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8 |
임안자의‘내가 만난 한국영화’
관리자(2010-08-03 09:16:54)
임안자의‘내가 만난 한국영화’
라 로셀국제영화제에 초청된 이두용 감독의 작품들
- 임안자 영화평론가
라 로셀국제영화제와 한국영화와의 인연
1993년, 제21회를 맞은 라 로셀국제영화제(7월 1~11일)에서 이두용 감독을 위한 헌정시사회가 열렸다. 배창호 감독의 영화 일곱 편이 이곳에서 같은 프로그램을 통해 소개된 지 1년 뒤였는데, 유럽에서 한국영화가 흔치않던 그 시절에 한 영화제에서 2년에 걸쳐 두 한국감독의 작품을 잇달아 보여준 곳은 라 로셀국제영화제가 처음이었다. 그런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라 로셀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 장-루 파ㅆㅔㄱ의 설명을 들어보면“1993년 10월 파리의 퐁피두센터에서 대규모의 한국영화회고전이 열릴 예정이다. 하지만 프랑스 관객은 한국영화에 별로 익숙하지 않다. 그렇다고 이 방면에 전문가들이 많아서 시기에 맞춰 여론작업을 활발히 할 수 있는형편도 아니다. 2년 연거푸 헌정시사회를 기획한 것은되도록 미리 홍보를 하기 위해서였다. 다행히 작년 배창호 감독의 영화들이 기대 이상의 좋은 반응을 일으킨 데다 올해 이두용 감독 영화 역시 상영 때마다 입장권이 매진될 정도로 관객의 인기가 대단하여 짧은 기간에 한국영화에 대한 인식이 눈에 띄게 달라지고 있으며, 특히 기자들 사이에 평이 아주 좋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자신의 의도가 잘 맞아떨어진 데 대해 기쁜 표정이었다.파ㅆㅔㄱ이 라 로셀국제영화제 반년 뒤에 있을 퐁피두센터의 행사에 그처럼 신경을 썼던 까닭은 겹친 직무 때문이었다. 그는 라 로셀국제영화제의 집행위원장이자 동시에 퐁피두센터 영화부의 총책임자로서 파리의 한국영화회고전을 주도해야 하는 장본인이었다. 그 밖에도 그는 칸영화제 황금카메라 수상 책임자이자 프랑스의 전통 깊은『라루쓰 백과사전』영화사전(Larousse/ Dictionaire du Cine′ma) 편집장으로서 1인 4역을 동시에 맡고 있던 프랑스 영화계의 거장이었다. 파ㅆㅔㄱ에 대해서는나중에 조금 더 자세히 쓰려고 한다.장-루 파ㅆㅔㄱ은 어릴 때부터 귀에 이상한 병이 도져 안타깝게도 비행기 여행을 할 수 없는 처지였다. 그래서그는 이두용 감독의 헌정시사회를 준비할 때에도 한국에 직접 가지 못하고 대신 실비 푸라, 푸른느 앙글레어라는 두 여성 프로그래머를 보내 사전 작업을 하도록 했다. 이 둘은 퐁피두센터 영화부에서 일하는 파ㅆㅔㄱ의 프로그래밍 팀에 속해 있으며, 그런 인적 구조를 바탕으로해마다 라 로셀국제영화제의 프로그램은 거의 반 퐁피두센터 영화부에서 만들어졌다.라 로셀국제영화제는 나에게 처음이었다. 나는 1991년 영화진흥공사에서 일하는 동안 인터뷰를 하기 위해이두용 감독과 한 번 만난 적은 있으나 그 뒤에 다시 만날 기회는 없었다. 다행히 그 때의 인터뷰 원본은 재료부족으로 고심하는 퐁피두센터의 프로그램 팀에 큰 도움이 됐다. 그리고 나는 영화제 기간 동안에 주로 기자단 쪽의 통역을 맡았다.사실 나는 통역 전문인은 아니지만 언젠가부터 여러나라 말을 쓰는 한국영화의 전문가로 알려지면서 유럽의 여러 영화제에서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았고, 그럴 때마다 자동적으로 통역 일까지 덤으로 맡아 여러 언어를통역할 때가 많았다.글이 좀 엇나가지만 통역 이야기가 나온 김에 해외 국제영화제에서 수시로 일어나는 통역의 문제점에 대해몇 마디 하고 싶다. 내 경험으로 봐서 통역은 두 종류로나눠진다. 하나는 감독의 말을 그대로 현지의 말로 바꾸어 전하는 것이다. 대부분 유럽영화제에서는 편리상 현지의 유학생이나 교포들에게 통역을 맡겨왔다. 