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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8 |
[명인명장] 가야금명인 - 강정열
관리자(2010-08-03 09:16:04)
“우리 소리에는 한과 애환이 담겨있어 ” 가야금명인 - 강정열 강정열 명인 걸어온 길 1950년 전북 남원시 보절면 신파리에서 태어나다 1958년 고모이신 강순영 선생에게 줄풍류 및 신관용류 가야금산조 사사 1971년 서공철 선생에게 가야금산조 및 병창 사사 1973년 부산기악협회 기악부 강사로 7년 동안 활동 1980년 전주에 강정렬 가야금 연구원 개원 1984년 전북대학교 음악교육학과 국악강사 위촉 1985년 제11회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 기악부 장원 1986년 전북도립국악원 현악부 교수 위촉 1988년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 정달영 선생 문하 입문 2001년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산조 및 병창 보유자 지정 척박했던 시절에도 한눈팔지 않고 오롯이 우리의 소리를 지켜온 이가 있습니다. 평생을 소리와 가야금에 바쳐 온 강정열 명창(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산조 및 병창 예능보유자)입니다. 강 명인은 무형문화재였던 고 정달명 선생을비롯해 서공철, 진만국, 성금연, 강순영 등 당대의 기라성 같은 가야금명인들에게 사사, 가야금과 소리의 완전한 조화를이루며 남자 가야금 병창의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됐습니다. 그의 가야금병창은 서공철, 정달영으로 이어지는 고제(古制)의 맥을 고스란히 이으며 더욱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가 빛나는 이유입니다.그러나 요즘 그의 어깨는 더욱 무겁습니다. 이제는 희소하기까지 한 남성 가야금병창을 되살리는 일이 그 앞에 놓였기때문입니다. 50년 가야금 인생을 뒤로하고, 또다시 새로운 발걸음을 내딛는 강정열 명인의 걸음에 함께 했습니다. 자연스럽게 그 사람들 소리, 연주 따라하면서 지냈지 1950년에 남원 보절면에서 태어났어. 우리집 형제가 좀 많은데 9남 5녀야. 내가 그 중에서 다섯 번째고.남원에서 태어나긴 했는데 어렸을적에 아버지가 진안에서 사업을 해서거기서 자랐어. 당시 자유당 시절이었는데, ‘장춘관’이라고 큰 음식점을 경영했지. 그때 우리 집에 국악명인들이많이 왔다 갔다 했어. 나도 자연스럽게그 사람들 소리하고 연주 따라하면서지냈지.사실 우리 집안은 대대로 예술 쪽에관심이 많았어. 아버지도 가야금을 조금 타셨고…. 인간문화재인 대금 명인강백천 어른이 내 숙부고, 동편제 판소리 마지막 계승자인 강도근 명창은 당숙이 되지. 현재 경남 도무형문화재인강순영 어른은 우리 친 막내 고모님이야. 안숙선 명창은 고모 딸로 나랑 내종간이여. 다들 이렇게 판소리며 가야금, 대금 등 국악예술에 종사했어.그래서 나도 어렸을 때부터 우리 가락을 빨리 익혔지. 그러다가 일곱 살때 처음으로 가야금을 배웠어. 고모인 강순영 선생님한테. 그전까지는그냥 나 혼자 옆에서 보고 따라하는정도였지.