짓, (화려한)조명,(웅장한)소리, (자극적인)시각효과이고 회화에서는 (정서적인)색, (다채로운)색채, (정묘한)선, (참다운)모양과 (그럴싸한)모양새 등이 도구가 되는가? 그럼 드라마에서는 영화에서는 시와 소설에서는 어떠한가? 우리에게 필요한 뚫을 수 있는 도구는 가혹하리만큼예리한 도구임에 분명한데 그것은 손에 잡히는 도구가 아니라 마음에 잡혀 사용될 도구여야 한다. 말하면 말 들어 줄 사람이 있어야 하듯이, 뚫고자 하면 뚫을 것이 먼저 있어야 한다. 엉뚱하게 다른 것을 뚫어서야 곤란하지 않겠는가? 궁수는 10점 만점을 혹여맞추지 못하더라도 과녁 뒤 하늘 높이 화살을 쏘지 않는다. 오히려 참다운 궁수는 4점,7점을 맞추는 한이 있더라도 과녁을 향해 화살을 날린다. 누가 뭐라 해도.
소통의 방법, 서로의 관계에서 찾아라
막힌 것을 뚫으면 두루 미치게 할 것은 무엇인가? 내 말이 아무리 미사여구(美辭麗句)를 구사할지라도 뱀의 혀처럼 귓등을 타고 넘을 뿐 뭔-소린지 너는 알지 못한다. 귓등을치는 소리가 멀리 퍼진들 우리가 그것을 두고 두루 미친다 하겠는가. 들을 만한 말은 더듬거려도, 간혹 획이 틀려 순간 알아차리기 힘들더라도 볼만한 문장을 우리는 쉬 넘기지못한다. 들을 만한 말은 세상이 만들지 사람이 먼저 만드는 법이 없다. 세상은 본디 저 혼자 원래 세상으로 있었던 것이 아니다. 너와 내가, 우리가, 할머니와 아이들이 모여들어서로-관계하면서 그렇게 있어져 왔던 게다. 예술은 그런 세상의 말들을 챙겨내는 예리한도구다. 도구로 챙겨냈으니 두루 미치게 할 건더기는 가진 셈이다. 비로소 문화-예술이각각의 판에서 판 하나에로 나올 수 있는 깜냥이 생긴 것이다. 헤아려 볼 능력이 있으니이참에‘그 때’또한 알게 될 터이다. 때를 알면 드디어 비로소 문화에 예술이 관계하게된다.때는 항상 너와 내가 함께 하면서‘우리’에게 찾아든다. 그래서 우리는 항시 그걸 두고그때마다 알맞은 것을 내주고 받으며-말하고 들으며-보이고 보며-마주하게 된다. 마주하는 것이 이루어지는 것은 그래서 늘 때에 맞추어 일어난다. 이런‘때’에로 우리는 남의이야기가 아닌 우리의 이야기를 가지고 들어간다. 그래야만 정말이지 때에 맞는 말을 주거니 받거니 할 터이니 말이다. 정치가 늘 이때를 갖추면 환상(幻想)이고, 사회 면면에서이때를 알아차리면 무엇이든 구현이 될 터이다.그러나 이 모두가 환상(幻像)이다. 오로지 유일하게 예술에서만이 이것을 구현에 이르게 한다. 구현의 장으로써 넓게 품을 열어 받아주는 것이 문화다. 그렇게 세상의 말들은‘그 때’에 맞추어서 예술에 의해 문화에로 들어가 다시 문화가 되어 예술을 살찌우게 한다. 그러므로 때는 언제나 시공간의 선형적 이해를 넘어서 있게 된다. 작년 여름 이맘 때,바닷가에서가 우리가 주고받던 말이 담긴‘그 때’가 지금-여기에 있는 우리에게 또 다시‘그 때’로 온다면, 어떤 시인의 글과 말에 실려 온다면, 어느 몸짓에 담겨 다시 온다면 때는 말 안에 그 바다와 그 여름을 다시금 여기에 불러오는 게다. 이제‘그 때’는 두루 미치게 하고 뚫어 막히지 않게 한다.‘그 때’는‘일방-관계’이거나‘지도-관계’안에서는‘그 때’를 드러내지 않는다. 우리는 소통되지 않는 그 답답함을 그래서 다른 관계로부터 찾아내려 하는 것이다. 서로- 관계에서 소통은 언제나‘그 때’를 함께 만들어 낸다. 예술은 그 장르를 불문하고 서로-관계 안에서 작동하는가? 일방-관계에서 정치처럼 제 멋에 취하지 않았나? 지도-관계처럼 누굴 가르쳐들려고 안달하지 않았나? 우리 여전히 욕망만 하고 알지 못하는 걸까?
이 섭 미술의 공공성 실현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우리 삶에 맞는 예술 관련 개념들을 정리해 들어가려고 노력 중에 있다. 독립기획자로활동 중이며 큐레이팅 서비스를 주목적으로 하는 아트컨설팅서울을1997년부터 운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