그러나이런 경우는 현지의 언어에 익숙하다는 장점이 있지만감독의 작품세계를 파악하지 못한 채 즉시 통역을 하기때문에 감독의 영화적 표현이나 의도가 관객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못할 우려가 크다. 하지만 자신의 작품을통역을 통해 외국 관객에게 이해시켜야 하는 감독의 입장에서 보면 누가 어떻게 통역을 하는가는 영화의 자막만큼이나 중요한 문제다. 1990년 뮌헨국제영화제 때 임권택 감독은 자신의 헌정시사회 기자회견이 끝난 뒤 통역을 맡았던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외국어를 하나도 못하지만 관객들의 표정을 보면 통역이 얼마나 잘되고 있는가를 그냥 알아볼 수 있다”.그럼 두 번째로 임 감독이 말하는 잘된 통역이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나는 감독의 말을 그의 작품적 문맥(Context)에 맞춰 하는 통역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식의 통역에는 감독의 작품세계를 미리 꿰뚫어 볼 수있는 정보가 꼭 필요하다. 그렇지만 정보자료를 해외에서 구하기란 쉽지 않다. 물론 요즘에는 인터넷이 등장하고 외국어를 잘하는 감독들이 늘어나면서 상황은 많이바뀌었지만 그렇다고 통역의 문제점이 곧 사라질 것 같지는 않다.
시네필의 라 로셀국제영화제
라 로셀은 프랑스 남서쪽에 자리한 대서양 해변 지역의 아름다운 항구 도시다. 이곳에 영화제가 열린 때는1973년이다. 그 전에는 현대음악과 춤의 축제장소로 유명했으나 차츰 영화제가 그 자리를 이어받았다. 라 로셀국제영화제(Festival International du Film de LaRochelle)는 한마디로 영화애호가들의 오아시스다. 그리고 그 오아시스를 만든 사람은 앞에서 말한 장-루 파쎅이다. 흥미롭게도 파쎅은 애초에 영화와는 상관없는사람이었다. 그는 솔본느 대학에서 역사, 지리학을 전공한 뒤 이 방면의 대학교수가 될 예정이었다. 그런데 교수자격시험이 있던 날 그는 우연히 지하철역에서 <시티즌 케인>의 극장 광고를 읽고는 시험을 포기하고 그냥영화관으로 발길을 옮겼다. 왜냐하면 하필 그 시간에 파리에서는 마지막인 이 영화 상영이 근처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프랑스에서는 순수한 영화애호가를 일컬어‘시네필 (Cine′philie)’이라고 하는데, 파ㅆㅔㄱ은 자타가 인정하는 100% 진짜 시네필이었다. 그가 라 로셀국제영화제에 시네필의 오아시스를 만든 건 당연한 귀결이었다.그렇다고 그의 꿈이 쉽게 이뤄진 것은 아니었다. 라 로셀국제영화제의 발전사를 보면 첫 영화제 때는 영화 상영관에 겨우 관객 몇 명이 앉아있을 정도로 시들했었다.그럼에도 파ㅆㅔㄱ은 라 로셀의 쟁쟁한 산업계 후원조차 마다하고 시네필의 뚝심 하나로 오로지“영화의 높은 질과다양성”을 고집하면서 세계의 명작들을 라 로셀에 끌어들였다. 그러자“뜻이 있는 길에 길이 있다”는 격언처럼얼마 가지 않아 영화애호가들이 여기저기서 모여들었고,라 로셀은 영화전문가들 사이에‘빠지면 안 될 곳’으로갈수록 주목받았다. 프랑스의 일간지 <리베라시옹>의한 기자는 1992년 라 로셀국제영화제의 20주년을 기념하는 기사에서“시작부터(상업영화의) 오랜 인습에 과감하게 대항하는 하나의 영화적 선포였다…. 라 로셀국제영화제는 텔레비전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예술적으로잘 다듬어진 아름다운 영화들을 보여주는 유일한 곳이다”라면서 파ㅆㅔㄱ의 독자적인 프로그램을 높이 평가했다.제21회 라 로셀국제영화제의 개막식은 7월 1일, 오후8시쯤 영화제의 본부로 쓰이는 시문화원에서 열렸다.라 로셀은 17세기부터 아프리카의 흑인을 유럽과 북미에 팔아넘기던 악명 높은 노예매매의 중심지였다. 개막식은 옛 노예시장을 다목적 문화공간으로 고쳐 쓰고 있는 시문화원의 청색관에서 진행됐다. 