그러다가 내가 11살 때 아버지께서돌아가셨어. 아버지 돌아가시고 나니사업은 망했지. 어머님 혼자 고생 많이하셨어. 여자 혼자 14명 자식 건사하기가 보통 일인가. 아주 힘들었지. 정말 가난 때문에 고생 많이 했어. 나도어머니 도와서 이일 저일 안 해본게 없어. 그때는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었으니깐…. 동생들도 학교 보내야 하고. ‘내가 너를 만나려고 여기까지 왔나보다’ 아무튼 진안에서 국민 학교를 다녔는데 13살 땐가 우연히 진안 오일장에갔다가 진만국 선생님을 만났어. 진안오일장 열리는데 장안에 하숙집이 하나 있는데 거기 앞을 지나가는디 갑자기 가야금타는 소리가 들리더라고. 아그러더니 <쑥대머리>가 연이어 들리는거야. 그 소리에 놀라서 들어가 봤더니 진만국 선생님이 <쑥대머리>를 부르고 있네.원래 이 선생님은 완주 사람인데 당시 정처할 곳이 없어 시장상인들 묶는하숙집에서 기거하면서 연주생활로 먹고 살았나봐. 무작정 들어가서 절을 하고는 선생님 제자가 되고 싶다고 했지.그랬더니 선생님이 깜짝 놀라면서‘내가 너를 만나려고 여기까지 왔나보다’고 하면서 제자로 삼아줬어. 그 자리에서 <쑥대머리>하고 <갈까부다>를 알려 주더만.선생님께 계속 배우고 싶은 마음이드는 거야. 어머니한테 허락도 안 받고집에 모셔갔지. 근디 선생님이 몸이 불구셨어. 왜냐면 과거에는 아편하는 사람들이 많았어. 선생님은 아편을 하다가 끊으니깐 중풍이 온 거야. 그래서하체를 못 써.진만국 선생님을 모시고 갔더니 어머니가 보고는 역정을 내는 거야. 어디서 저런 사람 모시고 왔냐고. 그래서내가 어머니한테 다른 일 다 도와드린다고 약조하면서 부탁해가지고 선생님을 아랫방에 모셨어. 선생님한테 1년정도 가야금병창을 배웠어. 그 후에는선생님도 떠나도 나도 남원으로 갔는데, 훗날 선생님이 돌아가시기 직전에나보고 고맙다고 하더라고. 아주 좋은분이셨어. 세상에 그냥 얻어지는게 없어… 그래도 공부는 해야 하니까 진안국민학교 졸업하고는 남원용성중학교로갔어. 그때 남원에 강순영 선생님이 가야금을 가르치고 있었어. 선생에게 신관용류 가야금산조를 싹 배우고, 강도근 명창한테는 판소리를 배웠지. 그런데 <흥보가>하고 <수궁가> 두 바탕을다 배우니깐 변성기가 온 거야. 그때가열다섯이었으니깐 변성기가 좀 일찍온 편이지. 그러니까 상청이 도저히 나오지 않지. 아 소리가 안 나오니깐 강도근 선생님이 그냥 너는 가야금이나하라고 하는 거야. 인자 오기가 생기더라고. 그렇게 배웠는데 소리가 안 나오니까. 그래서 지리산에 들어가 버렸어.거기서 1년 정도 묶으면서 폭포에서수련을 했어. 목을 트이는 수련을 계속해서 했지. 그랬더니 상청이 다시 나오더라고. 그 후에는 자리 옮겨서 지리산천왕봉에 있는 절 밑에 움막 얻어서 가야금 공부했지. 내가 그렇게 애로가 많았어. 고생도 많이 했고. 세상에 그냥얻어지는게 없어….중학교 졸업하고는 서울로 올라가서울국악고등학교에 들어갔지. 학교에서 김병호선생님에게 산조 배웠는데, 당시 성금연 명인이최고 인기였거든. 그 문하로 입문해서 가야금산조를 배웠지.거기서도 참 고생 많이 했어. 내가 그때 자취를했는디 옆 방 할아버지가 옷장사 했어. 어느 날은나한테 옷 한 뭉치 주면서 장사해 볼꺼냐고 물어봐. 한다고 했지. 그때 너무나 형편이 어려웠거든.그래서 다음날 할아버지하고 같이 서울용산시장에 옷장사를 하러 나갔어. 아 그런데 내가 잘 팔았거든. 젊은 놈이 거기 와서 그러고 있응게 아줌마들이 귀엽다고 막 팔아줬어. 그러니깐 나는 옷을꺼내놓기만 하면 금방 팔고, 팔고 했어. 내꺼 다팔면 할아버지 옆에 가서 거들어서 팔곤 했지. 그리고 또 다 팔면 상인들 장사도 도와주고…. 그래서 상인어른들한테도 이쁨 많이 받았어. 그때 수입도 짭짤했지. 그 돈 모아가지고 수업료도 냈으니까…. 가야금산조도 배우고, 철가야금산조도 배우고, 가야금병창도 배웠어 그러다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중퇴를 하게 됐어.어머님이 병이 깊었거든. 장이 안 좋아 가지고 뭐만 먹으면 쏟아. 그런 병에 걸려가지고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겼어. 굿도 해보고, 약도 지어 드리고, 어떻게 해도 안 낫더라고. 그래서 어떻게 해?어머니는 아프고, 동생들은 많으니 내가 내려가야지. 내 위에 형·누나들은 전부 객지로 나가 먹고사느라고 정신없었어. 돈을 벌어야 하니까….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내가 내려갔지.다시 진안으로 내려와 가지고는 어머님 병간호도 하고, 동생들 밥해 먹이면서 학교 보내고 그랬지. 워낙 동생들이 많으니깐 챙겨야할 식구가 많았지. 별일 다 하면서 먹고 살았어. 당시에…. 그러다가 어머니께서 조금 병이 호전됐지.그래서 나는 남원으로 갔어. 남원국악원에 가가지고 공부도 할 겸 강사 일을 했지. 그때가 열아홉인가 그랬어. 인자 거기서 일하면서 공부도하다가 돈을 좀 모았어. 공부를 계속 하고 싶으니깐…. 그때 서공철 선생님께서 굉장히 유명하셨지. 그 분께 공부를 배워야겠다고 결심하고 71년도에 서울에 갔어. 가야금산조 명인인 서공철 선생님한테 공부를 배우려고…. 가서는 선생님 댁에서 일 년 간 묶으며 공부했지. 선생님한테 가야금산조도 배우고, 철가야금산조도 배우고, 가야금병창도 배웠어.그런데 내가 형편이 어려워 생활이 곤란했거든.그때 강정숙 선생 부모님이 나는 양자식으로 삼아줬어. 그러면서 서공철 선생님한테 배울 때 뒷바라지를 다해줬지. 나는 강정숙 선생하고 의남매처럼 지내고…. 참고마운 분들이야.서울에서 공부를 끝난 후에는 다시남원국악원으로 내려와 강사 일을 했어. 그때 우리 안사돈 할머니께서 예술하는 놈은 바람기가 생긴다고 결혼해서 바람기 없애야 한다고 중매를 서줬어. 그래서 얼떨결에 선을 보게 된 거야. 그게 인연이 돼 결혼해가지고 지금까지 잘 살고 있어. 아들 하나, 딸 둘낳고. 허허. 전주대사습놀이에서 신관용류 가야금산조로 장원을 했어 그러던 중에 군대 가야 할 나이가 됐는데 나는 군대를 못 갔어. 내가 언젠가 사고를 크게 당한 적 있거든. 그게언제였는지는 잘 기억 안 나는디…. 암튼 진안 집에서 수박농사를 지었는데이웃집 연장 돌려주러 가다가 빗길에미끄러져서 넘어졌어. 아 그런데 넘어진 곳에 긴 철사가 비죽 나와 있었던거야. 그래 가지고 철사가 몸 밖으로뚫고 나왔어. 그때는 정말 죽을 뻔 했지. 그 후에도 몸이 회복이 안 되가지고 오래 입원했지. 그러다 보니깐 몸무게가 43kg 정도밖에 안 됐어. 남자 몸무게가 그 정도 감이면 엄청 약한 거지. 그래서 군대를 못 갔어.그러다가 73년에 부산국악협회에서부산으로 오라고 요청하더라고. 남원생활 정리하고 부산으로 가서 활동을했지. 그때만 해도 부산은 국악의 불모지였어. 