그리고 실내 분위기는 천 석이 넘는 큼직한 공연장을 꽉 채운 관객들의 열기로 사뭇 흥겹게 흘러갔다. 그에 반해 개막식의 식순은영화제의 성격에 걸맞게 아주 조촐했다. 먼저 파ㅆㅔㄱ과 라로셀 시장의 짧은 인사말이 있은 뒤 초청 감독과 배우들의 소개가 뒤따랐다. 프랑스 영화의 얼굴인 배우 미셀 피꼴리, 그리스 출신의 미국감독이자 영화 <일요일은 절대안돼요>의 감독 줄 다쌍, 한국의 이두용 감독, 멕시코의아투로 립스타인, 70년대 서독으로 망명간 헝가리 출신그욍기시와 카바이, 프랑스의 베르트란 에휀테르와 에드윈 베이리가 차례로 무대 위에 올랐고, 그 때마다 객석으로부터 뜨거운 박수가 터졌다. 초청객에 대한 소개가 끝난 뒤에는 베이리 감독의 첫 영화 <마틸데를 사랑해야하는가?>의 남자 주연 배우가 나와 풍자적인 코미디를즉흥적으로 연기하면서 관객을 웃겼다. 식순은 그것으로간단히 끝났고, 초청객들은 파티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파티장에는 대서양의 싱싱한 해물요리와 감미롭게혀를 녹이는 샴페인, 포도주, 치즈, 케이크 등 프랑스의전통음식문화를 자랑하는 진미의 음식들이 우아한 실내의 분위기에 맞춰 먹음직스레 늘어 놓여 있었다.영화제는 7월의 뜨거운 한여름이었는데도 밀려드는관객으로 계속 붐볐다. 그런 가운데 나는 바쁘게 움직이는 파쎅과 카페에서 만나 잠깐 인터뷰 겸 이야기를 나눴다. 그의 대답의 한 부분을 여기에 옮기자면, “나는 지난20년 동안 라 로셀국제영화제를 맡고 있다. 시작은 좀어려웠으나 적자를 낸 적은 없고 수년 전부터 관객 수가해마다 15% 비율로 늘어나고 있어 영화제 경비의 1/4을입장료로 충당하고 있다. 다만 올해 정권이 보수당으로바뀌어 앞날이 불확실하긴 하지만 현 문화부장관 자크랑이 해놓은 일이 워낙 많고 훌륭하여 곧 큰 변화가 있을것 같지는 않다. 라 로셀국제영화제의 설립 동기를 말하자면 갈수록 세력을 뻗쳐가는 프랑스의 TV 영화에 맞서기 위해 출발했다. 당시 프랑스 텔레비전은 일방적으로미국의 상업성 TV 프로그램을 따라가고 있었다. 나는그대로 가다가는 프랑스가 미국문화의 식민지가 될지도모른다는 우려와 함께 그런 상황에 누군가는 반기를 들어야 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다. 그 같은 대항(운동)이있었기에 파리에는 지금 세계 각처에서 들어오는 질 높은 영화들이 상영되고 있다. 아마 이 점에서 파리는 할리우드 영화에 대항할 수 있는 유럽의 마지막 보루라고생각하며 라 로셀국제영화제도 그에 한몫을 해왔다고자부한다. 내가 한국문화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영화가 아니라 음악을 통해서였다. 한때 나는 라디오(Radio Libre)에서 세계 음악을 소개하는 일을 맡고 있었는데, 거기서 한국의 전통음악을 알게 됐으며 청취자들의 반응도 아주 좋았다. 그 뒤 칸, 베를린, 런던 등에서 한국영화를 보았고 임권택, 배용균 감독 등을 만났다. 내가 지금까지 본 한국영화들은 일본이나 중국영화에 비해 극의 구조나 표현양식에 있어서 자국의 전통에훨씬 충실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이점이 한국영화의 특징이라고 본다….”파ㅆㅔㄱ은 대담을 끝맺으면서“나의 꿈은 늙어서 포르투갈의 어느 외딴 시골에 시네필을 위해 조그만 영화박물관을 하나 짓은 일”이라고 했다. 그리고 나서 10여 년뒤 그는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에서 멀지 않은 한 시골에 작은 영화박물관을 열었다. 나는 박물관의 개막식에집안 사정으로 가지 못했으나 내 아들과 딸이 돌잔치 때입었던 고운 색깔의 옷가지와 하얀 버선 그리고 딸의 색동 고무신 한 켤레를 보냈다. 라 로셀에서 인터뷰할 때이두용 감독의 영화에 나오는 배우들의 한복이 아주 예쁘다고 칭찬을 많이 했던 그의 말이 기억나서 그에게 애들의 한복을 추억의 선물로 준 것이다.