그런데 무용학원은 굉장히 많았거든. 그래서 음악반주를 많이 해줬지. 그러면서 부산국악협회 기악부 강사로도 활동하고. 그렇게 7년 정도 생활하다가 80년에 5월에 다시 전주로왔어. 왜냐면 전주에서 신관용류 가야금산조를 공부하려고….전주에 와서는 가야금 학원을 개원했지. ‘강정열 가야금 연구원’이라고지금 다가동에 있었어. 인자 학원에서가야금 가르치면서 신관용류 가야금산조를 다시 공부했어. 이전에 강순영 선생님한테 신관용류 산조를 배우긴 했지만 신관용 선생님께 직접 배운 것은아니니까. 강순영 선생님은 신관용 선생님과 창극단 활동을 같이 하면서 5년 정도 가야금산조를 배웠었어. 그래서 나도 직접 배우고 싶어서 신관용 선생님이 생전에 남긴 녹음테이프를 구했어. 그거 가지고 들으면서 따라하고연습해 신관용류 산조를 완성했지.요새야 생활이 좋아지고, 나라가 좋아지니까 학교에 국악과가 생기고 예술과가 생겼지. 그때만 해도 예술인들은 대우도 못 받았어. 그래서 나도 먹고 살기 힘들어 요정같은 데 가서 반주해주곤 했지. 그때는 먹고 살기 힘들어서 너도나도 그랬으니까. 그런데 아 이거 자존심 상해서 못하겄더라고. 그러던 중에 84년인가에 전북대학교에서음악교육과 강사를 해달라고 해서 그일을 접고 다신 안했지.그 이듬해에는 제11회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에서 신관용류 가야금산조로 장원을 했어. 그때 현재 국립국악원에 있는 이세환 선생님 거문고로 나왔는디 운이 없어서 실수를 했어. 거문고가 더 웅장하고 화려한디 내가 실수를 안 해서 장원한 거지.그 외에도 경주 신라예술제 국악대제전하고 광주 제2회 전국 국악대제전에서 우수상 탔어. 그렇게 활동했더니 86년에 전북도립국악원이 생겼는데 와 달라고 하길래 가서 가야금 가르쳤지. 지난 달, 그러니깐 6월 24일에정년퇴임했으니까 25년 가까이 도립국악원에 몸 담은거야. 나오려니까 서운 터라고…. 오로지 일념으로 연주만 생각해야… 암튼 도립국악원 교수하면서 국립국악원에서 공연도 하고, 가야금 발표회도 하고 정신없이 지냈지. 하여간 공연이라면 질리게 했어. 불가리아 같은데가서도 하고, 미국도 가고, 이태리, 프랑스 등…. 일본은 수도 없이 갔다 왔고. 그 중에서도 2004년인가 미국 카네기홀에서 공연했는데 참 기분 좋았어. 당시 뉴욕 한국국악원에 박윤숙 씨라고 원장이 있었는데, 그 분이 한국에와서 나한테 병창을 조금 배웠었거든.그러면서 자기 발표회 하는데 나보고같이 공연하자고 하더라고. 그래서 카네기홀에서 같이 공연했지.또 99년에는 신관용류 가야금산조,정달영류 가야금병창, 서공철류 가야금병창으로 음반도 냈어. 그렇게 해서라도 선생님들의 맥을 이어야 하니까.그러던 중에 88년도에 제일 큰 스승이신 인간문화재 정달영 선생님을 만나게 됐어. 선생님은평소에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았는데,당시에는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에 심사하러 내려오셨더라고. 원래 알기는 그 전부터 알았기만 그때 정식으로 제자를 삼아주시더라고. 그렇게 바로 선생님 문하에 들어가 꼭 십년을 공부했어.선생님께서는 엄하기도 참 엄하셨어. 성격도굉장히 완고하시고. 가야금 연습하다가 조금이라도 허튼 짓하면 엄청 혼났어. 왜냐면 공부란 것은다른 생각하면 안 되거든. 오로지 일념으로 연주만 생각해야 돼. 그래도 정달영 선생님은 나를 친자식같이 생각해주셨어.뭐 그때는 선생님께서 악보를 못 보셨으니깐다 구전으로 배웠지. 선생님이 하는 것 보도 그대로 따라하는 형식으로 그렇게 나는 구전심수로배웠지만 내 제자들한테는 다 악보로 가르쳐.그렇게 삼년 정도 후에 92년인가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산조 및 병창 이수했고, 95년에는 전수교육 보조자로 지정됐어. 내가 정달영류 가야금병창의 전승자란 거지.선생님이 타계하고 난 후에는 내가 그 뒤를 이어서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가 됐어. 그게 아마 2001년일 꺼야.그때 참 기분 좋았지. 지금까지 피땀 흘리며 노력해 온 것 인정받은 것 같고…. 평생을 쉬지 않고 연습해야 하는 거야 사실 그렇게 되기까지 한때는 방황도 많이 했어. 집안 사정도 안 좋고, 가야금 연습도 힘들고.그래도 나는 가야금으로 성공한다는 집념을 가지고 있었어. 이것으로 최고가 되겠다는…. 훌륭한선생님들을 만나 뜻을 이루게 됐지.그래도 어떤 점에서 보면 그 고생이 약이 된 셈이야. 왜냐면 소리를 할 때는 한과 애환 같은게있어야 하거든. 그럴려면 평생을 고생해야 한이나오고 애환이 나오는 거야. 연구에서는 그게 가장 중요해. 그래서 경력을 중요시 하는 거지.나 역시도 열다섯 살까지는 가야금 맛도 모르고 무조건 타고 부르고 했어. 그런데 서른 여섯쯤인가. 가야금의 생명체를 알겠더라고. 그 뒤로부터 본격적인 공부를 시작했지. 그때는 인제 쓸데없는 가락은 털어버리고뿌리 기둥만 가지고 타는 거야.특히 새벽 공부를 하며 실력이 많이늘었어. 항상 새벽 4시쯤에 일어나 불꺼놓은 상태에서 가야금을 연주했어.손가락에 눈 달리라고…. 그렇게 타다보면 옆에서 누가 아무리 불러도 몰라.그때는 가야금에 소리에 빠져서 아무소리도 안 들려. 그렇게 수없이 연습하다 보니 득음을 하게 됐어.그래도 지금도 며칠 쉬거나 하면 당장 소리가 달라. 그렇기 때문에 가야금이라는 것은 늘 갖고 살아야 해. 평생을 쉬지 않고 연습해야 하는 거야. 그래야 소리에 변화가 없고 모든 조화를다 이뤄낼 수 있어. 그 명맥이 끊이지 않도록 제자들을 더 잘 가르쳐야지 그런데 요즘에는 병창을 하는 남자들 수가 줄어들고 있어. 그래서 참 안타까워. 지금 내 제자 중에도 남자애가두 명 있는데 병창이 어려운 것이라 힘들어 해.사실 병창은 남자들만 했어. 여자들이 한게 아니여…. 그런데 성금연 선생님을 비롯해 여자 선생님들이 여제자를 많이 길러내면서 병창이 여성화된거지. 남자선생님들은 그것 꼴보기 싫다고 손 놓아버리고…. 옛날 양반들이라 고집이 완고했으니까. 그래도 남자병창은 그 만의 맛이 있는 거야. 남성다운 기백과 깔깔하면서도 거친 맛은남자만이 할 수 있어.요즘 젊은 층은 어려우면 쉽게 포기하는게 아쉽더라고. 조금만 더 노력하면 잘 할 수 있는데, 금방 포기해. 판소리하는 아이들은 그렇지 않은데….뭐 이제 내가 더 잘해 나가야지. 스승님들이 전수해준 그 명맥이 끊이지않도록 제자들을 더 잘 가르쳐야지. 그래서 나중에는 제자들 다 데리고 전국순회공연 한 번 하는 게 소원이여.그러려면 더욱 부지런히 잘 가르쳐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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