이두용 감독의 작품세계
이두용 감독은 1942년생으로, 60년대 중반에 이강천, 정소영 등의 여러 감독 밑에서 조감독 시절을 보낸뒤 1970년 <잃어버린 면사포>로 감독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첫 영화로 흥행적 성공을 한 뒤부터 근래에 이르기까지 60편이 넘는 영화를 만들었으며 멜로드라마,사극, 액션, 전쟁, 성관계, 사회/여성 문제 등 여러 장르들을 거침없이 넘나들며 자신만의 독특한 연출 스타일을 확보했다. 그는 또 한국영화의 시장성을 확대하기 위해 70년대 중국이나 일본과는 다른 태권도를 기반으로한 소위‘발차기’무술의 액션영화를 개발했고 일부를동남아에 수출하여 명성을 쌓았다. 그걸 계기로 이 감독은 할리우드에 초청되어 한두 개 영화를 연출했으나 국내에선 상영되지 못했다. 그리고 그는 80년대 중반에두성 영화제작사를 세우고 롯데월드시네마를 포함한 몇개의 영화관을 열어 제작과 배급까지 활동범위를 넓혀갔다. 그러나 동시대 감독들이 그랬던 것처럼 검열문제는 그 역시 피해갈 수 없었다. 예컨대 그의 <최후의 증인, 1979>은 검열과정에서 적잖은 40분의 분량이 잘려나가는 바람에 상영이 불가능했었다(참고로 다행히 이영화는 20여 년 후 잘린 부분을 완전히 복구할 수 있어서 2002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원래의 모습 그대로 상영됐다).감독의 60여 편 가운데 라 로셀국제영화제에 초청된영화들은 <피막, 1980>, <연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1983>, <장남, 1985>, <뽕, 1986>, <내시, 1986>, <청송으로 가는 길, 1990>의 여섯 편으로 1980년에서1990년 사이에 나온 작품들이며 국내와 국제영화제에서 상을 받은 감독의 대표작에 속한다.<피막>은 유교전통의 가부장제도 밑에서 자유를 박탈당했던 여성들의‘한’을 그린 추리와 무속 요소가 짙게 배여 있는 수작으로 1981년 한국의 연극영화예술상을 받았다. 그리고 같은 해 한국영화로서는 처음으로 베니스영화제에 초청되어 특별감독상(ISDAR)을 받았고,다음 해에 페사로국제영화제에 다시 초청을 받았다.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는 여성의 성적 가치관이 가차없이 착취당하는 조선시대 계급사회의 부조리를 보여준여성주제의 또 다른 작품으로 1983년 대종상영화제에서 최우수영화상과 감독상을 받았고, 1984년 칸영화제의‘주목할 만한 시선’경쟁부문에 선정됐었다. 한국영화가 이 부문의 경쟁영화로 뽑힌 것은 그게 처음이었는데, 홍상수 감독의 <하하하>가 올해 같은 부문에서 경쟁하여 대상을 받았다. <뽕>은 일정시대 무능한 남편때문에 먹고 살기 위해 동네 남자들과 잠자리를 같이하는 한 젊은 여인의 삶을 해학적으로 풀어낸, 성관계에 대한 새로운 시각의 지평을 펼친 영화로 한국의 영화평론협회로부터 최우수영화상을 받았다. <장남>은 90년대,핵가족 시대에 들어선 한국사회에서 전통적인 장남의 역할이 어떻게 이질화되어 가는지를 말하는 현실성의 영화다. 이 영화는 런던국제영화제에 초대됐었다. <내시>는감독에 소속된 두성 영화사에서 제작한 첫 번째 영화다.16세기 말 명종 시절의 궁정을 무대배경으로 자신의 딸을 좋아하는 청년을 거세시키고 자신의 세력을 위해 딸을 궁녀로 만드는 한 문관의 폭력에 짓눌려 목숨을 잃는두 연인의 비극적 운명을 다뤘다.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연상시키는 비극이다. 액션감독으로 이름을 날리던 이 감독의 무술에 대한 실력은 <내시>에서도그 빛을 발한다. <내시>는 베를린국제영화제의‘파노라마’부분에 선정됐었고 할리우드의 아카데미상 추천대상에 올랐던 영화다.<청송으로 가는 길>은 90년대 초 서른여덟 번의 죄를 짓고 군산 교도소서 생을 마감하는 72세의 경범과 그를 돌봐주는 교도소 소장의 따듯한 인간애에 대한 이야기며, 범인 역을 맡은 중광 스님의 무위자연 연기를 통해죽은 무소유자의 삶과 스님의 모습이 겹쳐지는 진솔한영화다. <청송으로 가는 길>은 1990년 모스코바국제영화제와 1992년 라 로셀국제영화제의‘세상 그대로’의부문에서 이미 소개된 바 있으며 한국 영화평론협회의상을 받았다.
이두용 감독을 환영하는 관객들
라 로셀국제영화제는 처음부터 비경쟁영화제로 커왔다. 전통에 따라 해마다 140여 편으로 짜여 지는 프로그램은 세계적인 영화사의 흐름을 재조명하는‘회고전(Retrospective)’과 세계 각처 주요 감독들의 작품에 초점을 둔‘헌정시사회(Hommage)’그리고 근래 국제적으로 주목을 받고 있음에도 배급사를 찾지 못해 프랑스의 일반상영관에서 상영 기회를 갖지 못하는 영화들을초청하여 프랑스에서 초연을 하는‘세상 그대로(LeMonde tel qu’il est)’또는‘파노라마’등의 세 분야로나눠져 진행됐다.그리고 세 부문의 프로그램은 영화제 본부의 대 상영관 두 개와 그 옆 드래곤 영화관의 네 개의 크고 작은 영화관에서 진행됐다. 이두용 감독의 영화는 드래곤의 극장에서 상영됐는데, 처음 이틀은 잠잠한 편이었다. 그러나 셋째 날로 들어서면서 분위기는 눈에 띄게 달라졌다.극장 주변에는 이 감독을 보고“브라보!”하면서 반가워하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기자들의 인터뷰 요청도 갈수록늘어났다. 이 감독의 인기는 닷새 날 째 절정에 달했었는데, 이날 기자회견장은 발디딜 틈도 없이 기자들로 꽉 차있었다. 사회는 프로그래머 앙글레어와 칸의 동양영화선정자인 프랑스의 평론가 막스 테시어가 맡았다. 기자들은 주로 한국의 영화제작 조건에 관해 물었는데, 그 밖에 남북영화인들의 관계문제, 외국영화의 수입상태, 한국정부의 지원제도와 감독들에 대한 대우 문제에도 관심을 보였다. 그리고 여섯 편의 영화에 대한 질문과 대답시간에는 비평보다 칭찬이 더 많았다. “<피막>과 <물레야 물레야>에서 한국여성의 문제를 남성의 입장에서 훌륭하게 밝혔다. 산업화 이후 핵가족 시대에 장남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현실적 묘사는 우리에게 많은 질문을 던진 충격과 감독의 명작이었다. <청송으로 가는 길>에서주인공을 연기한 사람이 스님이라는데 그의 자연스러운연기는 어떤 배우도 해내기 힘든 진실의 표현 그 자체였고 주인공의 관속에 화장지를 넣은 장면은 동양철학과미학이 강하게 숨 쉬고 있어 아주 인상적이었다. 영화의주인공들이 모두 죽거나 비극적으로 끝나는데, 어설픈해피엔딩이 없다는 점에서 당신의 영화는 장르에 상관없이 한국의 현실을 잘 반영했다고 본다. <뽕>이 3부작까지 나왔다고 들었는데 한국의 컬트영화냐?”등이었다.기자들의 질문에 이 감독은“나는 사실 흥행영화도 많이 만들었다. 그러나 흥행영화와 예술영화를 구분하지는않는다. 흥행이 좋은 예술영화라면 이상적이겠지만 현실적으로 쉬운 일이 아니며 내 경우를 말하면 세 편의 흥행영화를 만들어야 내가 정말 만들고 싶은 영화 한편을 만들 수 있는 정도다”라고 대답하면서 한국영화계가 처해있는 현실에 대한 여러 설명을 덧붙였다.다음은 이두용 감독과 인터뷰를 한『카이에 듀 시네마(프랑스의 이름난영화전문잡지)』의 평론가 방쌍 마트리캉의 평을 인용한 것이다. “올해 영화제에서 가장 관심을 둔 건 당신의 영화다. 물론 새로워서 그렇기도 하지만영화의 수준에서도 단연 뛰어나다. 당신의 주도면밀한장면처리와 사건에 관한 적절한 시공간의 설정, 역에 어울리는 배우들의 선정과 이들의 연기력은 실로 놀랍도록세련되어 전체적 조화를 이룬다. 또 주인공들의 내적 상황을 음악으로 대리 표현하는 방법은 이야기의 전달에있어 정적이면서 동시에 시청각 요소가 일치하여 감동적이다. 나는 <내시>에서 중국의 쿵푸 스타일과 전혀 다른 한국 고유의 무술 테크닉을 보이는 액션장면을 보면서 너무 놀라워 감탄을 했다. 당신의 액션영화는 나에게새로운 발굴이다”.프랑스에서 으뜸가는 배우 미셀 피꼴리도 이 감독의영화에‘빠진’사람 중의 하나였다. 마침 라 로셀국제영화제의 오마주 부문에서 그가 연기한 영화들이 상영되고있어 그를 자주 봤는데, 어느 날 그는 뜻밖에 영화제 본부 옆의 중국식당에서 점심을 하고 있던 이 감독을 부인과 함께 찾아왔다. 그는 막 <뽕>을 보고 왔다면서“군더더기가 없는 서술형식이 참 좋았다. 나도 배우이지만 주인공(삼도리) 역의 남배우(이대근)의 익살스러운 연기는일품이었다. <뽕>을 떠나서도 일반적으로 한국배우들의 실력이 높은 데에 놀랐는데 한국에 훌륭한 배우학교가 많은가?”라고 물었다. 그러면서 그는“10월에 퐁피두센터에서 한국영화회고전이 열리는데 기대가 크다”고하면서 한국영화에 대해 이런저런 질문을 많이 했다.기자회견 뒤에 이 감독은 파리 근처의 한 고등학교에서 온 4, 5학년의 학생들과 대담시간을 가졌다. 열여섯여 명의 학생과 세 명의 여선생님들이 참여한 만남이었는데“학생들은 해마가 시청각 수업의 일부로 영화제를방문하여 외국 감독을 만나고 그의 나라의 문화를 배우는데 올해는 이두용 감독을 선택했다”고 한 선생님이 만남의 동기를 설명했다. 그러면서“애들이 영화를 통해한국에 대해 많을 것을 배우고 있다. <장남>을 보면서얼마나 우는지 선생들도 같이 울었다. 애들이 <피막>과<물레야 물레야>를 보고 나서 한국여성의 강인함에 놀라면서도 너무 비참하다고”하면서“한국의 자연이 그렇게 이름다운 줄 미처 몰랐다. 한국여성들의 전통의상은정말 아름답다”는 칭찬을 덧붙였다.영화제의 끝에 폐막식이 있던 날 평소 잘 나타나지 않던 시장이 와서 이두용 감독에게 수고했다며 그의 성공을 축하했다. 그러자 어느 기자는 내 귀에다 대고“한국정부에 TGV 급행열차 기술을 팔기 위해 특별히 찾아온것”이라고 소곤거렸다. 알고 보니 라 로셀 지역은 테제베 열차의 생산지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 나는 우연히 프랑스 대통령 미테랑이 테제베 협상을 위해 서울로 간다는 기사를 읽고 웃었다.